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가 열 살에 지은 부(賦)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1748년 경포대가 기울자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누각의 모습을 옛 모습 대로 단장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오죽헌에 보관 중이던 「경포대부」를 찾아 그 내용을 가래나무에 새겨 경포대 기둥과 기둥 사이인 문설주 윗부분에다 걸었다고 한다. 「경포대부」는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있...
-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경포호에 관한 전설. 경포호는 수심이 깊지 않아 사람이 빠져도 상하지 않는다 하여 일명 군자호(君子湖)로 불린다. 또한 주위에 경포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정자가 있어 더욱 운치가 있고 겨울이면 철새들이 날아들어 장관을 더한다. 현재 둘레는 약 10리(4㎞)이지만 예전에는 20리 혹은 30리였을 만큼 넓었다고 전한다. 경포호에는 여...
-
강릉에 부임해온 어사 이현로(李賢老)를 기생 옥영(玉英)이 훼절시킨 이야기. 이 설화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던 어사 이현로를 옥영이 유혹하여 정을 통한 뒤, 어사가 속았음을 깨닫게 한다는 내용의 훼절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향렴조(香奩條)」에 실려 있으며,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구전으로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릉에...
-
강릉 한송정을 소재로 한 작자 미상의 고려 초기 가요. 『고려사(高麗史)』 「악지」 속악조(俗樂條)에 오언절구의 한역 시와 그 내력이 수록되어 있으나, 작가와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악지에 「한송정곡(寒松亭曲)」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노래는 거문고 밑바닥에 써서 둔 것이 중국 강...
-
강원도 안렴사 박신(朴信)과 강릉 기녀 홍장의 이야기. 강원도 안렴사 박신이 사랑하던 기생 홍장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크게 슬퍼하던 중, 부사 조운흘(趙云仡)과 함께 경포대에 놀이를 나갔다. 거기서 신선이 탔다고 생각했던 배에 홍장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수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
-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을 중심으로 후손들의 명단과 행적을 기록한 문집. 강릉김씨 본관의 근원과 보배로운 책자라는 뜻으로 『명원보감(溟源寶鑑)』이라 하였다. 동성으로 관향이 다른 동성이관(同姓異貫)은 경주김씨를 위시하여 84개 성씨이고, 동원이성(同源異姓)은 강릉왕씨 등 5개 성씨이다. 강릉을 관향으로 하고 있는 강릉김씨 문중에서 시조인 명...
-
1556년 강릉에 세워진 오봉서원(五峯書院)의 비문과 현판시, 중수기 등을 모아서 편찬한 책자. 1929년 기사년 12월 장현에 사는 최동길(崔東吉)이 오봉서원 고적 책자의 서언(序言)을 쓰면서 옛 고적을 잊지 않기 위해 책자를 낸다고 하였다. 오봉서원은 1556년 이천부사로 있던 함헌(咸軒)[1508~?]이 병으로 물러나 고향에서 머무를 때 최수장, 최운우 등이 강릉 구산에 서원...
-
조선시대의 효자.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사람들과 함께 들일을 하러 갈 때에는 어머니를 업고 가서 나무 밑에 앉혀 놓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자기 밥을 받아서 어머니에게 주고 자기는 일손을 쉬지 않았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이 점심을 나누어 먹자고 하면 사양하며 “내 점심은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또 남의 점심을 나누어 먹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머니...
-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의 신복사지에 있는 석불좌상.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사지 삼층 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상·중·하대석을 구비한 8각형의 대좌...
-
강원도 강릉시 남항진의 옛 절터인 한송사지(寒松寺址)에 있던 석불상. 한송사지 보살상 중 국보 제124호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제81호는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124호 보살상은 한송사지에 있었는데,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1966년 5월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국보 제124호...
-
1931년 강릉 지역의 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단체.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는 오죽헌을 수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설립되었으며, 당시 강릉 유림의 중심에 있던 박원동, 김병환 등이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신사임당(申師任堂) 등 성현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유교문화와 향토문화를 선양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1년 강릉군...
-
1389년부터 1895년까지의 강릉 읍격. 1389년(공양왕 원년), 강원 영동 지방의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강원 영동의 거진(巨鎭)의 의미로 강릉대도호부로 읍격을 정하였다. 조선 개국 후 군현제 개편 시에도 강릉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하였다. 특히 여말 선초의 전환기에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김광을(金光乙), 함전림(咸傳霖) 등의 출사와 고려 초에 왕씨 성을 사성받았던 세력...
-
고려 말 설치되어 조선 말에 폐지된 강릉 지역의 지방 관청. 1308년(충렬왕 34)에 설치되어 1896년(고종 33)에 강릉군으로 개편되었다. 『강릉부읍지(江陵府邑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 관련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명주(溟州), 명주목(溟州牧), 창해명주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강릉도(江陵道)가 차례로...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석탑. 강원도 강릉시 산계리 절터에 무너진 석탑재를 모아 놓은 3층 석탑 1기가 있다.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산계암은 강릉부에서 남쪽으로 80리 떨어진 산계령에 있다[山溪菴在府南八十里山溪嶺下]’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후에 간행된 『강원도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명주동·용강동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강릉부의 행정성(行政城). 읍성(邑城)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치소지(治所地)에 축조한 성곽으로 조선 전기에는 대략 120여 곳이 유지되었다. 상비군에 의한 충분한 조치가 어려웠던 당시 불시에 발생하는 외침으로부터 주민의 생명은 물론, 지방 관아의 각종 행정 자료와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읍성이 필요하였다....
