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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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鼎山齋 |
영어의미역 | Jeongsanjae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동욱 |
건립 시기/일시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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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성격 | 재실 |
양식 | 콘크리트 건물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에 있는 이염(李琰)을 기리기 위해 지은 재실.
[개설]
이염[1538~1588]의 자는 옥오(玉吾)이고, 호는 운당(雲塘)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유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진흥시키고자 선교 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키는 등 여러 정책을 펴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문정 왕후의 노여움을 사 극형에 처해질 뻔하였으나, 명종의 노력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변천]
정산재(鼎山齋)는 1915년 12세손 이홍열(李泓烈)이 이염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묘소 아래에 건립하였다. 묘비에 “남명 조 선생이 지리산 아래서 도를 강론할 때 그 문하에서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선비는 최수우당(崔守愚堂)[1529~1590], 하각재(河覺齋)[1538~1590], 유조계(柳潮溪)[1546~1589]와 같은 여러 어진 선비가 있어 도리와 의리를 같이하였고, 명분과 절개를 실천해서 남명의 사문을 빛냈는데 징사(徵士)[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되어 조정에 나오는 것] 운당 이공은 실로 더불어 어깨를 견줄 만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운당은 수우당과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며 때로는 노를 저어 거슬러 오르며 서로 노니 사람들이 남쪽 지방의 두 처사라고 불렀다. 기문은 이인기(李仁基)가 지었다. 지금 있는 재실은 2009년 다시 지은 것이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콘크리트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