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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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萬錫 |
영어공식명칭 | I Manseok |
이칭/별칭 | 이준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성주현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 이만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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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이만석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출생지 | 이만석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거주|이주지 | 이만석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920 |
활동지 | 이만석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가평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만석(李萬錫)의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준석(準錫)이다. 가평군 북면 목동리(沐洞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2년생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가평 지역의 만세시위는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했던 이규봉(李圭鳳)이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그 내용을 가평에 전하면서 준비되었다. 이만석은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정기복(鄭基福) 등과 함께 의논하여 3월 15일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세계 만국공회에서 모든 속국은 독립하기로 되어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되었다. 가평에서도 3월 15일 아침 9시에 모든 사람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라는 격문을 인쇄하였다. 격문은 정기복이 목동리·화악리(華岳里)·소법리 등에 위치한 삼거리에 붙이고, 이만석은 정재명(鄭在明)과 함께 격문을 가지고 직접 거사를 시행할 사람들 규합에 나섰다. 그 노력으로 장기영(張基榮)·정성교(鄭聖敎)·최종화(崔宗和)·이홍복(李弘福)·홍종선(洪鍾先)·정효섭(丁孝燮) 등 20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이만석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3월 15일 북면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시위군중의 대오를 조직한 후 청년들과 선두에 서서 가평군청으로 향했다. 이만석은 행진 중에 기(旗)을 받아서 기를 높이 들고 앞장서 군중을 지휘하였다. 행진 중에 인근의 주민들이 가세하여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학교·면사무소·군청 등을 돌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면장과 헌병·경찰관 등 관헌은 시위대의 증가되자 헌병과 군을 동원하여 이윤석·정흥교 등과 함께 체포하여 헌병대로 압송하자 만세시위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하였다. 3월 16일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서낭당고개에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시위대는 평화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해 구출하기로 하였지만 헌병들이 체포하려 하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격렬한 저항하면서 가평읍내로 진출하였다.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저지하며 주동자를 체포하였는데 이만석은 이때 검거되었다.
이만석은 가평경찰서에서 1차 신문을 마친 후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다가 4월 26일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