-
김덕장(金德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 현재의 비와 정려각은 1978년 종중(宗中)과 강원도지사 박종성(朴鍾星)이 보내온 문화기금으로 건립되었다. 강릉시 동부시장1길 7[옥천동 332-2번지]에 있다. 전체 높이 187.2㎝, 비신 너비 51㎝, 비신 두께 21㎝ 비석으로 비좌, 비신 그리고 비두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의 비명은 '증가선대부호조참판...
-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의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 ‘강문(江門)’은 ‘강이 흐르는 입구’라는 뜻으로 ‘경포대를 품고 있는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강릉부 동북쪽 10리 되는 북일리면에 있으며, 경포호수의 동쪽 출구이다. 해안이 우뚝 솟은 봉우리는 견조도와 서로 마주 바라보고 섰으며, 읍을 호위하고 있는 관문으로 위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시호는 문정. 강인(姜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고, 아버지는 강주(姜籀)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사와 강원감사를 지냈기 때문에 강릉과 인연을 맺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될 정도로 재직 중에 청렴...
-
조선 말기의 효자.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호조좌랑 강인회(姜麟會)의 동생이다. 나이 열네 살 때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아버지가 나이 60세에 등창이 났는데 강봉회는 약을 구해 오고 형 강인회는 손수 약을 달여 드려 효과를 보았다. 상을 당하여 형은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곡(哭)하며...
-
조선 말기의 강릉 지역의 효자.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된 강봉회가 동생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독기를 빼내어 효과를 보았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강인회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1893년에 호조좌랑에 추증...
-
조선 말기의 효자. 고봉익(高鳳翼)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나자 배설물을 맛보며 치료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대신해서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약시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을 당했을 때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상이 끝난 다음에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성묘를 하였다. 시묘살이를 할 때에 호랑이가 와서 보호해 준 기이한 일이 있었다....
-
조선 중기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고욱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고욱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5년(명종 10)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2세에 남편이 병이 들어 급기야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며칠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도 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다. 고익지(高益智)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부영(府營) 및 어사(御使)에게 호소하여 포상을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부. 나이 19세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다하고 삼우제(三虞祭)가 끝나는 날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고제인(高濟寅) 처 전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여러 번 관부에 알려져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는 글이 내려졌다....
-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족, 혈연, 지연, 학연, 촌락, 동문수학, 나이(동갑) 등을 매개로 결성되는 결사체.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계라고 하면 ‘아줌마들’이 식당에서 벌이는 회식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계모임, 계가 깨졌다, 패가망신… 이런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목돈을 모으는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식이 계의...
-
조선 전기의 문신. 1399년(정종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414년(태종 14) 문과에 올라 좌랑(佐郞)에 제수(除授)되었다. 1427년(세종 9)에 제천현감(堤川縣監)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했다. 강릉곽씨의 입향시조이다. 1411년(태종 11)에 화재로 전소된 강릉향교를 중건(重建)하기 위해 강릉유림(江陵儒林) 66인과 함께 계(啓)를 올렸다....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개설되었던 5일장의 하나. 조선 후기 강릉 지역에는 여러 곳에 5일장이 개설되었는데 대표적인 5일장이 강릉장[2, 7개시], 연곡장[3, 8개시], 옥계장[4, 9개시], 주문진장[1, 6개시], 강동장[1, 6개시], 망상장[5, 10개시], 구산장[1, 6개시]이 있었다. 이들 장시는 모두 지역민들의 수요와 공급의 필요에 따라 교통중심지대에 개...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천로(天老). 구강(具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신충(具信忠)이고 아버지는 구이(具頤)이다.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현감 이의영(李宜榮)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성리학에 몰두하여 명망이 있었고 언론을 통하여 기묘사림파에 대한 신원의 길을 열었다. 1519년(중종 4)에 생원이 되고 1528년 식년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박사를 거쳐...
-
강릉단오제를 지내기 위하여 매년 음력 4월 보름과 5월 3일 두 차례 행하는 대관령국사성황의 행차 국사성황행차는 매년 강릉단오제를 지내기 위하여 두 차례 행하게 된다. 먼저, 매년 음력 4월 보름이면 강릉 사람들은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대관령에 가서 단오신인 국사성황신을 시내 여성황사에 모셔 온다. 강릉 사람들은 이 날을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이 혼인한...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집(聖集), 호는 죽암(竹岩). 참판인 오죽헌 권처균(權處均)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윤재(權允載)이고 아버지는 효자인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영조 23)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부사직 겸 춘추시강원문학(副司職 兼 春秋侍講院文學)을 지냈다. 1781년에 기후가 고르지 못하여 재앙이 생겼을 때에 정조(正祖)가 구언(求言)...
-
조선 후기의 효자. 오죽헌 권처균(權處均)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권윤재(權允載)이다. 권득형(權得衡)은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어버이를 사모하는 추모의 정이 늙어갈수록 더하였다. 어버이의 묘소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매월 초하룻날이면 더울 때나 추울 때나 항상 찾아가 성묘를 하였다. 어느 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어 근처 마을에서 하...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字)는 치오(稚五). 세마(洗馬)인 권련(權璉)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권상익(權尙益), 할아버지는 권시창(權始昌) 그리고 아버지는 권두재(權斗載)이다. 1727년(영조 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장령을 지냈다. 벼슬을 지낸 후 서울에 가지 않고 20여 년이나 경호(鏡湖)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 어사(御史) 이현중(李顯重)이 포상을 위하여 계(啓)...
-
조선 말기의 열녀.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고, 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렸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베를 짜서 받은 품삯으로 제수를 마련해 상을 잘 치렀다. 남편인 권억영은 스승을 따라 유학하고 있다가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을 것을 결심했으나 늙으신...
