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효행 관련 고문서. 「권병천등상서」는 단성·거창·진주 등 경상우도 유생들이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진정서이다. 매우 긴 글로 하진태의 효행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진정서를 접수한 어사는 사림의 공의를 인정하고 효행을 적은 원장(原狀)을 등서(謄書)하여 들일 것을 지시하는 등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에 전해오는 김덕령 장군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된 사연에 관한 설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의 활약상은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 오고 있으며, 근래에는 신동흔의 『조선의 영웅 김덕령』과 안동준의 『진주 옛이야기』 등에 수록되어 있다.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효자로 소문난 김덕령(金德齡)이 스물두 살 때였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단동촌동장수본」은 단동촌 동장이 사죽집강(沙竹執綱)에게 하진태가 행한 효행의 실상을 서면으로 보고하는 문서이다. 수본(手本)은 공사(公事)에 관하여 상급관청 또는 관계 관서에 보고하는 문서이다. 단동은 사죽리에 속한 자연부락 명칭으로 흔히 단목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사죽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단목리로 통일되었다. 하진태가 어머...
-
조선시대 진주목 사천군 장암리에 설치된 조창(漕倉). 경상도는 1403년(태종 3) 조운 영역에서 제외된 뒤로 경강선(京江船)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항로가 험하여 해난사고가 많았고, 사선(私船) 선가(船價)의 지급도 막대하였다. 또 왕권을 확립하려고 여러 제도 개혁을 추구하던 영조는 세곡 운송제의 문제점을 조운 기능의 강화로 해결하려고 관선조운제(官船漕運制)를 복구하고자...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위거(渭擧), 호는 지우당(至愚堂).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5대손]이며, 아버지는 강여완(姜汝完)이다. 학문과 인품으로 이름을 날린 강세준(姜世儁)의 아버지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이 이미 성인의 모습과 같았다. 집이 본...
-
조선 중기의 문신. 1642년(인조 20년)부터 1643년까지 진주목사로 재직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는 진주목사로 있는 동안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닦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대수가 진주목사로 부임해 있을 당시, 그의 덕행과 선정을 기념하여 선정비가 세워졌다. 비의 제목은 "목사강후대수청덕선정비(牧使姜侯大遂淸德善政碑)"로,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술(彦述).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득윤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또한 청렴하고 근후하여 가훈(家訓) 3편을 지어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의 상...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위수(渭叟), 호는 만락재(晩樂齋).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1560~1627]의 증손이다. 성품이 고결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동약(洞約: 조선시대 마을 단위로 운영되던 향약(鄕約))을 수정하여 풍속을 교정하였다. 만년에는 월배(月拜)[현재의 대구 달서구, 월배(月背)라고도 함]의 도원동에 터를...
-
고려 전기의 장군 강민첨(姜民瞻)[963~1021]을 그린 초상화. 강민첨 장군은 본관이 진주이며,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는데다가 굳세고 결단력이 있어 주로 전공을 세워 입신하였다. 「강민첨 영정」은 조선 후기의 화가 박춘빈(朴春彬)이 18세기에 그린 반신상의 초상화이다. 「강민첨 초상」의 상단에 있는 찬문(贊文)과 그 옆의 기록에 의하면, 이 영정은 고려시...
-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상능(尙能), 호는 지지당(遲遲堂).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매우 추운 겨울날씨에도 베짜기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는 무엇을 하기 위함입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너의 옷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대답하니,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로 하여금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울면서 날실을 잘랐다. 어머니가 이를 보고 다시는...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여진(汝眞), 호는 후산(後山). 진사에 합격하고 행의(行義)가 곧아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후산정(後山亭)을 세웠으며 유집이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조(司馬條)」에 이름이 올랐으며,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진(子眞), 호는 매고(梅皐). 아버지는 지우당(至愚堂) 강내운(姜來運)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6세손이다. 학문이 뛰어났고, 품성이 곱고 청결하였다. 재주가 있고 가슴에 뜻을 품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은사(隱士)로 생을 마치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유집이 있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이자 평론가.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시호는 헌정(憲靖). 아버지 강현(姜鋧)과 생모 광주이씨 사이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를 누렸으며, 할아버지...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원회(源會), 호는 설악(雪嶽). 매오(梅塢) 강건(姜鍵)의 손자이고,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였다. 이만구(李晩求)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한말의 유학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 『주역연의(周易演義)』, 『중범가의(中範家儀)』가 있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미중(美仲), 호는 소은(素隱). 조선 중기의 무신인 강덕룡(姜德龍)의 6대손이고, 아버지는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이다. 어머니는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의 딸이다. 1734년 진주시 대곡면 설매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라 6~7세에 문리를 알았으며 효성 또한 뛰어났다. 한말 선비 이도묵은 강식준의 학문은 경...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평(君平). 호는 매계(梅溪).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우 강여완(姜汝完)과 함께 외삼촌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에게서 학문을 익혔는데, 동학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고 한다. 일찍이 벽 왼편에 조석규가 쓴 ‘敬義誠愼(경...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군기(軍器)다. 조선 중기 진주 출신의 무신인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손자다. 조선 시대 진주 지역의 선비인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에게 학문을 배웠다. 대의(大義)를 통달하고, 또 지략과 뜻이 커서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순(聖淳), 호는 약산(若山)·유당(留當). 1788년(정조 12)에 태어났으며 영조·정조 때 예단(藝壇)의 총수였던 강세황(姜世晃)의 손자이다. 무과에 등제하였으며 벼슬로는 군수를 지냈다.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문인화가로서 기량이 높았다. 매화와 산수(山水)에 능하여 김정희(金正喜)와 신위(申緯)의 칭송을 받았다. 「강안주유도(...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준여(俊汝).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후손이다. 진주 출신으로 평소에 효행을 실천하였다. 나이 겨우 7, 8세 때 아버지가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대어 넣으니 병이 나았다. 향리에서 경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아버지는 참의(叅議: 조선시대의 정3품직)를 지낸 강우(姜佑)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자질이 있어서 지방 사람들이 유림의 재목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자라서는 글 솜씨와 행동거지로 널리 명성을 떨쳤다. 당대에 높은 학문적 식견으로 이름을 날리던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이 영특하고 곧으며 빼어난 인재라고 하면서 경탄하였다고...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자유(子由).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1493~1552]의 현손(玄孫)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당암(戇菴) 강익문(姜翼文)[1568~1647]의 제자이다. 재주가 뛰어났으며, 장중하고 과묵하였다. 스스로 삼가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죽오(竹塢) 하범운(河範運)에게서도 배웠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미백(美伯). 조선 중기의 무신인 강덕룡(姜德龍)[1560~1627]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강흥운(姜興雲)이다. 어머니는 인재(忍齋 ) 하윤관(河潤寬)의 딸이다. 순박하고 온후하였으며, 행실을 지극히 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저서『겸재집(謙齋集)』의 내용 중에 하홍도가 북인인 정인홍(鄭仁弘...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문거(文擧), 호는 매은(梅隱). 조선 중기의 무신인 강덕룡(姜德龍)의 5세손으로, 부인은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의 딸이다.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 명망이 높았으며, 고장 사람들이 모두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澹拙). 만호(萬戶)를 지낸 강태복(姜泰復)의 아들이며, 정내교(鄭來橋)의 외손자이다. 1710년(숙종 36)에 태어났으며, 1754년(영조 30)에 운과(雲科: 음양과)에 급제한 뒤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서울 삼청동에서 진경산수화가인 정선(鄭敾)과 이웃하여 지내면서 그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姜世晃...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주백(周伯). 수헌 강숙경(姜叔卿)의 후손이다. 용력이 뛰어났다. 1728년(영조 4)에 무신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을 도와 적들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절충장군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사당. 진주하씨의 사우로서, 하즙(河楫)·하윤원(河允源)·하자종(河自宗)·하계종(河啓宗) 등 4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하즙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원정(元正)이라 하였다. 그 아들인 하윤원은 충혜왕 말년에 등제하여 경상, 서해의 안찰사를 지내고 원주와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경상 대학교 도서관 고서실 문천각에 있는 조선 후기 책판. 경상 대학교 소장 『역양집(嶧陽集)』 책판은 역양(嶧陽) 문경호(文景虎)의 시문집이다. 문경호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용암 서원 창건을 주도하고 『남명집(南冥集)』의 간행에 참여하여 발문을 쓰는 등 남명학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청주한씨의 고문서.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호구단자 60건, 준호구 5건, 입후성문(立後成文) 및 소지(所志) 연점문건(連粘文件) 1건, 공명첩(空名帖) 3건, 교지 13건, 전령 2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구단자는 총 60건으로 모두 청주한씨 가문의 것이며, 준호구도 5건이 같이 있다. 1789년(정조 13) 한응점...
-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에 있는 경상대학교 문천각 소장의 행정문서집. 경상대학교 문천각에 소장되어 있는 호구단자와 준호구철은 김상조가 여러 가문에 잡다하게 널려 있던 자료들을 모아 편철한 것으로 총 6책이다. 제1책에는 남해 거주 남원양씨 가문의 호구단자·준호구 22건(19세기), 곤양·삼가 거주 청주한씨 가문의 호구단자·준호구 6건(19세기), 여수·사천·곤양 거주 남평문씨 가문의...
-
조선시대 경상우도의 병무를 관할하던 관서. 조선 전기에는 경상도에 3명의 병마절도사(병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했다. 그리고 낙동강을 기준삼아 경상도를 동서로 나눈 군사구역으로서 좌도와 우도를 설정해 좌병사의 병영은 울산에 두고 우병사의 병영은 창원의 합포(지금의 마산)에 두었다. 우병영이 있던 합포영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분탕되면서 병영이 둘만한 자리가 못되기...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사우.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河拱辰)[?~1011]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04년(순조 4)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落水菴)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으며, 1869년 부조묘(不祧廟)로 되어 다시 자손 봉사하게 되었다. 하공진 장군의 “정...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의 공북문 성벽에 새겨진 글귀. 공북문 성벽 석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문인 공북문(拱北門) 서쪽 성기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가로 80㎝, 세로 25㎝ 크기의 석재에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씌어져 있다. 이는 진주성의 수축을 담당하였던 구역의 표시를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세...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에 있는 사당. 공자(孔子)를 모시는 사당으로, ‘궐리’는 중국 산뚱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가 태어나서 살던 궐리촌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진주 이외에 충청남도 논산시의 노성(魯城)[충남기념물 제20호], 경기도 오산시의 궐동[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등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있다. 노성궐리사는 1716년(숙종 42)에 권상하·김만준·이건명 등...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김개(金介)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안의(安義)의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 1826년(순조 26)에 증직을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국립 진주 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선조가 김시민에게 내린 선무공신 교서. 공신 교서는 왕명 문서 가운데 문체나 재료 등에 있어 최고의 격식을 갖춘 문서였다. 사전에 공신 개개인에 맞는 문장을 별도로 짓게 하고, 교서 제작에 쓰일 비단 등도 별도로 마련한 뒤 서사를 맡은 관원이 정서하였고, 최종적으로 왕의 인장인 보인(寶印)을 찍어 발급하였다. 「김시민 선무...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창렬사(彰烈祠) 내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등에게 내린 사제비. 김시민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면오(勉吾)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의 공방전 끝에 적 30,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시켰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김시민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김시민(金時敏)의 공적을 기리는 비. 김시민[155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에 진주 지역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세워졌다. 성여신의 문집인 『부사집(浮査集)』에는 ‘진주목사김공전성각적비명(晋州牧使金公...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안의(安義)에서 무신란을 일으키자 삼촌인 김필만, 김필락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영장 이석복과 연합하여 인근의 수령들과 더불어 역도들을 협공하다가 모두 전사했다. 후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1890년(고종 28)에는 김여삼, 김필만, 김필락의 공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 따르면, 1877년(고종 14)부터 1878년까지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구휼미 1천4백6십여 석과 소금 1백5십여 석을 창고에서 덜어내어 기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
조선 중기의 문신 김우옹의 시문집 책판. 이 책판은 조선 명종과 선조 때의 문신인 동강 김우옹(金宇饔)[1540~1603] 선생이 1585년(선조 18)에 펴낸 역사책이다. 김우옹은 1567년(명종 22)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정자, 병조참판, 대사성을 거쳐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1661년(현종 2) 그의 문인들에 의해『동강문집(東岡文集)』이 편집·간행되었으며, 이 판본을 대본...
-
조선 말기의 효자.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은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김종길(金鍾吉)은 성품이 바르고 그 행함에 지나침이 없었다. 17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거상을 함에 있어 모든 절차가 한결같았다. 후에 아버지가 병들자 정성을 다하여 구완하였고 또한 똥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폈는데, 병이 쉽게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백장사(白章蛇)의 기...
