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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출토 유구석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514
한자 碧骨堤出土有溝石斧
영어의미역 The Stone Axe Excavated from Byeokgolje
이칭/별칭 벽골제 출토 홈자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문이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경 도구
제작시기/일시 청동기시대
제작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벽골제
재질 석기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벽골제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유구석부.

[개설]

유구석부(有溝石斧)는 홈자귀라고도 하는데, 나무를 깎거나 다듬는 데 사용하는 연모이다. 흔히 도끼가 전쟁이나 수렵, 나무를 벌채할 때 쓰였다면, 석부는 도끼로 여러 가지 용도에 맞게 재목을 자르거나 다듬어서 가공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는 농사지을 때 땅을 파는 괭이 용도로 사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청동기시대에 집을 짓거나 나무를 연모하는 수요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유구석부는 서기 전후 중국제 철기 제품들이 들어오면서 다른 석기들과 함께 사라져 갔다.

벽골제 출토 유구석부는 1975년 김제시가 벽골제 제방에 파묻혀 있는 수문의 복원 공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실시한 벽골제 발굴 조사에서 출토되었다. 벽골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흘해왕 21년, 백제 비류왕 27년(330) 벽골지(碧骨池)를 처음으로 열었는데, 그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흘해이사금 기축년에 처음으로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다”는 기사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삼국시대 전반에는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굴 조사는 윤무병 충남대학교 교수를 조사 단장으로 하여 1975년 2월 26일에서 3월 30일까지 1차 조사를 하였다. 이 발굴 조사에서는 수문지에서 문주처럼 보이는 높이 5.5m 정도의 대석주가 4m의 간격으로 좌우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사실을 찾아냄으로써 기록 속 벽골제의 흔적을 찾게 되어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농경 마을 김제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 주게 되었다. 벽골제 발굴에서는 대석주의 발견 이외에 중요한 성격을 지니는 유구나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B4 트렌치인 벽골 제방 밑 부분의 와석 혼합토 속에서 유구석부 1개가 발견되었다.

[형태]

홈이 파여 있고, 날의 한쪽 면을 갈아서 만든 석기이다. 홈이 파인 자귀 즉 석부를 유구석부라 하며, 몸통의 한쪽 면에 끈을 묶기 위한 단이 파인 석부는 유단석부(有段石斧)라 한다.

[의의와 평가]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벽제골 출토 유구석부는 벽골제 제방이 만들어졌을 때 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방을 수축하기 위해 흙을 채취해 오는 과정에서 같이 섞여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흙의 채취는 벽골제가 있는 곳으로부터 머지않은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며, 김제가 농경지의 집약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벽골제가 자리하고 있는 인근에서 이루어지던 농경 시대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것으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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