-
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안동. 예판전교시사(禮判典敎寺事) 권숭(權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권륜(權綸)이고 아버지는 참봉인 권송(權悚)이며,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산보(沈山甫)의 딸이다. 문장에 능숙하여 1519년에 사마시에 응시하였는데 회위(會圍) 김모재(金慕齋)가 그의 글을 보고 “금년 장원은 반드시 자네에게 돌아갈 것이네.”라...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權幸)의 19대 손으로 안동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대사성공(大司成公) 후손의 입강시조(入江始祖)이다. 고조인 권시중(權時中)은 문과에 장원하여 서주목사(瑞州牧使), 증조인 권업(權業)은 문과급제하여 선교랑(宣敎郞), 조부인 권심(權深)은 승훈랑(承訓郞)과 강릉대도호부판관을 각각 역임하였다. 1477년(성종 8)에 성균진사시에...
-
조선시대 말기의 효부(孝婦).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셨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권종열(權鍾烈)의 처 김씨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시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22세 때 남편이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남편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으나, 남편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최씨는 시부모께 영결을 고하고 조용히 남편을 따라 죽었다. 권진수(權震洙)의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안동. 자는 사중(士中), 호는 오죽헌(烏竹軒). 감사인 권륜(權綸)의 증손이고 세마(洗馬)인 권연(權璉)의 손자이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종제(姨從弟)이다. 정시(庭試)에 수석으로 올랐으나 허균이 권처균은 율곡 이이의 무리라고 하면서 조정에 글을 올려 관로(官路)를 저지하였다. 권처균은 세상의 도가 어지러움을 개탄하면서 과거를 단념하고 벼슬을 구...
-
조선 중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에 적을 피해 산골짜기로 들어가다가 적을 만났다. 적이 김씨를 욕보이려고 하자 김씨는 칼을 빼앗아 자살하려고 하였다. 김씨는 있는 힘을 다해 대항하며 끝내 굴하지 않았다. 적은 화를 내며 김씨를 베고 가버렸다. 윗동서인 권처평의 처 최씨 또한 정조를 지켰다....
-
조선 말기의 효·열부.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겼다. 남편이 죽자 늘 칼을 품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겨우 만류하여 보호하였다. 스스로 죄인이라 하면서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해를 보지 않았으며, 흰 옷과 변변찮은 음식을 입고 먹으며 일생을 보냈다. 남편의 기일에는 종들에게 시키지 않고 제물을 손수 정성껏 마련하였으며, 제사를 마치고는 초상 때처럼...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1리와 금산2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릉김씨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금산리(金山里)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조선 중종 대 김광헌(金光軒)이 세운 마을이라 하여 건금리(建金里)[갱금]라 하던 것이 1916년 장안동(長安洞), 제동(堤洞), 구동(鷗洞), 성하(城下)를 합하여 금산리라 했다. 금산리에는 강릉 최씨 평장...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청원정(淸遠亭). 증조부는 금진고(琴進高), 조부는 금조(琴操), 아버지는 금극해(琴克諧), 아들은 금이영(琴以詠)이다. 외조부는 이인실(李仁實)이며 박천석(朴天錫)의 사위이다.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대사성(大司成) 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쳤다. 1419년(세종 1) 참의(參議)로서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
조선 후기의 선비. 지봉(芝峰) 김몽호(金夢虎)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준엄하고 기풍과 도량이 뛰어 났으며, 기강을 바로잡아 세우며 엄숙단정 하였다. 강릉부사 소두산(蘇斗山)이 벼슬이 갈려 돌아갈 때 대관령을 넘으면서 “내가 비록 너희 고을을 떠나지만 김격(金格), 김니(金柅) 형제는 정말로 두려워하였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
조선 중기의 효자.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 첨지(僉知)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호는 동화(東華).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 사람이다. 김경시(金景時)는 김경황(金景滉)의 아우로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김경황과 함께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교수(敎授)를 지냈다. 강릉대도호부사...
-
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회생시켰으나 남편은 사흘을 더 살다 죽었다. 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죽고 싶으나 시부모가 계시고 또 뱃속에 아이가 들었으니 한때의 슬픔을 참고 견디어 뒤에 바른 길로 가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아들을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라”고 가르쳤다. 묘막에서 삼년상을...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김담(金譚), 동생 김경시(金景時), 아들 김한(金垾) 등 3세에 걸쳐 4명의 효자를 배출한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사람이다. 자는 자호(子鎬), 호는 둔암(遯菴).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부인은 정해(鄭瀣)의 딸 숙부인 연일정씨이다. 참봉(參奉), 첨추(僉樞)를...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자는 자용(子容).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효자공 금산파(金山派) 파조이다. 아버지는 김당(金譡)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대연(崔大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광헌(金光軒)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참봉 최읍(崔浥)의 딸과 강릉함씨 함비용(咸備容)의 딸이다. 함비용의 딸은 오봉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함헌(咸軒)의 증손녀이다. 숙부 김담(金譚),...
-
효자정려를 받은 김경휘(金景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김경휘[1553~1613]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났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위급하자 김경휘는 울부짖으며 하늘에 고한 뒤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리자 아버지가 7일을 더 살았다. 돌아가신 뒤에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 때 부사 조작(曺綽)...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신라 종실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 김상기(金上琦)의 아들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인존(金仁存)의 동생이다. 1104년(숙종 9)에 밀진사(密進使)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109년(예종 4)에는 좌승선지이부사(左承宣知吏部事)를 지냈다. 1112년에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1117년(예종 12)에는 대사성...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광백의 아버지는 김기(金玘)이고, 할아버지는 김용려(金用礪), 증조는 김보(金黼)이다. 처부는 군수를 지낸 최운상(崔雲祥)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 비인현감(比仁縣監) 재직 시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어 향리들의 작폐가 심해지자 사헌부에 체직(遞職)을 요청하였...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이며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김추(金錘)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1392년(태조 1)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 공을 세워 찬화공신(贊化功臣)으로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임(子任), 호는 이설당(梨雪堂). 김세훈(金世勳)의 아들이고, 애일당(愛日堂) 김광철(金光轍)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덕이 높고 도량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이기(李芑)나 윤원형(尹元衡)이 세력을 떨치며 권력을 농단할 때에도 자신의 뜻을 전혀...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세훈(金世勳)이다. 안성이씨 이석진(李碩進)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양(金讓)은 직장(直長), 둘째 김인(金訒)은 찰방(察訪), 셋째 김근(金謹) 주부(主簿), 넷째 김겸(金謙)은 별좌(別坐)였고, 사위는 심운(沈雲)과 참판을 지낸 허엽(許曄)이다. 1487년(성종...
