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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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重洛 |
영어공식명칭 | Yu Jungrak |
이칭/별칭 | 사원,오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근하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유중락(柳重洛)[1842~1922]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사원(士原), 호는 오천(午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유원(柳瑗), 할아버지는 유영택(柳榮澤), 아버지는 유호(柳昈)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헌규(朴憲圭)의 딸이다. 형은 유중렴(柳重濂)이다. 184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유중락은 유년기에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하며,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일원으로서 이항로의 문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사건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는데, 뒤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각지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1896년 1월, 유중락은 평소에 교류하던 화서학파의 문인인 유봉석(柳鳳錫), 유중교(柳重敎), 이만응(李晩應) 등과 함께 춘천에서 사민(士民) 1,0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함께 거사에 참여하자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전국 팔도에 보냈다. 이후 의병 활동의 거점을 가평으로 옮겼다.
정부에서 파견한 춘천부관찰사(春川府觀察使) 겸 선유사(宣諭使) 조인승(曺寅承)이 가평에 도착하자 가평관아를 급습해 조인승을 체포한 뒤 처형하였다. 그 후 충청북도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로 합류해 활동하였다.
1907년에는 의병 6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군 벌업산에서 정부군과 접전하다가 패배하였다. 춘천으로 후퇴해 재정비를 마치고 유홍석(柳鴻錫), 김경달(金敬達) 등과 함께 가평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경기도 가평군 주길리(珠吉里)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한 뒤, 관군에 의하여 춘천 의병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유중락은 산 속에 은신하며 후진교육에 힘쓰다 1922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중락은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