항목 ID | GC04700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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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憘 |
이칭/별칭 | 사열(思悅),남악(南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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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관직 | 호조 판서 겸 동지춘추관사|인천 부사|동부승지|강화 부사|주청부사 상호군|황해도 감사|충청도 관찰사|한성부 좌윤|형조 참판 |
출생 시기/일시 | 1547년 - 권희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권희 증광시 진사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4년 - 권희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권희 종묘 서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권희 인천 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권희 헌납·집의·동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권희 도승지·병조 참지·충청 감사·강화 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0년 - 권희 대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권희 주청부사 상호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권희 황해도 감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권희 호조 참판·도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권희 자헌대부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24년 - 권희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24년 - 권희 자헌대부 임명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시대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 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사열(思悅)이고 호는 남악(南岳)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권상(權常)이며, 할아버지는 권진(權振)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권욱(權旭)이다.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딸이다.
[활동 사항]
권희(權憘)[1547~1624]는 1568년(선조 1)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고, 1584년(선조 17)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한림(翰林)[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각 조(曹)의 낭관(郞官)과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양사(兩司)의 관직을 지냈다. 이어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92년(선조 25)에는 종묘 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권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할 때 역대 왕들의 신주(神主)와 왕실의 어보(御寶), 개국(開國) 이래 구전(舊典)을 가지고 행재소(行在所)[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나들이할 때 머무르던 곳]에 도착하여 난이 끝난 후, 종묘의 전례(典禮)를 모두 복구할 수 있게 하였다.
권희는 같은 해 11월에는 임시로 인천 도호부사에 부임하여 1개월간 재임하였다. 1596년(선조 29)에는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사간(司諫),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인 종부시(宗簿寺)의 정(正),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 집의(執義) 등의 관직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1599년(선조 32)에는 도승지(都承旨), 병조 참지(參知), 충청 감사(忠淸監事), 강화 부사(江華府使)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대사간으로 사간 정곡(鄭轂), 헌납 최충원(崔忠元), 정언 이구징(李久澄) 등과 함께 성혼(成渾)이 산림 학자(山林學者)로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직을 삭탈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권희는 1603년(선조 36)에는 동지사(冬至使) 이외에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인 주청부사 상호군(奏請副使上護軍)으로 명나라에 가서 왕비의 명복을 빌고,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인 「곤여 만국 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지고 돌아왔다. 1604년(선조 37)에는 황해도(黃海道) 감사로 재직하면서, 도내 백성들이 흉년으로 기근이 든 것을 염려하여 풍년이 든 호남 지방에서 곡식을 수송하여 도민에게 나눠주고 종자도 나눠주어 제때 뿌릴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금산 군수(錦山郡守), 광주 목사(廣州牧使) 등을 지내고, 1607년(선조 40)에는 호조 참판, 도승지가 되었다.
권희는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위 사건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923년 인조반정으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 해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권희는 주청부사 상호군으로 명나라에 다녀 온 공로로 가자(加資)되고, 전(田) 15결과 외거 노비 3구를 상으로 받았다. 또한 1624년(인조 2)에는 임진왜란 때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이후 호성선무원종공신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