-
조선시대의 효부·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고 그 피를 입에 넣어 사흘을 회생시켰다. 남편이 마침내 죽자 자살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사지내는 날 남편의 시신과 함께 구덩이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시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죽으면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집안사람들이 온갖 말로 타일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낙범(金洛範)...
-
조선 중기의 효자. 김덕장(金德璋)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으로 1550년(명종 5년)에 강릉에서 태어났다. 무공랑행평강훈도(務功郞行平康訓導)였던 김덕장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석에 들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아버지가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끊어 생피를 올리기도 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3년...
-
조선 말기의 효자. 김진(金璡)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김원경(金元璟)의 양자가 되었으며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생부(生父)가 병이 나서 오랫동안 고생하자 다른 자제나 종이 있었는데도 대소변을 손수 받아 치웠고 때가 묻은 빨래도 손수 하였다. 의원에게 물어 정성껏 약을 지어 올렸으며, 맛난 음식을 거르지 않고 마련하여 봉양하였다. 상을 당하자 가례를 따라 상례와 제례를 행...
-
조선 말기의 선비.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장가로서 출사하지 않고 고을 사람들과 한평생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재주가 출중하고 문장이 뛰어나 유궁(儒宮)에 출입하였으며, 또 고인(古人)의 기상이 있어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다. 집은 동문 밖에서 몇 리 떨어져 있었으며, 뜰 가에 은행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고을 사람들과 함께 즐겼다. 고을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논할...
-
조선 말기의 효자. 조선 전기의 강릉 출신 문신인 김몽호(金夢虎)의 후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님을 섬기며 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김매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뛰어나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였다....
-
조선 말기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의복과 음식을 화려하게 하지 않았다. 아들 김석진(金錫晉)도 부친의 병에 배설물을 맛보아 가며 간호하였고, 어머니의 병에도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각기 3년씩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석진의 후처인 최씨도 지...
-
조선 말기의 열녀.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이 병이 들어 병세가 점차 위급해지자 김씨는 매일 밤 목욕하고 하늘에 빌었으며, 운명할 무렵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주었으나 남편은 결국 죽고 말았다. 밤낮으로 울며 예를 다하여 상을 마치고는 스스로가 죄인이라 자처하면서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고 문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병이 나 위급한데도 약 먹기를 거부하여 끝내...
-
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가묘(家廟)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신주를 구해냈다. 김병구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신주를 구해낸 사실을 사림에서 알려 호역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김수호(金壽浩), 형은 김병렴(金秉濂)이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약을 구하려고 먼 곳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산삼을 얻었으며, 꿩이 품으로 날아들어 아버지께 잡아 드렸다. 김병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김수호(金壽浩)의 아들이다. 동생은 효행으로 감찰에 증직되었던 김병락(金秉洛)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상을 치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김병렴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평소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시어머니와 함께 자다가 시어머니가 변소에 간다기에 부축하여 문을 나섰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시어머니를 잡아가려 하였다. 최씨는 한 손으로 시어머니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호랑이를 내리쳤다. 호랑이는 몇 발자국을 끌고 가다 버리고 달아났다. 최씨는 시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정성껏 치료하였으나 이튿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
조선시대의 효자.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얼마 동안 더 살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냇물을 건너 성묘를 하였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이 묘막을 지어 주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호랑이가 와서 김부경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김부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며, 첨의평리(僉義評理) 김여흥(金予興)의 아들이다. 김상기의 아들은 문신이자 학자인 김인존(金仁存)이다. 1070년(문종 24) 좌우보궐(左右補闕)을 거쳐, 1084년(선종 1)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한 뒤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이듬해 예부시랑(禮部侍郞) 최사문(崔思文)...
-
조선 후기 강릉 지역의 장수 인물. 1764(영조 40년) 12월 그믐날 오시(午時)에 9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다섯 시간이 모자라는 100세를 살아 자손들이 100세 할머니라고 불렀다....
-
조선 말기의 효자. 생원인 김계(金啓)의 손자이다.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회갑을 맞이하여 머리를 풀고 3년 동안 상을 입었다. 눈비를 가리지 않고 아침과 저녁으로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였다....
-
조선 말기의 효자. 부모가 병에 걸려 매우 위급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치료하였다.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김성일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숙(正淑) 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16년 증광시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었을 때 폐모(廢毋)를 주장하던 이조좌랑 황덕부(黃德符) 등을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1...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건보(健甫). 김준현(金峻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호변(金虎變)이고 아버지는 김홍적(金弘績)이다. 1658년(효종 9) 경릉참봉이 되고, 166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김천찰방·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66년(현종 7)에는 홍천현감을 지냈다. 경직(京職)에 돌아와서는 1667년 정언을, 1670년 지평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
조선 말기의 선비.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용모 또한 준수하고 맑았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갖고 품행을 닦는데 힘썼다. 15세 때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알현하였는데, 윤증은 그의 기특함을 한번 보고는 “이 사람은 나이 20이 되지 않아 성명천도(性命天道)의 근원을 꿰뚫을 것이니 우리 무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리학이 앞으로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더욱...
