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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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南大興寺楓潭堂義諶大師碑 |
영어공식명칭 | Haenam Daeheungsa Pungdamdang Uisimdaesabi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선 |
건립 시기/일시 | 1692년 -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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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92년 - 풍담의심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65년 - 풍담의심 입적 |
현 소재지 |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성격 | 탑비 |
양식 | 통식[귀부, 비신, 이수] |
관련 인물 | 풍담의심 |
재질 | 돌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21㎝[전체 높이]|170㎝[비신 높이]|81㎝[비신 가로]|29㎝[비신 두께] |
소유자 | 대흥사 |
관리자 | 대흥사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부도전에 1692년 승려 풍담의심의 행적을 기록하여 건립한 비.
[개설]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海南大興寺楓潭堂義諶大師碑)는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부도전에 있다. 승려 풍담의심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692년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는 풍담의심의 제자들이 기오당(寄傲堂) 김우형(金宇亨)에게 비문과 글씨를 부탁하여 1692년 대흥사 부도전에 세웠다.
[위치]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는 구림리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산기슭 아래에 부도전 안에 있다.
[형태]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는 전체 높이 321㎝이며, 비신은 높이 170㎝, 가로 81㎝, 두께 29㎝이다. 귀부의 얼굴은 용두화되었고 동그란 두 눈은 튀어 나왔다. 입은 여의주를 물지 않은 채 꼭 다물고 있으며 사이로 이빨이 보인다. 목은 길고 굵으며, 앞쪽 양발은 안쪽으로 모아 조용히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에 주름이 많아 생동감을 잃고 있고, 귀갑부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나 형식적이다. 등 가운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비좌의 상부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과 이수는 모두 방형이다. 이수는 2마리의 용이 몸을 뒤튼 채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형상이고 용 사이사이에 화문(花紋)이 조각되어 있다.
[금석문]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문(海南大興寺楓潭堂義諶大師碑文)은 다음과 같다.
두륜산(頭輪山) 풍담대사(楓潭大師) 비명(碑銘)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 겸(兼) 춘추관 수찬(春秋館 修撰)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 正) 김우형(金宇亨)이 찬술하고 아울러 글씨를 쓰고, 가덕대부(嘉德大夫) 복창군(福昌君) 겸(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 이정(李楨)이 전액을 쓰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천하의 정치는 방술(方術)에 많이 의존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법(法) 이외의 것을 믿어 자신을 닦고 지니는 부류는 그 종류가 한둘이 아니다. 대사는 평생 도를 크게 품었지만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오직 저 상문(桑門)의 공적(空寂)에 대한 가르침은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중국에 들어왔는데 중국 전체가 그 풍조를 좇았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신라와 고려 때 더욱 번성하여, 사람 사람들이 다 승려요, 걸음걸음이 돌탑이었으니 위대한 호걸의 역량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필부(匹夫)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정말 세상의 가르침이 크게 변하였지만 의발(衣鉢)이 계속 전해져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 이르러 비록 크게 지각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또한 불교에 빠져들지는 않았으며, 불교 또한 더 이상 세상의 근심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조용히 한편을 지켜 나가며 문드러져 없어지지 않았다.
혹 북쪽에서 배운 것을 펼쳐 놓는 배사(倍師)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과 혹 진리를 묵수(墨守)하는 견고함에도 모두 도(道)가 있지 않음이 없었다.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석문(釋門)의 제자(弟子)인 준기(俊機), 도안(道安) 등이 돌아간 스승의 금강비(金剛碑)를 지닌 이 학사(李學士)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비록 스승은 돌아갔으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남아 있게 되었다. 또 남쪽에서 대사의 지팡이가 머물던 곳에서 열어 펼쳐 놓은 것이 그윽이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삼백(三白)이 문을 두드리고 방문하여 청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이에 매정하게 사양하거나 그것을 피할 길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사(倍師)하지 않음을 아름답게 여겨, 오직 이 학사가 말한 뜻을 풀어서 서술한다.
법사(法師)의 이름은 의심(義諶)이요, 법호(法號)는 풍담(楓潭)이며 속성(俗姓)은 유(柳)요, 태어난 곳은 통진(通津)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어머니 정씨가 일찍이 꿈에서 여의주를 품어 만력(萬曆) 임진(壬辰)년에 대사를 낳았다고 한다. 나이 겨우 16세에 출가하여 성순(性淳)대사를 쫓아 머리를 깎았다. 원철(圓澈)대사에게서 계(戒)를 받았으며 편양(鞭羊)대사를 알현하고 법(法)을 얻었다.
편양대사는 청허(淸虛)대사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다. 청허대사가 전해준 계(戒)는 월사(月沙) 이상국(李相國)과 계곡(谿谷) 장상국(張相國)등에게도 전하여졌다. 다 본디 문장의 대가였으며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시각으로 인연을 따라 놓여있는 업(業)의 행로를 따랐다. 그 줄기의 흐름이 깊은 종파(宗派)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연유한 뛰어난 근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드디어 남쪽으로 이름난 산천을 유람하면서 여러 장로(長老)들의 거처에 출입하였으며, 금강산과 보개산에 자취를 남겼으며, 화엄(華嚴) 등의 경전에 주석을 달아 깊은 뜻을 밝혔다.