-
조선 말기의 효자.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봉양함이나 죽어서 장례를 치름에 그 정성을 다하였다. 초상을 치르던 중 깊은 밤에 움막에서 불이 나서 걷잡을 수 없었다. 불꽃을 무릅쓰고 영구(靈柩)를 안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통곡을 하니, 하늘에서 폭우를 내려서 불을 껐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는 여묘에서 3년상을 모시니 맹호가 와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1878년(고종 15)...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병법을 공부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인근 고을 안의에서 일어나자 진주영장 이석복의 막하에 의병으로 들어가 반도들과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양무공신 2등에 기록되고 참판에 증직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호(士浩).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용략이 뛰어났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일어나자 진주영장 이석복(李碩福)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에도 자신의 공을 절대 앞세우지 않았고 시골에 파묻혀 여생을 보냈다. 사림에서...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잘 섬겼는데,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친지들에게 예로써 접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남편 김중철이 오랫동안 학질로 고생하였는데, 사람의 살이 효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렸다. 이후 남편의 병세가 호전되는...
-
조선 말기의 효자. 효성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어 다섯 달 동안 백약(百藥)이 무효하였다. 단지 사슴의 피만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하늘에 빌었더니 산에서 사슴이 저절로 내려왔다. 사슴을 잡아 그 피를 드렸더니 병이 즉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에 정려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추백(秋佰), 호는 노주(蘆洲). 아버지는 김단(金鍴)이며, 후에 김곤(金錕)에게 입양되었다.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 헌납, 문학, 보덕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694년 사간으로 있을 때 서인인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를 도모하자 이들을 탄핵하였다. 후에 숙종이 민씨의 폐위를 후회하게 됨으...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김해 출신이다. 같이 활동했던 김필락(金弼樂)은 사촌동생이고, 김여삼(金汝三)은 그의 조카이다. 영조 무신란에 김필락, 김여삼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반군을 진압하였다. 향군(鄕軍)을 모아 남강을 건너가 이석복(李碩福)과 인근의 여러 수령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하다가 전투 중에 순절하였다.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에 기록되었다. 1890년(고종...
-
조선 중기의 문신. 1671년(현종 12)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1673년까지 재직하였으며, 벽오당(碧梧堂), 조양각(朝陽閣), 의곡사(義谷寺) 등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 이름이 올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김해허씨 문중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신. 1649년(인조 27) 평안병마절도사 안주목사에 재직 중이던 허동립(許東岦)[1601~1662]이 진주의 하진(河溍)[1597~1658]에게 보낸 서신이다. 한 통에서는 하진의 약재 요구에 대한 답장과 아울러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었고, 또 다른 한 통에서는 하진의 완쾌를 비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구갑문과 기하문으로 장식한 조선시대의 경대. 나전구갑문좌경은 나전칠기(螺鈿漆器)를 이용하여 만든 경대(鏡臺)로서, 조선시대에 화장도구를 담아두고 화장할 때 사용한 규방가구 중 하나이다. 이 나전귀갑문좌경은, 재일동포 실업가였던 두암 김용두가 해외로 유출된 우리나라 유물을 자비로 구입해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함에 따라 이를 별도로...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가에 있는 바위벽과 그에 새겨진 글씨. 남강 암각은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는 논개(論介)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벽이다. ‘남강 암각(南江 巖刻)’이라는 명칭은 진주시에 있는 남강 가에 있는 바위벽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그냥 ‘암각’이라고도 불린다. 창렬사 경내 어제비문을 정비한 다음 처절했던 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字)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伊溪). 아버지는 신촌(新村) 남해준(南海準)[1598~1667]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권지(權誌)의 딸이다. 처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신지의(申之義)의 딸이다. 효종과 숙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이다. 1620년(광해군 12)에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 월촌에서...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집현산 중턱에 위치한 절터. 임진왜란 후 응석사가 복원되기 전에 진묵대사(震黙大師)[1562~1633]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소재한 응석사의 왼쪽으로 집현산에 오르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집현산 중턱 해발 400m 정도 올라가면 내원암 사지가 있다. 1960년대까지 한국불교의 고승들이 수행하던 도량으로 알려져 왔으나 19...
-
1599년 의병인 노인이 일본과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기록한 일기문. 조선 시대 학자인 금계(錦溪) 노인(魯認)[1566~1623]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왜병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2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명나라 사절단의 배로 도주하여 북경을 거쳐 귀국하였다. 노인 『금계 일기』는 이때 겪은 경위를 쓴 일기문이다. 1599년(선조 32) 2월 22일부터 같은 해...
-
조선 후기 학자 하복호의 문집. 하복호(河復浩)[1726~1805]의 자(字)는 정보(亭甫), 호는 단사(丹砂), 또는 방아와(訪我窩)이다. 아버지 하응명(河應命)과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어린 시절부터 조숙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형제, 친척들과의 우애도 깊었다. 벼슬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승지(承旨) 이동화(李東嘩), 진사(...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꽃. 조선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1451년(문종 1) 명나라에서 옮겨 심은 것을 여러 손을 거쳐 1675년(숙종 1) 남평문씨(南平文氏)인 문두징(文斗徵)이 이곳에 심은 것이다. 이곳에서는 처녀꽃이라 불리며, 20여 그루가 한데 보존되어 있다. 가방리 462번지[금산순환로426번길 5-13]에 위치하며, 현재 남평문씨 문중에서 이...
-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에 있는 서원 터. 도동서원은 조선 초기 단종 때의 충절 신하였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김문기(金文起) 등 4위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그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이 서원도 훼철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단종을 위해 죽은 사화공신 중 1순위인 삼상(三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있는 효행비.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이 된 창원황씨 황섭(黃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7㎝, 너비 58㎝,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신에 비해 머릿돌이 매우 커서 사방에 받침기둥을 마련하였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창렬사에 배향된 배위에 대한 내용을 새긴 석비. 창렬사의 동사와 서사에 배향된 인물에 대한 기록이므로 ‘동배서배비’라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성전투(진주대첩)와 제2차 진주성전투(계사년 전투)에서 순국한 인물들 39기의 위패 중 창렬사의 동사와 서사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1833년(순조 33) 임금이 위무의 글을 지어 보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왕지리 왕지마을에서 행하는 마을주민의 공동제사. 약 1백 60여 년 전 이 마을에 실제로 살았던 이차순을 기리는 마을제사이다. 이차순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전답 약 450여 평을 마을재산으로 기부하였다. 이에 마을주민들은 그가 기부한 전답의 수익금으로 매년 그를 위해 공동으로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을에 전답을 기부하고 죽은 이차순의...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소재하는 건축물. 1740년(영조 16) 이래로 의기 논개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의기사(義妓祠)를 지켜온 진주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건립되었다. 원래는 논개 사당 아래 있었는데, 진주성 정화사업을 추진하면서 1969년 지금의 촉석광장 서북쪽,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북쪽으로 옮겼다. 목조기와의 익공형식 건물이다. 대문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익경(翼卿)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전쟁의 책임자인 병사(兵使)가 겁을 먹고 난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칼을 뽑아들고 병사를 위협하며 진군을 재촉했다. 뒤에 경상도에 어사로 왔던 박문수가 뒷이야기를 듣고 이를 나라에 보고하였으며 그로 인해 나라에서 금위영 별군관으로 불렀으나 사...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는 사당. 진주정씨의 사우로서, 정예(鄭藝)·정시양(鄭時陽)·정유(鄭裕)·정수균(鄭守均)·정홍차(鄭洪且)·정안사(鄭安社)·정수(鄭需)·정을보(鄭乙輔)·정이오(鄭以吾)·정황(鄭璜)·정분(鄭苯) 등 11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들 11위 중 진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이오, 정분 부자로, 정이오[1354~1434]는 고려 공민왕대에 나서 세종대까지 활약...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국립 진주 박물관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박진영의 유품. 박진영 장군 유품은 조선 후기 무신인 박진영(朴震英)[1569~1641]이 남긴 유품들로,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의 밀양 박씨(密陽朴氏) 영동 정공파(令同正公派) 종손인 박성길(朴性吉)이 소장하고 있다가 2005년 후반부터 2006년 9월 9일까지 3회에 걸쳐 진주 국립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1...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박창윤(朴昌潤)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하달영(河達永)의 딸이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의하면, 1677년(숙종 3) 출생하여 1736년(영조 12)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706년(숙종 32) 사마시에 급...
-
조선 후기의 효부. 정유재란 때 일본군 정벌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딸로, 함양인 박태홍(朴泰弘)의 아내이다. 『증보 진양속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정숙하더니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남편이 병사하니, 정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계심에 손수 염습과 장례를 치렀다. 이후 시부모를 지성으로...
-
밀양사람 박효근의 효행을 정려(旌閭)하고자 임금께 올린 조선시대의 상서문(上書文). 이 문서는 밀양 사람 박효근의 효행이 뛰어나 어머니의 병환을 낳게 하여 진주를 비롯한 인근지역의 유생들이 정려해 줄 것을 요청한 상서문이다.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상서문과 완문, 입안, 교지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호구단자는 그냥 접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배접이나 보관용 상자...
-
철화로 대나무 무늬를 그린 대나무 마디 모양의 백자 병. 재일교포 실업가인 두암 김용두 옹이 수집하여 소장하던 유물 중 하나로 199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179점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9-17[남강로 626-35]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 내의 상설전시실 중 하나인 두암실에 전시되어 있다. 전체 높이 21.9㎝로 긴 원통형이다. 어...
-
철화로 구름과 용의 무늬를 그린 백자 항아리. 조선시대 17세기 후반에는 도자기의 색이 회색에서 유백색으로 바뀌어가고 달항아리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철회로 운룡문·초문·매죽문 등이 자유롭게 시문된 백자가 유행했다. 백자철화운룡문호는 당시에 많이 제작된 구름 용무늬[雲龍文]를 그린 철화백자의 유형이다. 또한 재일교포 실업가인 두암 김용두 옹이 수집하여 소장하던 유물 중 하나로 현재...
-
바람을 타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레(일명 비행기). 동양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 하나인『산해경(山海經)』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 기원 전 2세기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재미있는 사실은『산해경』에 하늘을 나는 수레인 비거가 그림까지 곁들여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에 대해 약간 언급해...
-
조선 후기의 학자 하익범(河益範)[1767~1813]의 문집. 하익범의 자는 서중(敍中), 호는 사농와(士農窩)로 진주 단동(丹洞) 출신이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송성담에게 사사받았고 예학에 뛰어났다.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가정 일을 잘 돌본 인물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담상문답(潭上問答)』, 『대학강의(大學講義)』 및 문집이 전하고 있다. 『사농와문집』은 저자가 죽은 지 30년...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한 어머니를 몇 번이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 하진태의 효행 실적을 단동촌 동장이 사죽집강에게 서면으로 보고하였는데, 사죽집강이 이것을 진주목사에게 서면 보고하고 현양을 요청한 것이다. 「사죽집강서목」에서 서목이란 하관이 상관에게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를 말한다. 즉 단동촌 동장이 집...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의 분묘 옆에 세워져 있는 재실. 영모재는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1454]을 기리고 있다. 정분은 본관이 진주(晋州)로 자는 자외(子畏),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856년 가을에 진양정씨 종중의 논의를 거쳐 재실을 짓기로 합의하여 정분의 묘소 동편 옆에 중건하였다. 재실을 짓게 된 간략한...
-
조선 중기의 학자 박태무의 시문집. 박태무(朴泰茂)[1677~1756]는 1677년 진주 내동리에서 아버지 박창윤(朴昌潤)과 진양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태안(泰安)이고, 부친은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진주 단목의 단지공(丹池公) 하협의 손녀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뛰어났으며,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남명의 학통을 계승하여 평생 학업을 갈...
-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내순(乃純), 호는 공금당(共衾堂).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성동일은 벼슬에 오르기 전에 부모상을 당하자 예를 갖춰 장례를 지냈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계모를 잘 모셨다. 벼슬에 올라서는 엄중하게 처리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공황(龔黃)[중국 한나라 공과 황 두 사람]에게 견주었다. 186...
-
조선시대 무신인 성동일의 유서를 담은 통. 성동일(成東一)의 자는 내순(乃純) 호는 공금당(拱衾堂)이며,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이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지극한 예를 행하였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계모를 정성껏 모셨다. 횡성현감, 내금위, 칠곡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정사를 잘 돌보았는데, 이 유서통은 그때 받은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 온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성동일(成東一)[1753~?]이 발급받은 호패와 가족의 호패꾸러미 일괄. 성동일은 본관이 창녕, 호는 공금당(拱衾堂)이다. 횡성현감, 칠곡부사 등을 지내며 정사를 잘 돌보았다. 이 호패는 1780년(영조 4)에 발급받은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의 후손 성조석 댁에서 보관하고 있다. 재질은 나무이고, 길이 10.5㎝, 폭 2.2㎝, 두께 0.9㎝이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사회(成師悔)이고, 아버지는 정사갑(鄭師甲)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성사회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혈서를 써서 세 번이나 영정 앞에 두고 갓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에 죽었다. 암행어사에 의해 이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1816년(순조 16)에 정려가 내려졌다....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 장안리에 위치한 성전암 내에 있는 건물. 인조[재위 1623~1649]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성전암으로 피신하였는데, 국난 타개를 위해 백일기도를 올린 뒤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성전암에서는 이것을 기리기 위해 인조대왕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한 전각 안에 인조대왕각과 산신각이 함께 있는데,...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화백(和伯), 호는 죽와(竹窩). 인조 때의 학자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워 가난한 형편에도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가게 되자 걸어서 서울까지 가 혈서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 그 지성스러운 효성에 감동하여...