-
조선 말기의 효자.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에 대한 음식 공양과 아침·저녁 문안을 한결같이 하였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편찮으시면 하늘에 축원하기를 자기가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여 여러 번 기이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어버이 상을 다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습(金習)이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었고, 머리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3년상을 무사히 끝내고 제사를 마친 최씨는 다음날 앓지도 않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습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편 김시린(金始麟)이 애통한 나머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사흘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 집안사람들이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상을 마친 뒤 남편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김시린 처 최씨에 대한...
-
조선 중기의 효자. 어머니가 염병을 앓다가 오랫동안 기절해 있자,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그때 김시민은 동생 김시맹(金時孟)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의 입술에 생기가 돌더니 정신을 차렸다. 또 26세 때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목욕재계하고 하늘...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무반 계통의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이고, 어머니는 선사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지지질(生知之質)이 있었다 할 만...
-
조선시대의 열녀. 어려서부터 가정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며, 시집을 가서는 남편 김시중(金始重)과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인 김시중이 기랑(騎郞)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오는 중 양근현(楊根縣)에서 갑자기 병이 나 위독하게 되었다. 마침 김시중의 종이 밤새 달려와 병세를 알리자 팔순인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시어머니를 위로한 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
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는 김여계(金汝契)이며 어머니는 김겸(金謙)의 딸이다. 아우는 김양신(金養身), 김양정(金養正)이며 아내는 최충남(崔忠男)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올라 첨정(僉正)·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고, 집현전 창정(集賢殿 彰幀)을 개수(改修)하였다. 김양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언진(金彦鎭)이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어린 자식들과 영원히 이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김언진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김언진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김연범(金演範)은 효자 김의진(金義鎭)의 현손이고,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의 후손이다. 증광초시(增廣初試)에 올랐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 여섯 살 때에 참새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짓기를 “넓은 들 곳곳에 새 쫓는 소리, 천년을 한결같이 신농(神...
-
조선 중기의 문신. 1507년(중종 2) 강릉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강릉부사(江陵府使)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김연수가 강릉부사(江陵府使) 직을 그만 둔 것은 당시 도사(都事)에게 욕을 받자 이에 굽히지 않고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조에서 그를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임명하였다. 충청도별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졸하였다. 김연수에 대한 기사는 『증수...
-
조선시대의 열녀. 20세에 남편 김연조(金演祚)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집안 사람들이 제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먹지 않고 슬퍼하다가 결국 죽었다. 효행이 관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광헌(金光軒)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현감 최세번(崔世蕃)의 딸이다. 김열(金說)의 아버지 김광헌은 1519년(중종 14)에 진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고 난 후에 과거에 뜻을 버렸다. 김열(金說) 또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오직 글 읽기에만 힘썼다. 아무리 춥고 더...
-
조선시대의 효자. 강릉 정동(丁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경포동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이웃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며, 행실이 바르고 절도가 있어 친척과도 화목하였다. 나이 6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사림에서 효행을 부영(府營)에 알려 표창을 하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운성(金雲成)은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영남 지방에 갔다가 죽었다. 당시 부음을 듣고 시신을 거두려 곧 달려가려 했으나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애들이 있어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침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하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남편이 죽은 곳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남편의 유골을 거두어 짊어지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
조선 전기 강릉 출신의 문신. 김윤(金贇)은 1392년(태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풍저 부사(豊儲副使)·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판교동현사(判喬桐縣事)를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1421년(세종 3)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지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0세 때 남편 김윤수(金潤洙)가 중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으나 남편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문을 닫아걸고 빗장에다 목을 매었으나,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죽지 못했다. 남편의 무덤에 가서 슬피울다 근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나무꾼이 발견하고 구해 주었다. 두 차례에 걸쳐 자결을 시도...
-
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부친은 김여명(金汝明)이고, 모친은 김지(金輊)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6년(성종 7)에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사록(司祿), 전적(典籍), 주부(主簿), 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할 때, 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묘소까지 왕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겨울에 폭설이 내려 묘소로 가는 길이 막혔다. 이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눈을 헤쳐 길을 내 주었다고 한다. 김의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처후(處厚), 호는 문성(文成), 초명은 김연(金緣).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9세손으로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 김상기(金上琦)의 아들이다. 김인존의 아들은 김영석(金永錫), 김영윤(金永胤), 김영관(金永寬)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된 후 선종·헌종·숙종의 삼대에 걸쳐 벼슬을...
-
조선 중기의 효자. 임진왜란 때 늙은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하던 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뒤쫓아 오자 김인호는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달아나다 결국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는데, 효행에 감동한 왜적은 김인호의 어머니를 그대로 살려 두고 갔다. 김인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지(金輊)이고 어머니는 전공총랑을 역임한 고첨(高瞻)의 딸이다. 1411년(태종 11)에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414년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춘추관에 기용되었다. 1421년(세종 3)에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로 있다가 춘추관의 관직을 겸대(兼帶)하고 1422년에 사헌부감찰이 되어 겨울에 내간(內艱)을 당하였다. 1425년에 다시 감찰에 제...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지(金輊)이며 어머니는 전공총랑을 역임한 고첨(高瞻)의 딸이다. 형은 김자갱(金子䃘)이며 아우는 김자현(金子鉉)이다. 1444년(세종 26)에 식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4세 때 남편 김작(金焯)이 중병에 걸리자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지만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생각한 바가 있어 슬픔을 참고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그러다 남편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 졸곡(卒哭)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작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
조선시대의 열녀. 중병에 걸린 남편 김재경(金在卿)을 8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늙은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낮에는 방아를 찧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여 남편과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해 목숨만 겨우 이어갈 형편이었지만 조금도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재경 처 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
조선 말기의 효자. 어머니가 병에 걸렸을 때 복숭아를 몹시 먹고 싶어했다. 때는 늦가을이라 복숭아를 구할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김재숙은 낙엽만 남은 복숭아나무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낙엽 가운데서 몇 개의 복숭아 열매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즉시 따다가 어머니에게 먹이자 병세가 금세 호전되었다. 김재숙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
조선 말기의 열녀. 1894년(고종 31) 남편 김재숙(金在淑)이 중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다시 살아나는 듯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재숙 처 전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야기가 조정에 알려져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고 남편과 함께 정...