또한 기이한 꽃과 특이한 나무와 날짐승이 날개 짓하고 길짐승이 달리는 등, 비 온 후 맑게 개어 밝은 달이 뜬 저녁이기에 음미하고 노닐며 감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읊어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입에 넣어 씹고 또 씹어 맛보고 모아 작은 책자 하나를 만들었다. 이윽고 문득 깨달아 생각하기를 “이것이 어찌 진여(眞如)를 위한 일이 되겠는가.”라고 하고 바로 불살라 버려 전하지 않았다.
을사(乙巳)년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열반에 드니, 임종에 즈음하여 “기괴하도다 이 영물(靈物)이여!”라는 게송을 남기었다. 임종에 임하여 더욱 쾌활해지니 삶과 죽음에도 낯빛이 변하지 않아 마치 밝고 밝은 가을 하늘의 달 같았다.
법랍(法臘) 58세였으며 열반에 든 지 9일이 되어도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제자들이 신성한 몸을 받들어 사리(舍利) 5립(粒)을 얻었는데 은색(銀色)은 부도(浮屠)를 세워 법(法)의 이치대로 돌아갔으니 임제(臨濟)의 18번째 전법(傳法)대사가 되었다. 또한 석실(石室) 청공(淸珙)대사가 고려(高麗) 국사(國師) 보우(普愚)대사를 위해 실재로 석옥(石屋)의 뜻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6세(世)가 전해져서 청허(淸虛)대사에 이르렀다.
이것은 모두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동쪽으로 전해지고 또 다시 동쪽으로 전해져 60여 세(世)에 이르렀으며, 청허대사로부터 편양(鞭羊)으로 전해졌다. 그의 제자인 풍담자(楓潭子)와 기안(機安)등도 또한 스승의 거울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비추어 길이 존속시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오호라! 밝고도 밝은 분이로다!
[海南 大興寺 楓潭堂 義諶大師碑文 頭輪山楓潭大師碑銘. 嘉義大夫 行承政院都承旨 兼經筵叅贊官 春秋館修撰 藝文館直提學 尙瑞院正 金宇亨 撰幷書 嘉德大夫. 福昌君 兼五衛都摠府都摠管 李楨 篆.
莊周云 天下之治 方術多矣 信乎外吾法 而修持者 其家非一 而師生之道大壞 迄今無傳於世 惟彼桑門空寂之敎 自漢明入中國 中國靡然風從 東方羅麗之際 尤爛熳狼藉 若其人人僧寶 步步石塔 自非大豪傑力量 鮮能免夫 良由於世敎大變而衣鉢授受 至死不渝 而然至於我朝 雖非大覺者 亦不至浸滛於佛 佛亦莫能爲世患 然 猶潛保一偏 不爲糜潰消散 若北論於陳學之倍師 不啻 若墨守之堅 盖亦道無不在 有足多者 釋門子 俊機 道安等 持其亡師金剛碑 李學士以爲師 雖化而其所不化者存 又將於南維住錫之所闡發幽先 永圖不杇 三白叩門而請愈切 不侫 謝不能免 嘉其不倍師 惟演學士之辭意而敘之 師法名曰義諶 號曰楓潭 俗姓曰柳 誕地曰通津 母鄭 鄭嘗夢含珠 而生師於萬曆壬辰 年纔十六而出家 從性淳師而落髮 參圓澈師而受戒 謁鞭羊師而得法 鞭羊 淸虛之法嗣 淸虛之戒 月沙李相國 谿谷張相國 俱自文章大家 以同而不同之辨 隨緣應路之業 其淵流宗派 灼有所自 遂南遊名山水 出入諸長老 留跡於金剛 寶盖 註釋華嚴等經發明奧義 亦於奇花異樹 禽翔獸走 雨餘淸陽月夕 好觀可玩可游者 無不吟詠 而咀嚼之嘗 積成一冊子矣 已而悟曰 此豈足爲眞如業耶 仍焚之不傳 乙巳 示寂于金剛正陽寺臨化吟一偈曰 奇怪茲靈物 臨終尤快活 死生無變容 皎皎秋天月 法臘五十八 化之九日顔色如常 弟子等 奉靈骨 獲舍利五粒 如銀色者 建浮屠如法 爲臨濟十八傳 而爲石室淸珙 麗朝國師普愚 實傳石屋之旨 自是又六傳而至淸虛 盖如來正法眼藏 東而復東 六十餘世而傳自淸虛 鞭羊屬之楓潭子 機安等 亦善言其師之鏡 照世界而長存者 嗚呼 可徵也夫]
[현황]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는 대흥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부도전 안에 대흥사 13대종사, 대흥사 13대강사의 부도 및 비석과 함께 있다.
[의의와 평가]
해남 대흥사 풍담당 의심대사비는 대흥사 13대종사 중 제1종사이자 조선 중기 고승인 풍담의심의 탑비로 대흥사에 남아 있는 13개의 탑비 중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된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