-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책. 1705년 소촌도 관아의 역리가 역참(驛站) 경영에서 겪고 있는 폐해 상황을 상부에 진정하기 위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한지 필사본으로 모두 7권이다. 가로 30㎝, 세로 31.5㎝, 1면 13행, 1행에 평균 23자로 모두 82면의 분량이다. 소촌도의 역참 경영에 따른 폐해를 보고하기 위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
조선시대의 열녀·효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회생시켰으나 아직 위독한 상황이었다. 이 때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집 뒤의 바위틈에 산삼이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하여 실제로 캐어보니 산삼이 나왔다. 캔 산삼을 시탕하여 올렸더니 시아버지가 쾌차하였다. 한편 학...
-
조선 전기의 문인 하수일(河受一)[1553~1612]의 문집. 현재 초간본은 장서각(4-6197),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22), 고려대학교 도서관 晚松文庫(D1-A1450),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중간본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88-8),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617)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광정(李光靖)이 지은 행장에 “공이 일찍이 저술을 수집...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있는 비각. 조선 1718년(숙종 44) 9월 12일 숙종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위패를 모신 신당서원을 사액하고 예조좌랑 이안국(李安國)으로 하여금 제를 고하는 사제문비를 세우고 이를 보호할 비각을 세웠다. 조지서는 1474년(성종 5) 과거에 합격한 후 사가 독서하였으며, 연산군 때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내려왔다가...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상하 이층으로 이루어진 의걸이장. 쌍용이층의걸이장은 나전칠기(螺細漆器: 얇게 간 조개껍데기인 자개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내어 기물(器物)의 겉면에 박아 넣어 장식하는 칠공예 장식기법 중 하나)를 이용하여 만든 조선시대의 옷장으로 두암(斗庵) 김용두(金龍斗)[1922~2003]가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57점 가운데 하나이다. 쌍용이층의걸이장은 상하 이...
-
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
조선시대 악사 양덕수(梁德壽)가 엮은 거문고 악보. 『양금신보』는 1610년에 양덕수가 지은 거문고 악보로 1책 26장(52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에 살던 강태중의 집안에서 전해오던 고문서 중 하나이다. 2002년 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8호로 지정된 것을 강태중이 2004년 8월에 진주향안 등의 고문서와 함께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였다. 『...
-
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1597~1658]이 받은 교지첩. 하진의 호는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양조은함첩』은 1633년(인조 11)부터 1657년(효종 8)까지 25년에 걸쳐 받은 교지첩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진주하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 총 45매이며, 표지에 ‘양조은함첩(兩朝恩銜帖)’라 씌어 있다. 당시의 인사관리제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
-
임진왜란 중 잃은 관인(官印)을 다시 찾아 세운 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가 병마절도사 관인을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이후 1747년(영조 23) 이 도장을 남강 물속에서 건져 당시의 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조정에 아뢰었다. 도장에는 ‘慶尙右道兵馬節度使印(경상우도병마절도사인)’이라 새겨져 있고, 1582년(선조...
-
임진왜란 시 진주성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장졸들을 기려 지어 내려준 제문. 1833년(순조 33) 3월 11일 임금이 우병사(右兵使) 안광찬을 보내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의 넋에 제사하도록 유시하고, 아울러 문열공 김천일(金千鎰), 무민공 황진(黃進), 충의공 최경회(崔慶會), 충의공 장윤(張潤)에게 각각 제문을 지어 내려 제향토록 하였다. 그리고 양산주를 비롯한 12인에...
-
석가모니여래와 협시보살 세 분의 모습을 그린 불화. 높은 대좌에 놓인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조선 중기의 후불탱화이다. 2단의 대좌는 금니로 윤곽선을 그리고 흑선으로 연화문을 묘사했는데, 단순하고 형식화된 형태이다. 화면 상부에는 거꾸로 매달아놓은 듯한 연화로 천개를 묘사했다. 본존의 두광과 신광을 나타낸 광배는 키 모양이다. 삼존을 에워싸...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연계안(蓮桂案) 보관소. 연계재는 연계안을 보관하는 서재를 말한다. ‘연계’는 연방(蓮榜)과 계적(桂籍 : 문과 합격)의 첫 글자를 모아 지은 명칭으로, 연(蓮)은 사마시에 오른 사람을, 계(桂)는 문과에 오른 사람을 지칭한다. 1736년(영조 12) 사마소(司馬所)를 설립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보존하였다. 1841년(헌종 7) 문과 합격자 명...
-
조선 중기의 열녀 청주한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와 비각. 한응(韓譍)의 딸 청주한씨의 절개를 기념하기 위해 1736년에 세웠고, 1985년에 중건한 정려이다. 1593년 6월 16일, 왜적이 청주한씨를 끌고 가려하였지만, 끝까지 거부하다 자결하였다. 이에 영조가 정려를 내렸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746-4번지에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비각이 훼손되자 1985년에 중건하...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에 있는 열녀의 기념비. 칠원윤씨 문중 여인의 종부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870년에 건립되었다. 칠원윤씨 돈암공의 5대손부이고 한석건의 부인인 윤씨가 남편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자신도 곧 따라 죽으니 영조가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 고전적인 기와정려 형태로 8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건축하였으며, 안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의 입구에 세운 점과 기와...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부인을 기리는 효열비. 김해김씨의 아들 홍영대가 어머니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1862년에 세웠다. 옛 비석이 풍화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996년에 김해김씨의 후손인 홍학석이 그 옆에 새로운 비를 만들어 현재 나란히 서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천곡마을 앞산 기슭에 동북향하여 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오응운등상서」는 효자 하진태의 포증을 건의하는 경상우도 유생들의 건의서이다. 하진태의 노모를 향한 지극한 효행을 기리고 정려를 받기 위한 상서문은 하진태의 생존시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오응운, 최상갑, 정운현 등 진주 일원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정서를 올린 일종의 등...
-
조선 후기 고창오씨 오현덕(吳顯德)의 호구 내용을 목사에게 제출한 문서.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를 할 때 호주가 가족사항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제출토록 하였는데, 이 호구단자는 1789년(정조 3)에 오현덕 집안에서 작성한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상평동 191-4[큰들로114번길 7] 후손 오홍재 댁에 소장되어 있다. 주소, 호주명, 연령, 본관, 가족내역, 처가의...
-
조선 후기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기록한 일기. 『쇄미록(瑣尾錄)』은 조선 시대 선비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 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 후기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유계춘(柳繼春)[?~1862]의 묘. 유계춘은 경상남도 진주시 원당면(元堂面) 원당촌(元堂村) 출생이다. 그는 환곡(還穀), 포흠(逋欠) 등 각종 폐단을 지적하며, 1862년 대대적인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유계춘이 이끈 농민군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농민을 수탈하던 향리 4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고, 아전이나 부호의 집이 불탄 것이 126호,...
-
조선 후기의 문신, 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고(子固)·성유(聖攸), 호는 수운(峀雲)·가산(茄山). 『진양지』에 따르면 묵죽을 잘그렸다는 유진동(柳辰仝)의 6대손이며, 유혁연(柳赫然)의 종손이자 사간(司諫) 유성삼(柳星三)의 아들이다. 벼슬은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묵화(墨畵)로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조선 중기의 이정(李霆), 조선 후기의 신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태승(泰升), 호는 하곡(霞谷).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윤휘(尹暉)이고, 아버지는 첨정 윤면지(尹勉之)이다. 어머니는 참판 경섬(慶暹)의 딸이다.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665년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741번지[응석로 435]에 위치한 사찰. 응석사는 554년(신라 진흥왕 15)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할 뿐 자세한 건립경위는 전하지 않는다. 단지 응석사의 상량문에 1736년(영조 12, 건융 원년)에 상량했고, 1899년(광무 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진주 방면에서 국도 33호선을 따라 합천 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통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665년(신라 문무왕 5) 2월 혜통조사(慧通祖師)가 창건하여 월명사(月明寺), 숭의사(崇義寺)라고 불려왔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는 이 절에서 승병들은 양성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진주성이 함락된...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이경상등상서」는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경상우도 유생들의 진정서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진주목·감영에 수십 장의 진정서를 올렸지만 포증사업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자 암행어사에게 특별 건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 역시 공의를 빙자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 진정서를 올린 유생...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이광림(李光臨)이고, 아버지는 고응추(高應樞)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장흥고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따라야 할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진여(進汝), 호는 구와(懼窩). 아버지는 이만조(李滿肇), 형은 이광림(李光臨), 동생은 이광국(李光國)이다. 진사에 올라 문장에 능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승순(承順)에 어김이 없었다. 여덟 살에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면서 “사람은 다시 소년이 될 수 없다”는 구절을 읽고서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치재(致載), 호는 농아(聾啞). 이만형의 2남이다. 어릴 때부터 자율적인 학습태도로 공부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평을 하였고, 밖으로는 중후하고 안으로는 민첩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부지런한 학행을 통해 과거에 응시한 적은 있었으나, 곧 뜻을 바꾸어 향리에서 부모를 봉양하면서 모범적인 일상활동을 하였다. 이원조가 쓴 『농아...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인실부락에 있는 이기의(李琦儀)의 선정비(善政碑).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이기의(李琦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善政碑)로 1847년 12월 안간역(安磵驛)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1980년 진주-합천간 도로를 확포장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자리(미상)에서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인실부락 북서쪽 어귀 진주-합천 간 도로변으로 옮겨졌다. 사...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1719년(숙종 45)에 남편 이덕유(李德裕)가 세상을 떠나자,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고 스스로 상복을 입고 독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5년 뒤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중(汝重), 호는 월암(月菴).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이다. 이갈암(李葛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99년(숙종 25) 기묘년에 문과에 올라 사헌부 등에서 관직생활을 하며 명성을 얻었다. 만년에 진주 월아산 아래에 있는 동산에 정사를 세우고 편액을 ‘월암(月菴)’이라 하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백(致伯), 호는 안호(安湖). 정종의 열째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3대손이며, 이집(李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기항(李基恒)이고, 아버지는 이완길(李完吉)이며, 어머니는 박세현(朴世炫)의 딸이다. 경상도 진주 출생으로, 1838년(헌종 4)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가 된 이후 휘릉(徽陵) 별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휴(汝休), 호는 용암(龍巖). 승지 이유번(李有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는 현령 이민선(李敏善)이며, 어머니는 김봉(金崶)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8년(광해군 10)에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식년...
-
조선 중기 진주 목사인 이상일(李尙逸)[1600~1674]의 선정을 기리는 비. 이상일은 1650~1654년에 걸쳐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보덕(輔德)으로 전임되어 진주를 떠나자, 1654년(효종 5)에 이상일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973년에 옮겨와서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 비석군 가운데 있다. 비의 제목은 ‘牧使 李尙逸 去思碑(목사 이상일...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달후(達厚), 호는 갈모당(葛茅堂).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종손이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성리학에 뜻을 두고 깊이 연구하였다. 외삼촌인 모계처사 조석기(曺錫基)와 광양의 김성탁으로 부터 갈암 이현일의 학문을 배웠다. 말년에는 자기의 방에 갈모(葛茅)라는 문자를 붙이고 끝까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대학의 논...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 자는 대래(大來), 호는 청사(淸榭). 할아버지는 이현근, 아버지는 이정규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배소 광양에서 이현일에게서 수학하였고,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또한 시와 예절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행장에 나타나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계(淸溪). 증조할아버지는 이중광, 할아버지는 이현재, 아버지는 이명규이다. 1681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여 영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좌랑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향리인 진주에서 뜻있는 학우들과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특히 향약을 수립하는 등 미풍양속을 선양하는데 심혈을...
-
1726년(영조 2) 청계(淸溪) 이세후(李世垕)가 대과 급제 시 하사받은 종이 꽃.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방을 발표할 때 홍패(紅牌), 개(蓋)와 더불어 어사화를 하사하여 복두(㡤頭) 뒤에 꽂게 하였다. 급제한 사람은 어사화의 한쪽 끝을 복두 뒤에 꽂고, 다른 한 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넘겨서 입에 물고 3일 동안 일종의 시가행진인 ‘유가(遊街)’를 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수일(李守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이수일[1554~1632]의 본관은 경주,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왜군 격퇴에 공을 세우고 1603년 진주성을 증축하는 등 1605년 길주목사로 갈 때까지 진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수일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
-
조선 순조(純祖)[1790~1834] 대의 진주 목사(牧使). 1801년에서 1802년 사이 진주목사로 재직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순조 2년 6월 17일 (병진) 기록에는, 경상우도 암행어사가 이노수 등의 잘못 다스린 정상을 서계하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경상우도 암행어사 정만석(鄭晩錫)이 서...