-
조선시대의 열녀. 하루는 남편 김종석(金宗碩)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나무와 돌에 치여 크게 다쳤다. 남편이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피가 남편의 양쪽 폐에 들어가 대소변이 막혀 있었다. 그러자 밤에 자기를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남편의 생식기를 입으로 빨아 소변을 통하게 하였다. 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남편을 소생시켰다....
-
조선 후기의 문신. 김시습(金時習)의 후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제한(金濟漢)의 아들이다. 1814년(순조 14) 식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참의(參議)로 승진되었다. 성품이 순후하고 정직하였으며, 문명(文名)을 세상에 떨쳐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따랐다. 김종호(金宗虎)의 증조할아버지인 신와(愼窩) 김수붕(金壽鵬)이...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생원(生員) 김효안(金孝安)의 손자이며 참봉(參奉) 김광(金光)의 아들이다. 1071년(문종 25) 명주에서 태어났으며 1126년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의 반란 때 궁궐에서 불에 타 죽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 영광군(靈光郡)의 군수(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안무사(按撫使) 최위...
-
일제 강점기 강릉군수를 지낸 일본인 행정가. 1926년과 1928년에도 강릉에는 두 명의 일본인 군수가 있었다. 그러나 1931년에 강릉군수를 역임한 다키자와 마코토[瀧澤誠]의 행적은 남달랐는데 성현의 발자취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죽헌 보호활동과 율곡, 신사임당 선양사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강릉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향교 및 지역문화를 보호하였고, 향토지 발간활동에도 노력하였...
-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에서 강릉 단오제의 주신격인 국사성황을 모시는 제의. 대관령 국사성황사에서 제사를 마치고 신장부와 무당 등이 인근 산정에 올라가 국사성황신이 강림한 단풍나무 신목을 모시는 의례이다. 신장부가 신목을 잡으면 무당과 악사들이 서낭을 모시기 위한 성황굿 한판을 벌인 뒤 신목을 모시고 성황사로 내려온다. 『증수 임영지(增修 臨瀛誌)』에 “...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사의 옛터. 등명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풍수지리에서 입각하여 볼 때 사찰이 강릉대도호부 중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삼경(三更)에 산에 올라 붉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하여 붙여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대관(大觀), 호는 강호(江湖)·사지(四止). 부친은 박시행(朴始行)이고, 모친은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진사 남과(南薖)의 딸이다. 26세 때인 1495년(연산군 1)에 생원이 되었으나, 수신(修身)과 독서에만 힘쓸 뿐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1516년(중종 11) 가을 금강산에 유람 왔던 충암(冲庵) 김정(金淨)이 박공달(朴公達)을 만나보고...
-
조선 후기의 효자·충신. 자는 학노(學老), 호는 경운(畊雲). 정재공(定齋公) 박계립(朴啓立)의 후손이다. 1788년(정조 12)에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기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워 효자로 칭송받았다. 신체가 장대하여 용력(勇力)이 매우 뛰어나 1829년(순조 29) 입번시(入番時) 대궐에 불이 나자 사나운 불길을 진화하는 등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더욱 공경하며 모셨다. 관찰사가 표창을 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관가에서 효열 완문을 발급하였다. 박구호 처 장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삼가당(三可堂) 박수량(朴遂良)의 후손이다.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 배설물을 맛보아가며 치료하였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7일을 더 살게 하였다.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사림에서 부영(府營)과 예조에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아픈 시부모를 위해 새와 물고기를 구해 시부모를 정성껏 보살폈다. 또한 남편 박문오(朴文五)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1년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았으며, 어린 자식들을 훌륭히 길렀다. 박문오 처 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영(府營)에...
-
조선 후기의 효자. 아버지가 병을 앓을 때 대변을 맛보며 간호를 하였고, 생선과 꿩을 얻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죽으로 연명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1865년(고종 2)에 강릉부와 순찰사가 “생선과 꿩을 구한 것은 왕상(王祥)이 붕어를 구해 효도한 것에 부럽지 않으며, 죽을 먹으며 몸소 여묘살이 한 것은 맹순(孟筍)의 효행과 비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
조선시대 열녀. 나이 18세 때 남편 박병은(朴炳殷)이 위독하자 손가락 세 개를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7일을 더 살다 죽었다. 남편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모님을 두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을 끝까지 정성껏 봉양하여 마을에서 효열이라고 칭송하였다. 박병은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박수량(朴遂良)의 후손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켰으며, 어머니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흙덩이를 던져 오리를 잡아 드렸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우물까지 거리가 멀어 여름철 홍수 때나 겨울철 폭설 때에 불편이 많았다. 그...
