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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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指標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연숙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8년 6월 27일 -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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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78년 6월 27일 -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종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8년 6월 29일 - 6.29학원민주화시위 발생 |
발생|시작 장소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정의]
1978년 6월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비인간적·비민주적인 교육정책과 박정희 독재체제를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은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한 사건.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권은 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학원에 대한 억압적인 감시·통제 정책을 강화하였다. 학도호국단의 설치, 대학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새로운 학칙 제정, 교수 재임용제 등 학원 통제 강화는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확산시켰다. 1977년부터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로 유혈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대량 학사 징계가 이루어졌으며, 대학 캠퍼스 내에도 중앙정보부 요원과 사복형사 등이 학생과 교수들을 감시하였다. 이는 교수에게 있어서도 자유로운 연구 활동은 물론 수업 진행에도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은 교수에게 학생 시위를 감시하고 막아내도록 압박하여 교수와 학생 간의 학문적 유대 관계를 무너트리게 하였다.
[경과]
1978년 3월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송기숙 교수는 서울대학교 백낙청 교수를 만나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학원 통제에 관해 논의하고, 전라남도 광주시로 내려와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노근 교수와 사학과 이홍길 교수를 만나 현 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향후 학생 시위 문제가 심각해지면 행동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6월경, 해직교수협의회 성내운 교수는 송기숙 교수를 찾아와 학생들의 희생을 기다리지 말고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백낙청 교수가 작성한 성명서 초안을 가져다 주었다. 이들은 서울과 광주의 각 대학 교수 7~8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동시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송기숙 교수는 전남대학교 교수 11명[김정수, 김현곤, 명노근, 배영남, 송기숙, 안진오, 이석연, 이홍길, 김두진, 홍승기, 이방기]의 서명을 받은 후, 다른 대학 교수들과 함께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하지만 대표자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고, 각 대학별로 선언문을 채택하겠다는 학교도 있어 공동 발표는 취소되었다.
6월 26일, 성내운 교수는 광주에서 송기숙 교수와 만나 계획이 연기되면 오히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적으로 와해될 수 있으므로 서명 참여 교수 외의 이름을 비밀로 하고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6월 26일 당일, 성내운 교수는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의 이름으로 된 선언문을 AP통신, 『아사히 신문』, 그리고 몇몇 대학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전남대학교에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서를 발표하였으나, 즉각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다. 이날 발표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에서 결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교육의 참 현장인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2. 학원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첫 걸음으로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배워야 한다.
3.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며, 그러한 간섭에 다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4. 3.1정신과 4.19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며 겨례의 숙원인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민족 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한다.
[결과]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에 호응하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6.27선언 지지 및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전남대학교 학생들 또한 양심 교수 연행에 항의하여 도서관을 점거하고, 이른바 6.29학원민주화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후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에 참여한 전남대학교 교수 11명 전원이 해직되었으며, 송기숙 교수과 성내운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송기숙 교수와 성내운 교수는 1979년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에 이르러 특별사면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우리의 교육지표'는 인간화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근본으로 교육 현장이 바뀌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입각하여 독재정권과 국가주의를 뒷받침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여 유신정권의 정당성을 비판, 부정하였다. 이는 신분이 보장된 대학교수들이 투옥과 해직을 각오하면서 반민주적인 교육 실상을 폭로한 사건으로 대학과 시민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