-
1641년 간행된 이정의 시문집. 『귀암집(龜巖集)』은 1641년(인조 19)과 1749년(영조 25) 및 1902년(고종 39) 등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진주 동산리 간암 박태형 가문 소장 『귀암집』은 1641년에 간행된 초간본이다. 2011년 4월 28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귀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은 조선 전기 중종과 명종...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찬경(贊卿). 농아헌(聾啞軒) 이국정(李國楨)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하늘이 내린 성품이 강하고 밝아 바른 도리를 지켜 변치 않았다. 일찍이 유학자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의 문하에서 활동하였으므로 학문에 연원이 있었고,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2...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 할아버지는 이간, 아버지는 이유성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은 현모양처로 그 행실이 『진양지(晋陽誌)』에 잘 나타나 있다. 6세와 9세에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이대기 아래에서 품행이 단정하고 영리한 소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꾸준한 수행의 과정을 거쳤으며, 향시에 합격한 후에 향리인 진주에 머물면서 지인...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이중광(李重光)의 묘비. 이중광[1592~1685]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이다. 청송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데 힘썼으며,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재령이씨 입향조이다. 병자호란 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이중광이...
-
조선 후기의 효부. 본관은 재령. 이중광(李重光)의 딸이며, 한시회(韓時晦)의 부인이다. 시부모를 섬기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자 친정으로 와서 부모를 섬김에 또 효성을 다하였다. 나이 70이 되었어도 의복과 음식을 친히 마련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자 3년상을 치렀다. 숙종 대에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를 주고 숙부인(淑夫人)을 증여하였다. 『진양속지(晋...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재령. 자는 경휘(景輝), 호는 행와(杏窩). 할아버지는 이간, 아버지는 이유성이다. 이중광(李重光)은 그의 아우이다. 어머니 이씨부인은 현모양처로 『진양지(晋陽誌)』에 그 행실이 잘 나타나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아래서 성장하며, 성실하게 학문을 익히고 실천하였다. 유일(遺逸: 재야의 어진 선비)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을 제수 받고 군...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병사(兵使) 이진경(李眞卿)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 경상우병사 이진경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1702년(숙종 28)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있다. 1973년 진주성 내 비석군(碑石群)으로 옮겨졌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60㎝, 폭 71㎝,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얹었다. 이수의 조각이...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호랑이를 향해 크게 소리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대항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시아버지를 구했다. 이 일이 숙종조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 있는 이천경의 비. 이천경은 본관이 합천이고 호가 일신당(日新堂)이다. 비문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후손 이선(李璿)이 썼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오미마을 이천경의 묘 앞에 있다. 얕은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얹었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방언(邦彦). 조선 중기의 학자인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1592~1685]의 후예로 재기가 출중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젊어서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을 추종하여 따라 배우다가 돌아왔다. 이때 시로써 말하기를 “사람들이 호관(好官) 되기만을 요망하고...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재령. 아버지는 이덕관이다. 영조 대 무과급제이후 전중시어사, 사헌부 감찰, 웅천군수, 기장군수 등의 관직을 거쳤다. 부임하는 지역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의 행장에는 ‘임기가 되어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원함’이라고 쓰여 있어 지방관으로서 모범적인 면모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배원(培元).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1592~1685]의 아들로 호는 죽촌(竹村)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1654년(효종 5)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 이중광이 지방에서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힘썼듯이 이현재는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을 따라 때로는 월순(...
-
1592년에서 1598년 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1587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정치적 분란을 해소하고,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 변혁전쟁을 구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하여 조선 침략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관군과...
-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큰 전투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전준창(全准昌)의 조카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일으킨 무신란에 숙부인 전준창, 아우 전덕징(全德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거창에서 반도들과 싸워 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전준창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
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군거(君擧)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반도들과 거창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무원종공신에 올랐고 함께 싸운 아들 전성징(全聖澄)과 조카 전덕징(全德澄)에게도 각각 벼슬이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문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은철(殷喆), 호는 퇴암(退庵). 진사(進士) 정광룡(鄭光龍)의 아들이다. 진주 용암에 살았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어버이를 섬김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들로 가다가 고인(雇人)이 피를 뽑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정계교에 말하기를 "고인이 벼를 뽑고 있었다"고 하므로 정계교가 "벼가 아...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일(君一). 군수 정만생(鄭晩生)의 아들이다. 정계남(鄭癸男)은 일찍이 무과에 올라 벼슬은 사과(司果)에 올랐다. 인조반정(1623)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에서 무훈을 떨쳤다. 인조반정 때의 공으로 정사공신이 되었으며 이괄의 난 때 세운 무공으로 다시 진무공신이 되고 은결(恩結)을 지급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현(大見), 호는 석동(石桐)이다. 188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자품(資稟)이 준정(峻整)하고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하며 풍채가 사람에게 선학(仙鶴)과 같이 비추고 문학이 일찍부터 뛰어났다. 만년에는 강좌를 용암(龍岩)의 장덕재(章德齋)에 설치하니 원근에서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경(致敬), 호는 기재(跂齋)이다. 아버지는 정인현(鄭麟賢)이다. 진주 용암 출신으로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효우(孝友)스럽고 염직(廉直)하여 영리(榮利)를 구하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병정(丙丁:병자·정축년, 1876~1877년)의 흉년에 베풀기를 좋아하는 기재(跂齋)의 덕으로...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원경(遠卿), 호는 묵재(黙齋). 동호(東湖) 정상첨(鄭相詹)의 손자이며 정학신(鄭學臣)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정광의는 1768년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반천(泮薦: 성균관의 추천)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일찍부터 배우는 데 힘쓰고 뜻을 가다듬으며 각고(刻苦)하여 문행과 덕망이 뛰어...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영일. 자는 술원(述遠). 학포(學圃) 정훤(鄭喧)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정광익은 덕목이 높고 입지가 확고하였다. 번암(樊菴)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문하에 있었는데 원릉(元陵)의 문제로 여론이 일변하였을 때에도 성품대로 스스로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는 집에 걸어놓은 편액을 수선당(...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긍세(肯世), 호는 노정헌(露頂軒).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증손이다.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의로운 것을 좋아하였으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세상에 추앙되고 존중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노정헌유고』 1책이 간행된 바 있다....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사관(士觀), 호는 함인재(含忍齋). 모렴재(慕㾾齋) 정도동(鄭道東)의 손자다. 송성담(宋性潭)에게 사사(師事)하여 문학과 덕행으로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되었다.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와 교유하고 이의조가 엮은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참정(參訂)하였다. 사후 도내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기를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미보(美甫), 호는 죽와(竹窩).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주 용암리 출신이다. 문학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높았다. 1788년(정조 12)에 소(疏)를 올려 충의공 정문부의 부조(不祧: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의 은전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연일. 자는 자첨(子瞻), 호는 율리(栗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예다. 겸재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동중자제(洞中子弟)이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그 문하에서 배웠다. 하홍도가 임금에게 사은소(謝恩疏)를 올릴 때에 소를 받들고 입성(入城)하여 드디어 침낭(寢郞)에 제수되는 특전을 입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소를 가지고서 피선(被選)...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정기선(鄭基善)의 선정을 기리는 비. 정기선(鄭基善)[1784~1839]은 조선 순조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약 2년간의 임기(1827.8.20.~1829.5.7.)를 마치고 떠난 지 2년 후인 1831년(순조 31)에 정기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인실마을 북서쪽 어귀 도로...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경(汝慶). 호는 봉곡(鳳谷).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 정문부(鄭文浮)의 장자이다. 평소 품성이 곧고 도량이 넓었으며, 젊어서부터 재상의 자질이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아버지 정문부가 말년에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별세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
-
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여준(汝準)이고, 아우는 정대영(鄭大榮)이다. 문장과 필법으로 이름을 떨쳤다. 의기사(義妓祠) 앞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정대융이 쓴 것이다. 후에 우승지(右承旨)를 추증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국장(國章), 호는 해사(海史). 허재(虛齋) 정지탁(鄭志倬)의 후손이다. 용모가 크고 기우가 헌양하여 장자의 도장이 있었다. 일찍이 월촌 하달홍(河達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있었으며, 족형(族兄) 운파(雲坡) 정한균(鄭漢均)과 더불어 수학하였다. 유집으로 『해사선생문집(海史先生文集)』이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광석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정만석의 선정을 기리는 비. 정만석이 1809년 4월 16일부터 1810년 8월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베푼 선정(善政)에 고마움을 느낀 지방민이 1813년(순조 13)에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광석리 마을창고 앞에 남향하여 있는데, 앞 들의 경지정리사업을 할 때 들판에 있던 비를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사각형의...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국교(國喬), 호는 지와(芝窩).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예이며,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진주 금산리 출신이다. 고모부인 유하(柳下) 강태중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후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집지하여 준재라고 칭찬을 받았다. 문사(文詞)를 지음에 기이하나 정기가 있고, 매우 건전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성익(聖翼), 호는 학주(鶴洲).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주 가곡 출신이다. 1890년(고종 27)에 문과에 올라 승지(承旨)가 되었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풍채가 수미(秀美)하고 문학이 넉넉하고 풍족하여 향당(鄕黨)에서 이를 칭찬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학여(鶴如). 군일 정계남(鄭癸男)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선전관으로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의 동문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화백(華伯).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고, 농포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곧고 행실이 고결(高潔)하였다. 아우 정규(鄭珪), 정목(鄭睦)과 더불어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였다. 거상에는 여묘(廬墓)로 제(制)를 마쳤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중의(仲儀), 호는 동오(桐塢). 용강(龍岡) 정문익(鄭文益)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품성이 순결(純潔)하고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장엄하였으며 남을 대접할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해 대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휴진(畦畛:일정한 법식)을 베풀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효우(孝友)에 돈독하니 고을과 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극명(克明), 호는 무호옹(無號翁).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예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형을 받드는 데에는 우애로웠다. 정빈의의 형이 안주(安州)의 임소(任所)에 있을 때에 갑자기 풍비증(豊痺症) 때문에 여러 달 동안 고통이 심했다. 정빈의가 산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기...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성옥(聖玉), 호는 명일(明逸). 명암(明菴) 정식(鄭栻)의 증손이며, 후산 허유의 외조부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성품이 관대하고 그 뜻이 청고(淸高)하였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자양서(紫陽書: 朱子의 書) 읽기를 좋아하여 행실을 삼가니 세상에서는 명옹(明翁)에 초손(肖孫)이라 일컬었다. 감사의 계달...
-
경상남도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서 봉축(奉祝)하는 9현에 대한 기록과 9현의 저술, 서원에 관계된 기록을 모은 책. 『정산지』는 진주 유생인 박지서가 1747년(영조 23)에 편찬했으나 그 뒤 속록(續錄)을 덧붙여 1753년에 완성하였으며, 정조 말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계속 추가되었다. 체제는 서(序), 목록(目錄), 구선생행록(九先生行錄), 정강서원저술(鼎岡書院著述), 발(跋...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정상규(鄭翔圭)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러자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물고기가 잡히거나, 꿩이 집안으로 날라 오는 등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1827~1903]이 정려기를 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길보(吉甫), 호는 동주(東洲). 아버지는 진사(進士) 정즙(鄭楫)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효우(孝友)와 학행으로 이름을 당세에 드러내었으며, 창사 손명래 등과 친밀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중여(仲與), 호는 불우헌(不憂軒).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아버지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선조의 교훈을 지키면서 임천(林泉)에 소요하며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았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조씨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남편에게는 매우 공경히 대하였다. 남편 정상천(鄭相天)이 죽음에 직면하자, 손수 송별사를 시어머니와 본가에 써서 두고 얼마 후 조용히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 숙종 때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고, 정언(正言) 이약렬(李若烈)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여량(汝良), 호는 동호(東湖). 임강정(臨江亭) 정환(鄭桓)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 6) 태어났다. 1721년(경종 1)과 이듬해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김범갑(金范甲)에게 피격당하고 과거시험을 포기하였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1725년(영조 1)에 진사에 입격하였다. 이후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명분과 예절을 스스로 가다듬고...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중선(仲善), 호는 동야(東野). 봉곡(鳳谷) 정대영(鄭大榮)의 증손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문장을 만들 때는 간결하고 예스러웠다. 김범갑(金范甲)의 무고를 받아 자제와 친구에게 단단히 타일러 이치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배척토록 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는 바른대로 지키고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종형과 더불어 우암(尤庵...
-
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치경(致敬), 호는 용헌(容軒).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컸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지극히 하였다. 그리고 향당(鄕黨)의 일에는 한결같이 공정하게 처리하니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중렬(仲烈). 집의를 지낸 정대영(鄭大榮)의 후예이다. 생몰년은 미상. 영조 재위(1725~1777) 전후로 활동하였다. 천성이 영특하고 학문을 열심히하였다. 형제와 더불어 당시의 대학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찾아가니 김원행이 시를 지어 그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학문이 매우 해박하여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으로부터 하락팔괘(河洛八卦)와 오행...