-
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화적(火賊) 떼 수십 명이 집 안에 들어와 남편을 죽이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화적들이 버린 큰 종이로 얼굴을 덮어쓰고 화적들 틈에 섞여 함께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가위로 화적들의 옷깃을 몰래 잘라 놓았다. 화적들이 흩어진 후 관가에 가서 전후의 실상을 낱낱이 알려 화적들의 만행...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518년(중종 13) 7월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거쳐 사섬시주부(司...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 부터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가서는 시부모님을 더욱 정성껏 공경하였다. 박시언 처 김씨의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알려져 암행어사와 관찰사가 포상을 하였으며,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박중신(朴中信)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 남매(南邁)의 딸이다. 형으로는 박시원(朴始元), 박시창(朴始昌), 박시형(朴始亨)이 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추장시(秋場試)에 올라 벼슬이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 젊었을 때 강릉의 기생 옥반주(玉盤珠)와 서로 사랑하였다. 감사(監司)가 강릉에 머물 때...
-
조선 후기의 선비. 아버지는 학생(學生) 박상의(朴尙義)이다. 박시혁(朴時赫)[1747~?]은 순조 4년(1804) 식년생원에 1등으로 입격하였다. 합격 당시 나이는 57세였으며 직역은 유학(幼學)이었다. 박시혁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박중신(朴中信)이고, 어머니는 김지(金祉)의 딸이다. 박시원(朴始元), 박시창(朴始昌)이 형이고 박시형(朴始亨)이 동생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였고, 1459년에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호조좌랑, 홍문관 박사·교리, 동부승지, 안동부사, 예문관직제학을 역임했고 후에 후원공신(厚原功臣)에 올...
-
조선 중기의 효자. 강릉 12향현(鄕賢) 중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박수량의 조카 선무랑(宣務郞) 박구량(朴久良)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신로(崔信老)의 딸이다. 1563년(명종 18)에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있다가 영평군수(永平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이 병이 나서 산 꿩을 먹고 싶어 하였다. 하늘에 꿩을 구할 수 있기를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 꿩이 닭장에 들어와서 이를 잡아 주었다. 남편의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주고 다시 또 한 손가락을 찢어 연달아 그 피를 입에 넣어 소생시켜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열행이 알려져 강릉부사와 어사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할아버지는 박문규(朴文圭)이고 아버지는 박관(朴琯)이다. 1301년(충렬왕 2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주목사록겸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를 거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는 예문관검열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어서는 기강을 바로 잡은 공으로 집의...
-
강릉시 시동 출신의 근대 문인·유학자. 박원동(朴元東)의 자는 덕영(德英), 호는 시호(詩湖)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힘써 그 학문이 향촌에 으뜸이었다. 벼슬은 종사랑으로 안변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으며 귀향하여 면장을 지냈다. 또한 풍호정을 짓고 시풍을 즐겼다. 1933년 7월부터 2년간 강릉향교 직원(直員)으로 재직하였다. 시호 박원동 선생은 강릉 유...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려 하루를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을 먹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고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증석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박연(朴演)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좌랑(정5품)을 거쳐 서운관 부정(종3품), 예문관제학과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공민왕이 최만생·홍륜 등에게 살해당하고 정몽주·김구용 등이 유배되었을 때 박지계도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복권된 뒤 정몽주의 천거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
-
강원도 강릉 지역에 남아 있는 절터. 강릉 지역의 사지에는 굴산사지(掘山寺址), 보현사(普賢寺)[지장선원], 신복사지(神福寺址), 방현사지(坊縣寺址), 한송사지(寒松寺址)[문수사], 등명사지(燈明寺址), 안국사지(安國寺址) 등이 있고, 이들 사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있다. 그밖에 특별히 지정된 문화재가 없는 사지들도 다수 있다. 사찰이나 사지는 여러 명...
-
강릉시 노암동에 있는 김담과 그의 아들, 손자까지 삼대에 걸친 4명의 정려비. 김담(金譚)을 비롯하여 아들인 김경황(金景滉)과 김경시(金景時) 그리고 김경황의 아들인 김한(金垾)의 정려를 말한다. 3대 즉 김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에 걸쳐 4명의 효자가 나온 데에 기인한다. 받침돌 위에 높이 82~83㎝, 너비 30.5~33.5 ㎝, 두께가 8~8.5 정...
-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의 증손으로,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 한송정(寒松亭)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다구(茶具). ‘석조(石竈)’는 차를 달이던 도구로서 돌로 만든 아궁이라는 뜻이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한송정에 석조(石竈)와 석지(石池), 석정(石井)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신라의 선인(仙人) 영랑(永郞)이 차를 달이던 도구들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현재 한송정에는 돌우물과...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신응명(辛應命)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7세 때 어머니의 머리에 종기가 나자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또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산에 들어가 사흘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16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혈기가 막히는 등 위독하자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으려 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신신기(辛申耆)의 손자이다. 평소 품성이 곧고 행동에 위엄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이가 많고 식성이 까다로워 날마다 맛 좋은 탁주를 마시고 신선한 국만 찾았는데, 신건동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갖추어 올려 드렸다. 비록 집안 살림이 가난해서 여기저기에서 빌려 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서 10여 년간을 계속하였다. 또 아버지...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홍문관 부제학을 지닌 신응시(辛應時)의 조카이고, 평사(評事) 신경연(辛慶衍)의 동생이다. 신경원(辛慶遠)은 1596년(선조 29)에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노닐며 시(詩)와 술을 즐겼다. 산천을 즐기던 신경원이 하루는 영남에 갔을 때, 그 곳 방백이 낙...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 자는 용석(用錫), 아호는 명호(冥湖). 신윤형(辛尹衡)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신보상(辛輔商)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신응시(辛應時)로,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어머니는 정기(丁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예문관 등에서 관직 생활을 한 뒤 1591년 병조 좌랑으로 진주사(...
