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27
한자 崔八凱
영어공식명칭 Choi Palgae
이칭/별칭 성거(聖擧),죽은(竹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0년연표보기 - 최팔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최팔개 동래성 전투 참전
추모 시기/일시 1969년 - 『죽은죽포이공실기』 간행
추모 시기/일시 1987년 - 최팔개 용산서원 제향
거주|이주지 최팔개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지도보기
활동지 최팔개 활동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묘소 최팔개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최팔개(崔八凱)[1560~?]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최팔원(崔八元)과 함께 동래성(東萊城) 전투에 참전하였다.

[가계]

최팔개의 본관은 흥해(興海)[곡강(曲江)], 자는 성거(聖擧), 호는 죽은(竹隱)이다. 고조할아버지 최지형(崔沚瑩)은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처가인 밀양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고조할머니는 밀양 손씨이다. 증조할아버지 최순동(崔順潼)은 둘째 아들로서 진사시에 입격하고,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였다. 증조할머니는 군수 김경(金警)의 딸 청도 김씨(淸道金氏)로서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이다. 최순동은 밀양에서 자인현 곡란리(谷蘭里)로 이거하였다. 할아버지는 난실(蘭室) 최운수(崔雲水)로 훈도로 천거되었다가 사마시에 입격한 후 산림에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난고(蘭皐) 최응해(崔應海)로 효행과 학문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받았다. 어머니는 정랑 조박(趙鎛)의 딸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최팔개의 부인은 최혼(崔渾)의 딸 경주 최씨(慶州崔氏)이며, 둘째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동생 최팔원은 숙부 최응하에게로 출계(出系)하였다.

[활동 사항]

최팔개는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상례를 치르니, 조문 온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행을 칭송했다고 한다. 평소 의롭지 않은 세상을 바로잡고자 동생 최팔원과 함께 말타기·활쏘기를 연습하고, 용산에 올라 병서(兵書)를 읽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최팔원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격문을 보고, 동생과 함께 가동(家僮) 28인을 거느리고 동래성으로 향하였다. 동래성으로 향하던 중 범어(梵魚) 고개에 이르러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절하고, 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럼에도 동래성의 남문으로 달려가 송상현의 제사를 지냈다. 이를 보고 쫓아 온 왜적과 부산진에서 맞서 싸웠는데, 최팔개는 부상을 입고 동생 최팔원은 순절하였다. 최팔개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자 했으나 종사(宗祀)를 의탁할 곳이 없었기에 그러지 못하였다. 동생의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최팔개는 부득이 초혼(招魂)만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저술 및 작품]

1969년 후손들이 최팔개·최팔원 형제의 행적을 엮은 『죽은죽포이공실기(竹隱竹圃二公實紀)』를 간행하였다.

[묘소]

최팔개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의 사량곡(思良谷) 용산(龍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3년(광무 7) 도론(道論)으로 재실을 세우고 최팔개·최팔원 형제의 위패를 봉안하여 ‘사절각(思節閣)’이라고 명명하였다. 편액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1918년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하였으며, 1964년에 강당(講堂)을 증축하고 ‘경의사(景義祠)’라 이름 지었다. 1987년 유림에서 결의하여 용산서원(龍山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1길 19-16]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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