-
조선 후기의 선비. 자(字)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菴)·대명처사(大明處士).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고 젊어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지조가 맑고 고상하였다. 일찍이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여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다. 두류산의 무이곡(武夷谷)에 들어가서 와룡암(臥龍菴)을 세우고 제갈무후...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직경(直卿), 호는 숙매(熟寐).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으로 정상점(鄭相點)의 아들이다. 가훈을 계승하여 경전(經傳) 공부에 진력하였고 가정을 힘써 닦았다. 날마다 형제, 조카들을 함께 모아서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며 서로 공부를 도왔다. 진주 용암리 출신이다....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하진태의 효행 정려를 위한 상서문은 1791년 하진태의 생존시에 「단동촌동장수본」이나 「사죽집강서목」 등 이미 행정계통에 따라 보고된 바 있었고, 1800년 하진태의 사망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수십 차례에 걸쳐 진정서가 올려졌으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하진태 뿐만 아니라 다른 효자나 열부에게서도 쉽게...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하서(夏瑞). 호는 동호(桐湖) 또는 초객(樵客). 석정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동곡(桐谷)에 살면서 학문과 문학에 힘썼다. 모든 일에 있어 유학을 지키는 일에 힘썼으며, 조선 중기 진주 지역의 대학자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문집인 『겸재집(謙齋集)』 간행에 참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오천(烏川). 자는 하서(夏瑞), 호는 동호(桐湖)·초객(樵客).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진주 동곡(桐谷)에 살면서 문망이 있었고, 모든 일에 있어 유학을 지키는 일에 관계된 것에는 힘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문집인 『겸재집(謙齋集)』의 간행에 힘을 쓴 바가 많았다....
-
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자의(子義), 호는 추담(秋潭).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일찍부터 행실이 바르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며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태계(台溪) 하진(河溍)과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가졌다. 그의 아들 정례도 또한 하홍도를 스승으로 섬겨 재예가 뛰어났으며 진사에 합격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길숙(吉叔).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손자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문학과 행실이 뛰어나 사우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니 겸재(謙齋)가 만사(輓詞)를 지어 슬퍼하였다. 후에 손자가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후지(厚之), 호는 역효당(亦囂堂). 정대륭의 후손이며 정상점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이학(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세상에서 명유(名儒)라 일컬었으며,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정은교(鄭誾敎)이고, 아버지는 임노헌(林魯憲)이다. 평택임씨는 시어머니가 민물고기를 좋아하므로 하늘에 기원을 올려 한 자 크기의 물고기를 구했으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도 하늘에 기원을 올려 남편이 쾌차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전기를 찬술하였다....
-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인백(仁伯), 호는 구암(龜岩)이다. 진사 정기(鄭起)의 아들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약관의 나이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취학하였다. 조식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몸을 사랑하기를 옥과 같이 하고 마음을 가지기를 물과 같이하며 병 때문에 스스로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는데,...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영조 대 무신란(戊申亂)에서의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기록되고 가선동지중추부사(嘉善同知中樞府事)를 추증 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통(季通), 호는 사무재(四無齋)·수헌(睡軒)·천휴노인(天休老人). 봉강(鳳岡) 정유정(鄭有禎)의 아들이다. 1665년에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다. 학행이 깊고 신실하여 칭송이 높았다.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무재시고(四無齋詩稿)』 1책이 간행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 출신으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 본관은 진양(晋陽). 1822년 10월 13일 아버지 정서곤과 어머니 울산 김씨(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안토니오이다. 1822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닌 인물로 전해진다. 정찬문은 천주교 신자 집안...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명숙(明叔), 호는 삼모재(三慕齋).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생몰년은 미상. 영조 재위(1725~1777) 전후에 활동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외모가 단정하고 일찍이 학문에 눈을 떠 당시의 학자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에게서 수학했다. 윤봉구가 찬한 「천명인심도(天命人心圖)」를 보고 크게 감화받았으며,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과...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응현(應賢), 호는 옥초(玉樵). 포은(圃隱) 정몽주의 후손이다. 임술민란(壬戌民亂: 진주민란)을 겪은 뒤로부터 진주 병영(兵營)의 창고가 비게 되자 정철기가 쌀 천 석을 바쳤다. 진주 병영에서는「연일정씨의창(延日鄭氏義倉)」이라는 6글자를 고문(庫門) 밖에 써서 달았고 또 조정에 전보하니 선공감가감역(鐥工監假監役)을 제수하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수졸(守拙). 정광익(鄭匡翼)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고 식견이 발랐으며 조행과 실천이 고아하고 부지런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진주 문암 출신이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보여(保汝), 호는 박원(璞園). 정기화(鄭琦和)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1867년 진주목사(晋州牧使)로 부임하여 1870년까지 활동하였다. 의기사를 중건하였으며, 교방기구(敎坊機具)를 재설치하고,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신설하였다. 1870년에 김해부사로 전임되어 갔다. 문장명필(文章名筆)을 겸비한 선비로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옥여(玉汝), 호는 만성재(晩省齋)·부암(敷庵). 승지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주시 용암리 출신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을 증직받고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용인(勇仁)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용(司勇)에 올랐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서궁(西宮) 유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임금 앞에서 폐서인을 지지하는 회의가 있었다. 정호신은 태연히 그 회의의 참석을 기피하였는데 부도덕한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던 충의가 인정되어 정청불참자록(廷請不參者錄)에 이름이 실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무중(武仲), 호는 임강정(臨江亭).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아들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다. 학문이 해박하고 행실이 고결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인현왕후가 변을 당하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
-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제1차 전투.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전 지역에서는 관군의 유명무실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성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면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차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선과 일본의 전쟁과정에서 특히 진주에서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는...
-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중심으로 1592년에 싸운 이래 두 번째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1592년 10월에 조선군과 왜군이 제1차로 전투를 벌인 결과 조선군이 왜군을 대패시킨 이래 왜군은 이를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도 알려진 이 싸움에서 제1차 진주성전투와는 정반대로 조선군은 왜군에 대패하였다.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이래 1년 동안 전쟁...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평문씨는 정조 때 남편 조경진(趙經鎭)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돌을 품고 강물로 투신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훗날 사람들이 강씨부인의 열행을 기려 강 위의 돌에 열녀암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조동 노인회관에 있는 조동리 동안(洞案). 등재인원은 124명이며 말미에 유사, 동수, 집강, 집필자가 서명하고 수결하였다. 1775년분이 권3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조병현(趙秉鉉)의 선정을 기리는 비. 경상도관찰사 조병현이 임기(1834~1836)를 마치고 떠난 뒤 3년 후인 1839년(헌종 5)에 조병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인실마을 북서쪽 어귀 도로변에 남향으로 있다. 1980년 진주~합천간 도로를 확·포장할 때 원래 있던 자리에서 현재 위치로...
-
조선 후기의 선비·효자. 본관은 함안. 자는 인수(仁叟), 호는 횡구(橫溝). 아버지는 동몽교관에 증직된 조광식(趙匡植)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로 김석신(金錫信)의 딸이다. 자신의 호는 중국 북송 때 사상가 장횡거(張橫渠)의 ‘횡(橫)’자와 옛날 유방과 항우가 힘을 겨루었던 역사의 현장인 홍구(鴻溝) 땅 이름의 ‘구(溝)’자를 따서 지었다. 장횡거는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조용화(趙鏞和)가 죽자 염하는 날에 자신도 따라 자진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되었고,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양이씨는 18세 되던 때에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남편 조윤(曺玧)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시댁에 도착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염한 뒤였다. 남편의 장례를 예로써 다한 뒤, 식음을 끊은 지 7일 만에 조용히 자진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1832년(순조 32)에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 중기의 유학자 한몽삼의 사승관계(師承關係) 및 교우관계를 기록한 고문헌. 한몽삼(韓夢參)[1589~1662]은 자(字)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으로 1589년 경상남도 진주시 정수(현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정수)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1608년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24세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생원시(生員試)에...
-
조선 말기의 문신. 1887년부터 1889년까지 진주목사를 지냈다. 부임해 있는 동안 연계재(蓮桂齋)를 이건하고 유정당(惟政當)과 함옥헌(涵玉軒)을 중수하였다. 또한 포락(浦落)에서 억울하게 징수한 세금 5백결을 경감하고 환전을 탕감하여 관에서 비축금을 갖추도록 하였다. 1889년부터 1890년까지 다시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며 전운어사(轉運御史)를 겸하여 탈미(脫米)의 장선비(裝船...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신안(新安). 무열공(武烈公) 주몽용(朱夢龍)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터지자 크게 공을 세워 진무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 진주 유학자 하성의 시문집. 『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의 저자 하성의 자는 자경, 호는 죽헌이다. 본관은 진주로, 사간 하진보에 입양되어 최영경(崔永慶)에게 수업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郭再祐)를 좇아 화왕산성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그릇된 처사에 대해 정온(鄭蘊)과 함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죽헌 하성[1571~1...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고...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에 있는, 김진의 처 진양강씨의 정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진양강씨의 남편인 김진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한 진양강씨에게 내린 정려로, 1868년(고종 5)에 건립하였다. 맞배지붕의 기와집에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이다. 좌우와 뒷면은 벽을 설치하고 전면은 목창살벽을 하였다. 내부에는 정려기와 정려판이 걸려 있으...
-
성여신(成汝臣)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 읍지. 1622년(광해군 14)부터 1632년(인조 10)에 걸쳐 편찬하였는데, 정구(鄭逑)가 1587년(선조 20) 편찬한 『함주지(咸州誌)』(경상도 함안군 읍지)의 영향을 받아 그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필사본이다. 1730년(영조 6) 반포되었으며, 현재 규장각도서에 있다.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제1책은...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정훤(鄭暄)이 광해군의 폭정에 휩쓸리기 싫어 향리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웠다. 정훤은 1583년(선조 16)에 합천에서 출생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인조 때 조정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천거하였으나 고사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산 131번지에 위...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진주 담산 고택은 19세기 중엽 단파(丹坡) 하계룡(河啓龍)[1851~1932]이 건립한 주택이다. 당호(堂號)는 담산(澹山) 하우식(河祐植)[1875~1943]의 호를 따서 담산 고택으로 하였다. 단목리는 창주(滄洲) 하증(河憎)[1563~1624]이 입향하여 번성한 집성촌이다. 이 가문은 후손들인 습정재공, 생원공,...
-
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진주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고문서는 호구단자, 준호구, 분재기류, 유명 인물의 편지도 섞여 있는 등 다양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진주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고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문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호구단자 및 준호구 호구단자 24건과 준호구 1건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중 하명(河洺)의 준호구는 17세기...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책판. 이 책판의 저자 창주(滄洲) 하징(河澄)[1563~1624]은 정인홍의 문인으로 남명 조식의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아 1606년에는 덕천서원의 원장으로 역임하였으며 남명의 작품을 간행하는 것을 주도하였으며 1620년에는 『진양지』를 최초로 편찬하였다. 창주집 책판은 1897년 12월에 진주의 오방제에서 목활자로 간행되었던『창주선생유사서』를...
-
조선 후기의 효자 하진태(河鎭兌)의 효행 관련 문헌. 1. 『봉선(奉先)』 규격은 26×31㎝이다. 수필본으로 앞부분 「연대사위급신사위도록(連代祀位及新祀位圖錄)」, 뒷부분 「조모주병록일기(祖母主病錄日記)」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연대사위급신사위도록」은 1788년(정조 12) 당시 정문조(旌門祖), 창주조(滄州祖), 오대조(五代祖), 고조(高祖), 증조(曾祖), 부(父...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려 현판. 진주 지방 함양 박씨(咸陽朴氏) 집안의 노비 최의남(崔義男)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려 1686년(숙종 12)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진주 동산리 충노 최의남 정려 현판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정려각 안에 있다. 정려각은 바닥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맞배지붕에 공포는 없...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에 있는 창원황씨(昌原黃氏) 재실. 동산재는 1680년에 창원황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를 지낸다. 내부에는 황석기(黃石奇), 황상(黃裳), 황준(黃濬), 황윤의(黃允義), 황우(黃瑀), 황여필(黃汝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된 재실이다. 창원황씨의 경우 시중공파·소장공파·공희공파 등...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재령이씨의 고가로 1718년(숙종 44)에 지어져 수차례 보수를 거쳤다. 전형적인 남부형 고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특징적인 요소가 있어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의 지명인 대곡면 마진리와 소유주의 성씨인 재령이씨를 따서 진양 마진리 이씨고가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592번지...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재령 이씨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고문서.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일대는 조선 전기 재령 이씨(載寧李氏) 모촌 이정(李瀞)이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진주 마진리 이영 소장 고문서 일괄은 이덕관(李德寬)의 집안인 마호당(磨湖堂)에서 전해 오는 고문서들 가운데 195건으로, 2012년 7월 26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22호로...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개문산방에 있는 조선 후기 불경.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한국 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이다. 특히 독송(讀誦), 서사(書寫), 공덕(功德)을 강조하는 대승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 개문산방 소장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2010년 3월 11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
조선 중기의 문신 최영경(崔永慶)의 사제비(賜祭碑). 수우당(守愚堂) 최영경[1529~1590]은 정여립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옥사한 다음 해인 1591년(선조 24)에 그가 무죄였음이 판명되자, 1594년 선조가 최영경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제문을 내려주었다. 1821년(순조 21) 이 제문을 돌에 새겨 비석을 세웠다. 원래 1821년 당시 남명(南冥)...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소재한 진양하씨송정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책판. 모두 4종의 책판 판목으로, 현재 보관중인 목판은 총 112매이다. 이 가운데 『송정집(松亭集)』 목판이 62매, 『각재집(覺齋集)』 목판이 30매, 『백암일고(白巖逸稿)』 목판이 8매, 『대각서원칠선생실기(大覺書院七先生實記)』 목판이 12매이다. 원래 하공진(河拱辰)의 사당인 경절사(擎節祠) 아래에 있...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제말(諸沫)·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념하는 사적비. 제말[?~1592]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제홍록[1558~1597]은 제말의 조카로서, 1581년 무과에...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향안과 연계안. 연계재에는 향안 7책과 연계안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족들은 향촌사회에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유향소(留鄕所)와 향회(鄕會)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수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견제하고 향리들을 통제했다. 향안은 이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인물들의 명단이다. 그리고 연계안이란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뿐만 아니라 대과인 문과에...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오방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하륜의 시문집 책판. 하륜(河崙)의 후손인 용와(容窩) 하진현(河晉賢)이 찬술한 『호정집(浩亭集)』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아, 후손이 없고 병란을 여러 차례 겪어서 남기신 문집이 흩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족인 하진달(河鎭達)이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널리 찾아다녀서 비로소 초고를 만들었다. 또 족인 하속(河涑...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진산로 월명암 인법당에 봉안된 조선 후기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진주 월명암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에 “대승암 창립이흘무불상이구의임자개춘(大乘庵創立已訖無佛像而久矣壬子開春)….”이라고 기록된 대로 원래 대승암 창건 때 봉안하기 위해 1612년(광해군 4) 수화승[上員] 현진(玄眞)과 학문(學文), 명은(明訔), 의능(義能),...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의 응석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 본존불은 석가여래이고, 왼쪽의 불상은 아미타여래이며, 오른쪽의 불상은 약사여래이다. 본존불인 석가여래는 높이 144.5㎝, 어깨 폭 73.2㎝이며 왼손은 별도로 조각하였다. 왼쪽의 아미타여래는 높이 130.7㎝, 어깨 폭 60.3㎝이며 왼손과 오른손은 별도로 조각하였다. 오른쪽의 약사여래는 높이 124.8㎝,...
