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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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厚玉 |
영어공식명칭 | Kim Hu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김후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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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4년 - 김후옥 숭일학교 보통과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김후옥 숭일학교 강당에 유도·권투·역도 도장 개설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김후옥 광주소년의용단 창설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김후옥 광주소년의용단에서 용진소년대로 개편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김후옥 광주YMCA 체육부 간사 겸 종합체육관 관장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김후옥 조선소년척후대 1대 광주 대표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81년 - 김후옥 사망 |
출생지 |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 |
거주|이주지 | 경성부 관철동 255 |
학교|수학지 | 숭일학교 - 전라남도 광주 |
학교|수학지 | 경신학교 - 서울 |
성격 | 체육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YMCA 회관 종합체육관 관장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체육인.
[개설]
김후옥(金厚玉)[1910~1981]은 1910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광주YMCA 회관 종합체육관 관장으로 권투, 유도, 역도, 레슬링, 기계체조 등을 지도하고,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근대 체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김후옥은 1924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숭일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27년 경신학교 3학년 재학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퍼질 때 이에 가담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30년 10월 출옥한 후 전라남도 광주에 내려와서 숭일학교 강당에 유도와 권투와 역도 도장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사범 무자격을 문제 삼아 더 이상 도장을 운영하지는 못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낸 최원순(崔元淳)의 소개로 상경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강도관(講道館)에서 유도 3단의 사범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후 광주로 내려와 부동교 건너 사직공원 앞 사동 105번지에 녹성구락부 체육관을 세웠다. 그러나 1931년 12월 일제는 신사 옆에 체육관을 지었다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내렸다.
1932년 4월 광주YMCA 회관에 종합체육관이 설립되었다. 광주YMCA 회관은 광주극장 옆 정미소 터에 대지 400평[약 1,322㎡] 규모였는데, 이곳에 체육관을 세웠다. 김후옥은 광주YMCA 체육부 간사 겸 종합체육관 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광주YMCA 체육관도 문을 닫게 되었다. 김후옥은 광주YMCA 체육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권투, 유도, 역도, 레슬링, 기계체조 등을 지도하며 광주 지역의 근대 체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30년 김후옥이 창설한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광주소년의용단은 1931년 10월 이를 용진소년대로 개편하여 조선소년척후대(朝鮮少年斥侯隊)에 가입하였다. 용진소년대가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최초로 스카우트가 되었다. 1933년 9월 29일 김후옥은 조선소년척후대 1대 광주 대표가 되었다.
1937년 일제는 보이스카우트를 반일 독립운동 단체로 규명하고 해산과 함께 관계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후옥은 보이스카우트 사건과 싱가포르 반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광주 방림동 농촌에서 은거하였다. 1981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근대 스포츠 보급에 앞장선 체육인으로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