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40 |
---|---|
한자 | 金台鉉 |
영어공식명칭 | Kim Taehyeon |
이칭/별칭 | 불기(不器),쾌헌(快軒),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려 후기 광주 출신으로 밀직부사, 판삼사사, 첨의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태현(金台鉉)[1261~1330]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이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운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김태현의 아버지는 지영광군사와 영암부사를 지낸 김수(金須)이고, 평장사(平章事) 김주정(金周鼎)의 조카이다. 김수의 아들은 김광식(金光軾)·김광철(金光澈)·김광재(金光載)·김광로(金光輅)이다.
[활동 사항]
김태현은 10세 때 아버지 김수가 삼별초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나 일찍 학문을 이루었으며 풍모가 단아하고 눈매는 그린 듯하였다고 전한다. 15세인 1275년(충렬왕 1)에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하였다. 1276년(충렬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전시(殿試)에도 급제하여 좌우위참군 직문한서(左右衛參軍直文翰署)를 제수받고, 좌창별감(左倉別監)이 되었다. 그 뒤 판도총랑(版圖摠郎)이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고,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1301년(충렬왕 27)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3년(충렬왕 29)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로서 인재 선발을 맡았다. 그 후 김태현은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1305년(충렬왕 31) 고려에서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나뉘어 충렬왕과 충선왕을 이간질하여 정국이 혼란하였으나, 1307년(충렬왕 33) 김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공정한 정무를 통해 정국을 수습하였다.
1308년(충선왕 복위년) 김태현은 양광수길도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가 되어 도 내의 민호를 점검하였다. 그 뒤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로서 파직되었다가 1321년(충숙왕 8) 첨의평리(僉議評理)로 복직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였다.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에 의해 토번(吐蕃)으로 귀양 가고, 충숙왕은 원나라에 억류된 상황에서 김태현은 국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이 원나라의 억류에서 풀려나 관제를 개편할 때 파직되었다가, 이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왕의 청원으로 원나라가 국왕의 인(印)을 빼앗고, 김태현을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로 임명하고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충숙왕과 반대 세력이 김태현과 윤석(尹碩)·원충(元忠) 등을 하옥시켰다. 김태현은 곧 옥에서 풀려났으나 이 일로 인해 가족을 이끌고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충혜왕이 김태현을 불러 국정을 맡게 하였으나,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태현은 고대부터 고려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문을 모아 『동국문감(東國文鑑)』을 편찬하였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