-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의 사당. 의기사는 1721년(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년(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진주 이세후 종가는 1836년(헌종 2) 건립된 주택이다. 안채는 상량문에 ‘숭정 기원후 이백삼십년 태세재 병신 삼월 십삼일 병신 신시 입주 동일 신시 상량(崇禎紀元後二百三十年太歲在丙申三月十三日丙申申時入住同日申時上樑)’으로 되어 있어 1836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상량문에 “계축 구월 이십삼일 신시 입주...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청곡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목조 석가여래 삼존 좌상. 진주 청곡사 목조 석가여래 삼존 좌상은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물 중 「개금불사 동참 결연작 복록(改金佛事同叅結緣作福錄)」에 1615년(광해군 7) 제작하였고, 1750년(영조 26) 중수·개금하였다고 적혀 있다. 2010년 12월 21일 보물 제1688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내 수미단...
-
경상남도 진주시 청곡사의 제석천상과 대범천상. 제석천과 대범천은 원래 브라만 또는 힌두교의 신상(神像)이다. 대승불교 이후 불법을 지키는 신상이라 여겨져 사천왕상 등과 더불어 불교미술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각상이 아닌 그림으로 그려졌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탱화에서 주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으나 조각상으로는 청곡사의 것이 유일하...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청곡사 업경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진주 청곡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십왕상 일괄은 불상의 내부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과 「진양 동월 아산 청곡사 불상 개금 시왕 개채기(晉陽東月牙山靑谷寺佛像改金十王改彩記)」에 1657년(효종 8) 제작된 후 1750년(영조 26) 개금과 개채되었다고 나와 있다. 2010년 12월 21...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의 청곡사에 있는 업경전(業鏡殿). 청곡사 대웅전 옆에 있으며, 명부전(冥府殿) 또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불린다. 879년(헌강왕 5)에 도선국사에 의해 세워진 청곡사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다시 세워졌다. 이후 조선 말기 포우대사(布雨大師)가 다시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찰 부속건물들을 중수하였다. 청곡사 업경전도 청곡사를 세울 당시 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인물들을 기리는 전적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인물들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에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1번지 촉석(矗石)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43m이며 너비는 0.92m, 두께는 0.21m이다. 비신은 수성암(水成...
-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강태중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고문서. 강태중 소장 고문서는 조선 후기 진주 지역에 세거한 진주 강씨(晉州姜氏)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이다. 2002년 2월 14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09호로 지정되었다. 호적 자료는 강익(姜瀷) 등이 관아에 제출한 호구 단자, 관아에서 발급해 준 준호구 등이고, 관직 임명 문서는 강승(姜昇)과...
-
진주강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 진주강씨는 임진왜란 때의 첨사 김진(金震)의 처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남편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칼로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정려문은 1868년(고종 5)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744-1번지에 있다. ‘경렬문(景烈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북동에 있는 진주향교를 이건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 진주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987년(고려 성종 6)에 지금의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의 모습으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書齋), 사교당(四敎堂) 등 수차례의 중수 및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398년(태조 7)에 이르러 문묘(文廟)를 세우고...
-
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 진주의 농민항쟁은 그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지주(地主)·전호제(佃戶制)가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인 어득강(魚得江)의 시집. 어득강[1470~1550]은 진주 출신으로 자는 자유(子遊), 호는 관포(灌圃),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진사에 입격하고 14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29년에는 벼슬이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549년에는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특히 시에 능했다. 하증(河憎)[1...
-
경상남도 진주시 초전동 진주동명고등학교 내에 있는 유흥우와 심낙신의 송덕비. 진주동명고등학교 철비 2례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철제 송덕비들로서 원래 진양호로 통하는 강변도로 개설 때 지하에서 수습되어 진주동명고등학교로 옮겨진 것이다. 진주동명고등학교 철비 2례는 경상 우병영에서 1830년(순조 30)에 이임한 유흥우(柳興禹)와 심낙신(沈樂臣) 두 장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
-
조선 후기에 진주목에서 편찬한 관찬 읍지. 진주지역의 역사, 지리, 풍토는 물론, 인물, 사건 등 모든 문화현상이 서술되어 있는 문헌으로 세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1832년(순조 32)의 임진본, 1871년(고종 8)의 신미본, 1895년(고종 32)의 을미본이 있으며, 이 중 임진본은 1991년 진주문화원에서 번역본으로 발간한 바 있다. 임진...
-
1862년(철종 1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 1862년에 경상도우수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탐학에 반발하여 진주 출신 유계춘(柳繼春) 등이 일으킨 민란으로,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간 진주 일대를 휩쓸며 부정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였다. 이후 중앙조정에서 보낸 진주안핵사에 의하여 민란은 수습되었으나, 같은 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 후기...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포진지. 진주성 포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김태허(金太虛)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
-
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연화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진주 연화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연화사의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 중 본존인 아미타여래 좌상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양 협시는 근래 제작된 작품이다.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원래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의 운흥사(雲興寺)에서 1959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당시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조선 후기 건물. 진주 경로당은 조선 후기 양로 시설로 창건되었다. 1934년 일제 강점기에 중건되었다. 2004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남강의 좌안이자 진주 시내 동쪽의 독립 구릉 남사면에 남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이름은 ‘보로당(保老堂)’이었다. 이후 ‘진주 옥봉 경로당’으로 개칭하였다가, 2015년...
-
조선시대의 밀성손씨 및 그 외후손의 계보. 진주 원계리 『밀양손씨 경인보』는 1710년까지의 밀성손씨를 전국적으로 망라하고 있는 대동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책의 간행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손전(孫佺)[1634~?]의 상세하고도 치밀한 주석이 있다. 이 책은 건책 첫 부분에 숭정기원후 68년 을해년(1695) 5월의 서문과 발문이 있다. 서문의 찬자 부분이 결락되어 있고,...
-
풍수지리설과 관련한 진주 지역의 이야기 상고(上古)에 삼가(三嘉)에서 오는 길은 모태곡(毛台谷)의 철소원(鐵所院)으로부터 대자산촌(大雌山村)과 원동촌(院洞村)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원동의 재를 넘었고 또 남쪽부지(釜池: 가마못)의 고개를 넘어서 주(州)로 들어왔다. 의령(宜寧)에서 오는 길은 사죽(沙竹)·불천(佛遷)을 거쳐서 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한 상지관(相地官: 풍수)이 서울로...
-
진주의 봉황형국을 완성하기 위한 진압과 비보를 자세하게 기술한 작품 진주의 진산(鎭山)은 비봉(飛鳳)의 모습이요 안(安)은 금룡(金龍)이니 관기는 그 아래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무릇 사방에서 배포(排布)를 모두 봉(鳳)에 붙쳐서 이름하였으니 객사(客舍)의 앞에 누(樓)로는 봉명(鳳鳴)이 있고 관(館)으로는 조양(朝陽)이 있으며 마을 이름으로는 죽동(竹洞)이 있고 벌로수(伐老藪)와...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 명암(明庵) 정식[1683~1746]이라는 선비가 진주 사민(士民)들로부터 금품을 모아 논개 의거의 징표로서 1722년(경종 2)에 다듬은 것이다. “비석을 다듬어 놓은 해로부터 18년 뒤인 1740년(영조 16) 가을에 진주 우병사인 남덕하[1588~1742]가 왕의 득명을 받고 이듬해 봄에 비를 세우다”라는 기록을...
-
경상남도 진주시 장흥리 소재의 사제문이 새겨 있는 비석. 사제문(賜祭文)이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주며 함께 내린 글을 말한다.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는 1718년(숙종 44) 숙종이 지족당 조지서를 배향한 신당서원에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 치제하게 한 사제문을 새긴 비석이다.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길에 집현면 장흥리를 지나는 도로에서 약 30미터 떨어져 있는 보호각...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청곡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괘불함. 평소 괘불함에는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을 넣어 보관하다가 괘불재를 올리는 등 필요할 때 괘불탱을 꺼내어 사용한다. 잠시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 위탁보관하였으나 2008년 5월 12일 청곡사 내 불교문화박물관이 완성되어 현재는 청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청곡사 괘불을 보관하기 위하여 1722년 괘불과 함께 조성되었다. 괘...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청곡사에 있는 영산회상도. 영산회상이란 석가모니가 인도에 있는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한 법회모임을 말하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영산회상은 석가의 설법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영산회상도는 보통 대웅전이나 영산전의 뒤편에 봉안된다. 영산회상을 이 땅에 실현하려는 강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으로, 1750년(영조 26) 청곡사 대웅전의 후불탱화로 제...
-
경상남도 진주 지방의 교방에서 추어지던 일종의 놀이춤. 원래 「포구락무」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로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다. 진주포구락무는 채구(彩毬)를 구문(毬門)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는 놀이를 음악과 무용으로 형상화한 궁중정재가 진주권번에서 지역화 된 춤으로서 고종[재위 1863~1907] 때 진주부사를 지냈던 정현석의 『교방가요』에서...
-
조선 후기의 학자 문상해(文尙海)[1765~1835]의 문집. 문상해는 진주 독천리(禿川里)에서 출생하고, 호를 창해(滄海)라고 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스스로 육영재(育英齋)를 찾아가 학문에 정진할 만큼 학구열이 높았다. 성격은 온화하면서도 엄격해 친구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후학들에게는 학문을 권장했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김면운, 박대순, 이견 등과 교우를 가졌다. 만년에는...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서구(李書九)의 시문집. 이서구는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拓齋) 혹은 강산(薑山)이다. 어려서 박지원에게 학문과 문장을 배웠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도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177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판서, 우의정 등 주요 내직과 전라감사, 평양감사 등의 외직을 지냈다. 1805년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포천 양문에...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서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
-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이 정자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이며, 1853년에 건축된 목조기와형 재실이다.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서 청계재라 부른다. 쳥계재는 건축 당시에 3간이었으며 그 뒤에 5간으로 증축되었다. 그 후에 이 재실의 뒤에 서실을 짓고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고전적인 기와집 형태로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과 대청마루가 있고, 여...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청곡사에 있는 괘불.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괘불이다. 1722년(경종 2)에 승려화가인 의겸(義謙) 등에 의해 제작되었다. 길이 10.4m, 폭 6.4m 크기의 괘불로, 본존불인 석가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중심에 꽉 차게 석가불을 배치하였으며,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게 상체는 짧지만 당당하고 우...
-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운룡문(雲龍文)이 그려진 청화백자.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는 청화백자에 구름과 용이 시문된 항아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국립진주박물관 상설전시실인 두암관에 전시되어 있다. 순도 높은 순백의 기면(器面) 위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운룡문(雲龍文)을 그리고 그 위에 장석질과 석회석질의 유약을 발라 환원 소성(燒成)한 백자항아...
