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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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倉洞西倉-堂山祭 |
이칭/별칭 | 서창동 서창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지현 |
중단 시기/일시 |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 - 서창동 서창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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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당산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서창마을 앞길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 날 밤 |
신당/신체 | 당산[느티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서창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서창동 서창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서창마을의 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서창마을은 극락강의 동쪽에 인접한 마을로 마을 앞에는 극락강과 서창평야가 펼쳐져 있어 마을 사람 대부분 농사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부촌이다. 과거 세곡(稅穀)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서창이라고 불렸다. 고려 말에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남평문씨(南平文氏), 진주강씨(晉州姜氏) 등이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다.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서창마을 당산의 신체는 마을 앞길 옆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이다.
[절차]
서창동 서창마을 당산제는 제를 지내기 위하여 정월 7~8일경에 마을 어른들이 모여 제관(祭官)을 선정하는데, 화주를 비롯하여 축관 1명, 아헌 1명, 종헌 1명, 집사 1명 등 모두 5명을 선정한다. 화주로 선정이 되면 제사에 올릴 제물(祭物)을 장만하고, 초헌을 겸하여 담당한다. 화주는 마을에서 깨끗한 집을 택하여 그 집에 통보하는데, 이렇게 화주에 선정이 되면 화주는 상가에 가거나 부정한 음식 등을 먹지 않고, 언행과 몸가짐을 조심한다. 제비(祭費)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희사하는 형식으로 거출하는데, 당산에 공을 드려야 복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비를 걷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화주는 제사를 지내기 3일 전부터 제사 지낼 준비를 하는데, 당산나무 주변과 화주집 앞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아 부정의 출입을 막았으며, 제물을 마련할 때는 음식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수건으로 마스크를 하였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삼실과[은행, 밤, 호두], 나물 3가지[바다, 산, 밭에서 나는 나물] 등을 간략하게 마련하여 진설한다. 돼지는 한 마리를 잡아 머리는 제사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마을굿을 치면서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는다. 제기(祭器)는 마을에서 일괄로 구입해서 보관하고 있다가 제사 때마다 사용하는데, 이 제기는 오직 당산제에만 사용하고 부정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대여해서 사용하지는 못한다.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보통 오후 5시경부터 마을을 돌며 굿을 치기 시작하며, 제사는 밤 10시경에 시작하여 11시경에 끝이 난다. 제를 모실 때는 여자들의 접근을 금지하였으며 노인들만 참여하였다. 특히 제관들은 검은 도포를 입었다. 소지는 제관만 하였으며, 헌식은 백지에 싸서 고목이 된 당산 속에 묻으면서 "우리 동네 올 일년간 별고 없이 무사히 지내게 해 주시오."라고 기원한다. 헌식 후에 진설된 음식은 제관이 모두 먹는다. 제사가 끝이 나면 날이 밝을 때까지 굿을 치며 돌아다닌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굿을 치는데, 이때 들어온 수입금으로 주로 굿물을 구입하고 나머지는 마을 자본으로 사용하였다. 보름이 되면 줄다리기를 하는데 줄은 숫줄[서부]과 암줄[동부]로 편을 나누었으며, 동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현황]
서창동 서창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도로를 내면서 당산나무를 벌목하여 중단되었으며,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