-
조선 후기의 유학자 정식이 지은 촉석루 보수에 관한 글.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이 1725년에 촉석루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보수공사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촉석루의 아름다움을 그린 글이다. 기문의 내용은 촉석루의 웅장한 자태, 논개가 적장을 죽인 일의 역사적 의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감탄하여 처음에 글을 전개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촉석루도...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의병장 최대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1752년(영조 28) 최대성(崔大晟)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충신모의장군 증통정대부형조참의어모장군행훈련원정최대성지려(忠信募義將軍 贈通政大夫刑曹參議禦侮將軍行訓練院正崔大晟之閭)”를 내리면서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안간지구대 옆에 동향하여 있다. 1999년...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최동태(崔東泰)이고, 아버지는 이승효(李承斅)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벽진이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남편과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자결하고자 했으나 주위에서 말리는 이가 많아 손수 상복을 만들어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후에 시...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있는 충노 효자 최의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의남(崔義男)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그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려 1686년(숙종 12)에 정려를 내렸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 산 94에 있는 용고미(龍顧尾)마을 입구에 남동향으로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시멘트 바닥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국립 진주 박물관에 있는 문서첩. 최희량 임란 관련 고문서-첩보 서목은 정유재란 당시 고흥 현감 최희량이 상부에 보고한 문서들을 엮어 놓은 문서첩이다. 1979년 7월 26일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다. 1598년(선조 31) 3월부터 7월 사이 고흥 현감 최희량(崔希亮)[1560~1651]이 지휘 계통상 상급 기관인 삼도 수군 통제영과 전라 감영에 보고한...
-
조선 후기 화가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이 그린 두 폭으로 된 수묵화. 추계유금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풍속화가인 김홍도의 스승인 김응환의 아들로서 풍속화와 신선도에 뛰어났던 김득신이 그린 수묵화이며, 두암 김용두가 일본에서 수집하여 2001년에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중 하나로 현재 국립진주박물관 상설전시실인 두암관에 전시되어 있다. 창작경위는 명확하...
-
조선 중기의 학자 윤선(尹銑)[1559~1639]의 문집. 윤선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택원(澤遠), 호는 추담(秋潭)이다. 1559년(명종 14) 삼가(三嘉) 구평(龜坪)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윤언례(尹彦禮)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직 박승효(朴承孝)의 딸이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학록·전적, 승문원정자, 홍문관박사 등...
-
조선 후기의 효자 추성원(秋成元)의 표창을 상신하고 답을 받은 문서. 추성원은 조선 후기 순조와 고종 때의 효자이다. 12~13살 때 부친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고, 어머니 창원황씨가 병마에 고통당하자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탕을 지어 올리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하동과 곤양 주민들 서른 명이 천하에 둘도...
-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청곡사를 다녀가면서 지은 시문을 새긴 비. 1533년 이황이 8도 명소를 두루 살피다가 금산 소재 청곡사에 휴양차 다녀가면서 시를 남겼다. 1829년 경에 종사랑 돈녕원 도계 이희영(李禧榮)이 금호지의 동쪽 주변에 돌을 쌓아서 축대(금호대)를 축조하고, 여기에 시비를 세워 기념하였다. 1869년 이희영이 죽은 후에 그 아들 이수용이 ‘도...
-
조선 말기의 무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우석(禹碩). 호는 사헌(思軒). 아버지는 하한조(河漢祖)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기찬(朴基欑)의 딸이다. 1825년(순조 25) 진주에서 출생하여 이우빈(李佑斌+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3년(철종 4) 무과에 급제한 후 부사과, 훈련원첨정 등을 지내고 1862년 거제도호부사로 나갔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순...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낙도(洛圖), 호는 해산(海山). 밀양부사와 안주목사를 역임한 하진보(河晉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예범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중도(權重度)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이기문의 딸이다. 1841년(헌종 7)에 태어나 뛰어난 재주로 과거공부를 하면서 명성을 날렸고, 성재 허전(許傳)의 제자가 되었다. 「주자서(朱子書)」를 매우 좋아하였고...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경주(景周).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複)의 후예로서 장령(掌令) 하계부(河季溥)의 손자이다. 일찍이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수련하였는데, 여러 가지 문장 중에서 특히 시(詩)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일숙(一叔), 호는 단연(丹淵). 모송재(慕松齋) 하인상(河仁尙)의 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일찍이 학문을 이루었다. 세도가 날로 기우는 것을 보고는 문달(聞達)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리의 학문에 잠심하였으며 괴천(槐泉) 유문룡(柳汶龍)[1753~1821], 홍와(弘窩) 윤동야(尹東野) 등 주위의 선비들이 모두 추종하였다. 진주에는 그 학문적 성과가...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혼원(混源), 호는 구이당(具邇堂). 진사 하협(河悏)의 아들이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순수하며, 맑고 곧고 바른 주장을 펼치고, 그 주장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독실하였다고 한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찰방(察訪) 권극경(權克經), 상사(上舍) 안시진(安時進)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을 나누었다. 하달영이 세상을 떠나자 겸재가 시(詩...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하위보(河魏寶)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하변(河忭)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 이유눌(李惟訥)의 딸이다. 부인은 연일정씨(延日鄭氏) 정계(鄭戒)의 딸이다. 1636년(인조 14) 출생하여 일찍부터 문장에 뛰어나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1660년(현종 1) 25세에 생원에 합격했는데 스스로 이름을 숨기면서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군학(君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윤청(河胤淸)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 남천해(南天海)의 딸이다. 부인은 파평윤씨 윤성(尹惺)의 딸, 연안이씨 이우하(李遇夏)의 딸, 진양정씨 정헌주(鄭憲周)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학문을 익혀 경전을 귀히 여겼다. 평생 언행에 거짓...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용강(龍岡).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단지(丹池) 하협(河悏)이며, 어머니는 진양정씨 정승훈(鄭承勳)의 딸이다. 부인은 은진송씨(恩津宋氏) 참봉 송흠원(宋欽遠)의 딸과 현풍곽씨(玄風郭氏) 통덕랑(通德郞) 곽창후(郭昌後)의 딸이다. 용강(龍岡)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남양 땅 와룡강(臥龍岡) 아래에 은거하면서...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관부(寬夫), 호는 괴와(愧窩).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증손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행실이 깨끗하고 발랐다고 한다. 학문을 추구할 때는 깊고 세부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썼다. 글재주가 뛰어나고 시문을 잘 지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부터 『속주지(續州誌)』를 찬수(纂修, 문서를 모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음)하였으나 끝...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몽징(夢徵), 호는 불우당(不憂堂)이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두드려졌으며 말달리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난의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무신란 때 세운 공으로 벼슬이 부호군(副護軍)에 오르고 2등 공신에 올랐다. 은궁(銀弓)과 옥시(玉矢)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첨경(瞻卿), 호는 양정재(養正齋). 아버지는 대사헌에 증직된 설총(雪聰) 하철(河澈)이며, 어머니는 고령박씨 박신(朴紳)의 딸이다. 1664(현종 5) 하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육례(六禮)에 통달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부친이 별세하자 예에 따라 상을 치르고 여막을 지켰는데, 모친에게 문안...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도경(道卿). 설창(雪窓) 하철(河澈)의 셋째 아들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1702년(숙종 28)에 무과에 올라 네 고을에 두루 역임하면서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무로써 드러났다 하더라도 부귀영달에 뜻을 삼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형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과 더불어...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차해(次海). 할아버지는 창주(滄洲) 하증(河憕)이고, 아버지는 하달도(河達道)이다. 어머니는 함안조씨 주부(主簿) 조영기(趙英沂)의 딸이다. 부인은 전의이씨 승의랑(承議郞) 이전(李瑑)의 딸이다. 1630년 진주 단목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을 지극 정성 봉양했고, 1660년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호여(浩汝)이다. 1837년(헌종 3)에 문과 병과에 올랐다. 이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역임하였고, 1849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가훈을 잘 이어받아 부귀영화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문과조(文科條)」와 『증보 진양속지(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하범대(河範大)가 생전에 썼던 편지글과 과거시험 답안문. 서간첩은 하범대가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1837~1857) 사우 및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수십 통을 모은 것이다. 과시문은 1837년 과거 볼 때의 답안문으로, 책문(策問 : 정치에 관한 대책), 시의(詩義), 부(賦), 강시(講試) 목록 각 1통씩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진주하씨 후손...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시서(時瑞), 호는 연정재(煙艇齋).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예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의 문인으로 재기(才氣)가 뛰어났다.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예암(預庵) 하우현(河友賢)이며 어머니는 분성이씨(盆城李氏) 이익의 딸이다. 부인은 은율임씨 임박(林璞)의 딸이다. 1790년(정조 14)에 출생하여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종조부인 함청헌(涵淸軒) 하이태(河以泰)에게 공부를 배웠다. 15세 때 어머니마저 별세하자 상례를 정성으로 치러 마을의 칭...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응서(應瑞), 호는 지명당(知命堂).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이며, 하무(河楙)의 아들이다. 1661년(현종 2) 진주 수곡면 사곡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재주가 뛰어나고 견문이 넓어 문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모두 경전의 뜻을 전하였다. 당시의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눌암(訥菴) 이광정(李光庭)과 더불어 학문과 도의를 논하...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하억(河檍)이며 어머니는 풍천노씨(豊川盧氏)로 통덕랑(通德郞)노약(盧爚)의 딸이다. 부인은 현풍곽씨 곽약의 딸과 경주김씨 김필백의 딸이다. 1647년(인조 25)에 출생하여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7세 때 진양하씨의 집성촌인 진주 수곡 사곡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에 있는 하세희(河世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세희는 부모가 병이 들자 부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빈소를 지켜 호랑이도 그 효행에 감동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비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12㎝, 폭...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습여(習汝), 호는 신묵재(愼黙齋).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후손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행의가 독실하고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동료들과의 우애가 깊었다. 상을 행함에 예의에 어긋남이 없어 향당이 모두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유림. 본관은 진주. 자는 무원(武源), 호는 청계(淸溪).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12대 손이며, 하한주(河漢周)의 현손이다. 약관의 나이에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입신양명해 이름을 드러내니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사류(士類)의 숭상할 일이겠느냐?”라고 하고는 두문불출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중(大中), 호는 송파(松坡) 혹은 죽헌(竹軒). 성주목사와 김해목사를 역임한 영묘정 하진보(河晉寶)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장수 현감을 지낸 하성(河惺)이다. 아버지는 하달원(河達遠)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봉직랑 이명의(李明懿)의 딸이다. 아내는 울산김씨로 김극립(金極立)의 딸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택후(澤厚), 호는 인재(忍齋). 하호(河灝)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하윤관(河潤寬)은 일곱 살 때부터 뜻이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품은 뜻과 행실이 발라 글을 읽을 때에도 이해가 바르고 총명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과거는 포기하고 다만 향시에 급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가 과거...
-
하윤우의 처 해평윤씨 친정 남매들의 화회문기. 하윤우(河潤宇)[1647~1707]는 창주(滄洲) 하증(河憎)[1563~1624]의 증손이며, 부인 해평윤씨는 영의정 윤방(尹昉)의 현손녀이다. 하윤우의 처 해평윤씨의 친정 남매들의 화회문기로, 해평윤씨의 아버지 윤세규의 사후 그 자녀들이 화회 분집할 때 작성한 것이다. 종이에 묵으로 쓴 문서이다. 크기는 55.2㎝×122.5㎝이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택선(澤善), 호는 죽촌(竹村). 증조할아버지는 단지(丹池) 하협(河悏)이고, 할아버지는 용강(龍岡) 하달한(河達漢)이며, 아버지는 진사(進仕) 하첩이다. 아내는 의령남씨로 남천해(南天海)의 딸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온후하여 말을 빨리하거나 갑자기 얼굴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구장(九章), 호는 연정(蓮亭)이다. 평소 성품이 청아하고 인품이 넓고 후덕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도량이 컸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실천을 귀한 것으로 삼았다. 어버이의 병을 돌보아드릴 때 다섯 달 동안이나 백방으로 힘을 써도 효력이 없고 점점 위독한 상황에 이르자 북두칠성에게 빌었으며, 또 글을 지어 산에 빌었다. 지성을 다한 끝에 다섯 줄...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여등(汝登), 호는 습정재(習靜齋). 생원 하명(河洺)의 손자이며 하윤우(河潤宇)의 아들이다. 평소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고, 젊었을 때 문예가 이미 숙성해서 과거 급제에 필요한 글을 짓는데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향시에 3번이나 급제했으나 1721년(경종 1)~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옥(辛壬邪獄) 등 당쟁이 극심한 것을 보고는 문...
-
조선 후기 하윤우가 자녀에게 재산을 분급하기 위해 작성한 금급문기. 하윤우(河潤宇)는 슬하에 3남(하응운(河應運), 하응일(河應一), 하응휴(河應休)) 2녀(첫째사위 정상길(鄭相吉), 둘째사위 강공일(姜公一))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몫에 따라 재산을 분급하기 위해 작성했다. 종이에 묵으로 쓴 문서이다. 크기는 44㎝×275㎝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유(1645) 4월 11일...
-
조선시대 하응운(河應運)이 장자 하재악(河載岳)에게 한 유언을 적은 문서. 하응운 유언은 1월 23일 작성되었는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28일에 향년 71세의 나이로 하응운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하응운에게는 부실과 서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 재산에 대한 처리와 당부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또한 치상 시에는 모나 방사 등을 사용하지 말고, 마나 면, 명주...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했지만, 어버이 봉양에는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올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눈이 멀자 개구리를 구워 드려 시력을 회복하게 하였다. 효행 조정에 알려져서 벼슬을 추증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입에 넣어 드렸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마치 어른과 같이 예를 다했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약과 음식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마련했다. 어머니 병환 치료를 위해 눈 속에서 비둘기를 구했고,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했다. 또한...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서중(敍中), 호는 사농와(士農窩). 효자 하진태(河鎭兌)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거를 폐하고 송성담(宋性潭)에게 사사하였으며,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와 교유하였다. 성품이 굳세고 돈독하게 배우고 힘써 행했으며 예학(禮學)에 밝아서 추앙을 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담상간답(潭上簡答)』과 『대...
-
조선 중기의 효자·유림. 본관은 진주. 자는 천지(千之), 호는 이곡(梨谷).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하인수의 효행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타고난 인품이 순수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효심 또한 지극하고 학문의 깊이도 매우 뛰어났다. 어릴 적부터 필법이 출중했으며, 한결 같이 어버이의 뜻에 순응하여 털끝만큼도...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이보(履甫), 호는 죽와(竹窩). 하윤관(河潤寬)의 손자이며 하응회(河應會)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따르면 하일호(河一浩)는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후하며 마음이 넓고 깊어 사람들이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아니했다고 평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학문과...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성회(聖會). 하찬(河瓚)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겸재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하였는데 주위의 기대가 자못 컸다. 훗날 하홍도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자 하홍도가 울면서 하직인사를 하고 추모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익운(河益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재형(朴在亨)의 딸이다. 부인은 정선전씨(旌善全氏)로 전한순(全漢淳)의 딸이다. 1852년(철종 3)에 나서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근검한 생활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교유가 넓었다. 평소 가풍을 엄히 지켜 향리에서 높이 추앙되었으며,...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의윤(義允), 호는 동료(東寮).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경운(河慶運)이며 어머니는 은진임씨(恩津林氏)로 임찬원(林纘源)의 딸이다. 부인은 진양정씨로 정주빈(鄭周贇)의 딸이다. 1830년(순조 30)에 출생하여 8세에 친상을 당하고 15세 때는 조부인 부용담(芙蓉潭) 하필룡(河弼龍)의 상을 당하면서도 법도에 한치의...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덕언(德彦), 호는 도곡(道谷).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우현(河愚顯)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윤오(李潤五)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채씨(仁川蔡氏) 채경진(蔡景珍)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에 태어나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진사에 올랐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
조선 후기의 선비. 자(字)는 군직(君直). 하자혼(河自渾)의 현손이다. 성품이 한결같이 빛나고 자유분방하였으며 좋은 풍신(風神)에 문장이 능하였다. 아름다운 산수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여 두 번이나 평양에 들어갔고, 경사(京師)에 문사(文詞)로 이름난 사람들에게 모두 시(詩)와 서(序)를 만들어 주고 다녀 수백 여 편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온 나라의 선비들과 두루 교유를 쌓아 비록...
-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성모(聖謨)이며,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집이 심하게 가난하여 백부의 집에서 의지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금화현(金化縣)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게 되자 직접 환부를 빨아 구완하였으며, 목욕재계하고...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청백(淸伯), 호는 초정(草亭). 태계(台溪) 하진(河溍)[1597~1658]의 계제(季弟)이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을 따라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그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두 형과 더불어 은거하면서 생을 보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 대사간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에 급제하였고, 163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모봉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성태동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효성이...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조선 중기 때 문신 하진(河溍)의 묘비. 하진(河溍)[1597~1658]은 본관이 진주, 호가 태계(台溪)이다. 1633년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다. 하진 묘비는 1675년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위치한 하진의 묘 앞에 있다. 얕은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뚜껑돌은 생략하였다. 전면의 ‘집의태계하공지묘(執義...
-
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의 상소문. 하진은 호가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이 상소문은 하진[1597~1658]이 나라에 올린 상소문으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고문서이다. 하진 상소문에는 사회 상황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조선 후기의 문신인 하진(河晉)[1597~1658]의 시문과 그에 관한 글을 모은 것. 하진의 자는 진백(晉伯), 호는 태계(台溪)이다. 1624년(인조 2)에 진사가 되고 증광시(增廣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사재감군직장(司宰監軍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늙으신 부모를 봉양하느라 취임하지 않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사간원 정언(正言),...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영서(英瑞), 호는 역헌(櫟軒). 부친은 하해호(河海浩)이며, 생부(生父)는 하수호(河壽浩)이다. 하진달(河鎭達)은 1778년 진주 단목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해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부모를 섬기는 데는 얼굴빛을 밝게 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훗날 부모상을 다해서는 자식의 예를 다하기도 했다. 선조들의 유업을 후세에 알...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도(啓圖), 호는 쌍부헌(雙負軒)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시도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재능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참봉으로 특별히 천거하여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으로 제수되어 명망(名望)을 얻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따라 북벌계획을 밀의하고 재리산...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자추(子樞), 호는 국담(菊潭). 죽와(竹窩) 하일호(河一浩)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랐다. 소년시절에는 문충공 하륜(河崙)의 재실인 오방재(梧坊齋)에서 글을 읽으며 포부를 키워나갔다.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5개월 동안 탕약을 받들면서 한 치도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부모가 살아있을 때와 같은...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자심(子深), 호는 복와(復窩)이다. 성품이 맑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학문이 깊었고, 밖으로는 의(義)를 행하여 세상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안으로는 백형(伯兄) 국담공(菊擔公)과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고, 밖으로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생들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자앙(子仰), 호는 모죽재(慕竹齋). 조선시대 진주 지역의 선비인 죽와(竹窩) 하일호(河一浩)의 아들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젊어서부터 스스로를 자제함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형제들이 모두 학문에 정진하여 각각 이름을 높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평생토록 그 부친의 삶과 학문을 섬기고 사모하여 작은 재실을 짓고, ‘慕...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찬언(贊彦), 호는 행정(杏亭)이다. 생원 하락(河洛)의 현손이며, 하재악(河載岳)의 아들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세 때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희맹(趙希孟)에게 수학하다가 19세 때 스승에게 울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돌아갈 것을 고하고 돌아와서는 50년 동안 하루같이 노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사중(師仲), 호는 용와(容窩).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종형인 예암공 하우현(河愚顯)을 따라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남계(南溪) 이갑용(李甲龍)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여러 번 서울로 과거를 보러갔으나 담당자가 뇌물을...
-
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중진(仲珍).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둘째 아들이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와 더불어 도의로 사귐이 매우 친밀하였다. 하찬(河瓚)이 죽자 하홍도가 묘명(墓銘)을 찬(讚)하여 친분을 과시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 하찬[하진태] 남매가 부모 사후에 합의하여 재산을 나누는 화회문서. 하찬(河鑽)[1737~1800]은 하재악(河載岳)[1695~1742]의 장남이나 순서상으로는 1남5녀 중 막내였다. 분재가 이루어진 10월 28일은 하찬이 혼례를 올리고 신행을 끝낸 직후인데, 분재기 서문에 따르면, 다른 남매들은 상제례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고 셋째 사위 한용만 참석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백응(伯應), 호는 설총(雪聰) 또는 설창(雪牕). 조선 중기 진주지역의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큰아버지이고, 하홍달(河弘達)이 부친이다. 어려서부터 백부 하홍도 밑에서 수학하였다. 천성이 총명하여 겸재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7세 때 연이어 부모상을 당해 극진한 예로써 장사와 제사를 받들고, 상복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천기(千期), 호는 태와(台窩). 진사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에 38세로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주부, 직장 등의 벼슬을 지내고 승문원정자 벼슬로 승진을 했으며, 외직으로는 찰방 등의 벼슬을 지냈다. 당시 조정은 당쟁으로 시끄러웠다. 일찍이 부친인 지명당 하세응은 장희빈의 신원을 청하는...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보(大甫). 호는 조산처사(螬山處士).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년여 동안 서울에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의 열녀 정문을 내리게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어머니는 열녀요 아들은 효자라.”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수록되어 있다....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이태(而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형조참의를 지낸 하득형(河得亨)이며 어머니는 단양장씨(丹陽張씨)로 장식(張植)의 딸이다. 부인은 고령신씨(高靈申氏) 신기한(申起漢)의 딸이다. 1695년(숙종 21)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열심히 연마하였다. 숙종 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할 마...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헌(一軒). 집의를 지낸 하진(河溍)의 아들이다. 1634년(인조 12)에 출생하여 나이 13세에 허목(許穆)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조선 중기 진주지역의 학자인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남명 조식(曺植)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심으로 남인계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성경(成卿).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어버이에게 드릴 고기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스스로 방에 날아들어 그것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배를 원했으나 끝내 구해 드리지 못하자 이것이 한...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성종 때의 문신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공조참의를 지낸 하경호(河慶灝)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진주 운문에 살았다. 효종 때 훈련원주부를 지냈고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특별히 선전관이 되어 왕의 북벌 논의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피를 토하며 곡을 하였다. 이후 나라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단지(丹池) 하협(河悏)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용강(龍岡) 하달한(河達漢)이다.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손녀(孫女)이며, 후처는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성흠(文聖欽)의 딸이다. 단목(丹牧) 흥용(興龍)에서 출생하였다. 오곡관재(梧谷官齋)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황산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중해(仲海). 선조 때의 학자 창주(滄洲) 하증(河憕)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효우에 돈독하였다. 어머니의 병을 모시기를 20년이나 계속하였으나 일심으로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한때 위중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고 하늘에 빌어 마침내 회생할 수 있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죽을 마시며 슬퍼하다가 드디어...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와(樂窩). 인조 때의 학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었으며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출세를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문장이 간결하고 필법이 힘찼으며, 천문과 산학, 의약과 병가(兵家)의 학문 뿐 아니라 활쏘기와 말 타기에까지 능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만년에 형 하홍도를 따라 도의...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하광국(河光國)이며,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1593년(선조 26)에 출생하여 1666년(현종 7) 73세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정성껏 치렀으며, 옛 성현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스스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촌부(村...
-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교방 계통의 무용극. 진주한량무(晋州閑良舞)는 1979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민속무용으로 우리나라 춤 중에서 내용의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무용극이다. 진주한량무의 주요 등장인물은 한량, 승려, 색시, 주모, 별감, 상좌, 마당쇠이며 여기에 악사가 함께한다. 배역에 따라 성격이 다른 춤사위와 옷차림으로 구성되며, 음악의 장...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 자는 천뢰(天賚), 호는 유계(柳溪).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중이었으므로 이를 통분히 여겨 “늙은 신하는 임금의 욕됨에 놀라 적개심에 불타는 마음 나라...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뢰(聖賚). 1695년(숙종 21)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 기민(饑民)을 진휼하고 서울에서 약을 구해다 악역(惡疫)을 퇴치하는 등의 공을 세워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그 후 통어사(統禦使)·부총관(副摠管)을 지내고,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안성(安...
-
조선 후기의 열녀. 칠원윤씨는 남편 한석건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한 나머지 곧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영조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우경(佑卿)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난을 진압하고 위세를 떨쳤다. 뒤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 공연되었던 향악정재의 하나로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 고조 유방(劉邦)의 초(楚)와 한(漢)나라 사이의 승부를 정재화한 무극. 사마천의 『사기』「항우본기」에 기록된 중국 진나라 말기의 초한승부에 연원을 두고, 이들의 ‘홍문연’(鴻門宴) 고사를 의방(依倣)하여 이 장면만을 정재화한 것이다. 이러한 항장무는 진주의 교방에도 전하여져,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대응(大應). 진주 승산에 살았다. 천성이 충의롭고 지략이 있어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성재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정희량과 동서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처남인 조성재와 동서인 정희량의 뜻하는 바가 사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알고 일체의 왕래를 끊어버렸다. 그러던 중 1728년(영조 4) 두 사람이 두목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무...
-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통식 화포(有筒式火砲). 유통식 화포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서 천·지·현·황자총통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현자총통은 유통식 대형화기 중 세 번째로서 그 제원의 차이를 두는 중화기의 일종이다. 현자총통(보물 제885호)은 1984년 3월 8일에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고...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있는 고려시대 문신 홍의(洪毅)의 신도비. 조선 영조 때 고려시대에 은청광록대부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를 지낸 홍의의 업적을 기려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홍지마을에 있다. 암반을 정밀하게 조각한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고려은청광록대부상서우복야(高麗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윤경(潤慶). 호는 송암(松菴). 장무공(莊武公) 황윤(黃潤)의 8대손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때 의병장이 되어 적을 거창의 소사평(素沙坪)에서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무신란은 청주 출신의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
조선 후기의 문신 황석강(黃石江)이 받은 양무원종공신녹권.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공신으로 책봉된 인물들에게 발급된 공신 증서로서, 1권 1책으로 구성된 활자본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된 1728년 7월에 양무녹훈도감(揚武錄勳都監)에서 발행해 나누어 주었다. 황석강[1687~1760]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 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