-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영월. 아버지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신응명(辛應命)이다. 당종(堂從)인 아호공(丫湖公) 신경진(辛慶晋)이 강릉에 부임해 올 때 같이 따라와 거주하였다. 일찍이 사마시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산수를 찾아 유람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
조선 중기의 열녀. 본관은 평산이다. 아버지는 이사온(李思溫)이고 어머니는 최응현(崔應賢)의 딸이다. 이씨의 성품에 대해 이이(李珥)는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에서 “訥於言而敏於行 愼於事而果於善(눌어언이민어행 신어사이과어선: 말에는 서툴어도 행동에는 민활했으며 모든 것에 신중히 하되 착한 일에는 과단성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씨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
조선시대의 효자. 평생 어버이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자 신붕은 거적을 깔고 밖에서 잤다. 임진왜란 때 신붕이 어머니를 업고 난을 피해 가다 왜적에게 잡혔다. 그 때 왜적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신붕이 어머니를 안고 애걸하였다. 효성에 감동한 왜적이 이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렸다. 그 후 어머니께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영월. 홍문관 박사 신응명(辛應命)의 후손이다. 재주와 인품이 뛰어나고 효우(孝友)를 함께 갖추었다. 또한 총명하여 나이 13세에 시문(詩文)을 지었고 서체가 뛰어났다. 1804년(순조 4)에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공부할 때 화재가 일어나자 여러 유생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흩어졌으나, 신석로 홀로 동요하지 않고 먼저 묘우(廟宇)에 들어가 위판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평산. 주부(主簿) 신성하(辛聖河)의 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며칠을 더 살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장끼가 묘막에 날아들고 황작(黃雀)이 보금자리를 만드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또 산불이 났을 때 묘소 주위를 돌며 울부짖으니 불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영월. 호는 북천(北川).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와 의주진관(義州鎭管) 옥강만호(玉江萬戶)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올랐으나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그리고는 재산을 모아 갑부가 되었다. 1688년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호해정(湖海亭)에서 강론할 때 김창흡에게 별도로 집 한 채를 지어 주고...
-
조선시대의 열녀.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 신세린(辛世麟)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사람들이 구해 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죽으려고 했지만 구조되어 죽지 못했다. 평생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날마다 피죽을 조금씩 먹을 뿐이었다. 봄가을로 남편의 새 옷을 지어 놓고 불살랐다고 한다....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무절(武節).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의 아들이다. 신유정(辛有定)은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고 용맹이 뛰어났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의 휘하에서 남해의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 첨절제사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자가 된...
-
조선 후기의 선비. 조선 후기의 무신인 신성하(辛聖河)의 손자이다. 1688년 여름 신성하(辛聖河)가 호해정 옛터에 초옥 4칸을 지어,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이곳에서 도학을 강하고 역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고원명(高遠明), 신석동(辛碩東), 김응경(金應鏡) 등이 있었고, 신정복(辛正復)은 아직 어린 학동이었으나 역시 김창흡의 문인이 되었다...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에 위치한 사지(寺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사찰조」에 ‘안곡사재성산면안곡동 년대미상 당우소실 단석탑고오척삼촌폭삼척 전면각불상석 비고이척 지장존석조잔류 금폐(安谷寺在城山面安谷洞 年代未詳 堂宇燒失 但石塔高五尺三寸幅三尺 全面刻佛像石 碑高二尺 地藏尊石造殘留 今廢)’라는 기록과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의 안국사지에 있는 석불대좌. 안국사지 석불대좌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 774에 위치한 안국사지 내에 있는 안국사지 5층석탑의 좌측 부근에 인접해 있다. 불상이 올려져 있던 대좌로서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남북이 긴 장방형의 개석(180×127㎝)은 하부에 2단의 몰딩이 있고, 면석(131×69㎝)은 사면에 조식되어 있다...
-
조선시대 강릉의 효자. 80세 때 집안사람 모두가 염병에 걸렸다. 그때 그의 아버지 안운(安雲)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字)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시호는 문간(文簡).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안축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났으며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1382년(우왕 8)에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이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나 2년 뒤인 1394년(태조 3)에 세상을 떠났다. 13...
-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청주.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에 문명을 떨쳤던 양사준(楊士俊)이 형, 양사기(楊士奇)가 아우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함흥부윤(咸興府尹)...
-
조선 후기의 열녀. 예를 다해 부모를 섬겼으며, 시부모를 봉양하는데도 예를 다하였다. 또한 남편 어사충(魚史忠)에게는 순종하고 정숙하였다. 남편이 병이 나자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큰 아이에게는 밥을 먹이고 젖먹이를 재운 후 남편을 따라 죽었다. 어사충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咸從). 증승정원주서 어사상(魚史商)의 아들이며, 경종의 장인인 어유구(魚有龜)의 재종제이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7년부터 정언·수찬·지평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경종 즉위 후에 지평·헌납·장령·사간 등 양사의 벼슬에 있을 때 노론·소론의 분란에서...
-
조선시대의 열녀. 집이 가난하여 광릉(廣陵)에서 강릉도호부 봉평(蓬坪)으로 이사를 왔다. 이씨는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고, 남편 어주현(魚周顯)이 죽자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옷을 팔아 장례를 치렀다. 또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얼마 안 되는 토지를 팔아서 시아버지를 광릉에 있는 선영(先塋)에다 모셨다. 그 후부터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26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
조선시대의 효자. 효도가 극진하여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 예를 다하였다. 백발이 되도록 경학(經學)을 공부했으나 과거에는 한 번도 급제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특별히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조선 중기 강릉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함양. 자는 여효(汝孝). 1648년(인조 26)에 생원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 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재령군수(載寧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철원부사(鐵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강릉부사...
-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강원도 강릉시의 역사. 강릉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 유적지를 통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사 유적지는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송림리, 사천면 가둔리·판교리, 강동면 안인리·하시동리, 강릉시 토성지와 지변동·교동·안현동, 옥계면 금진리 등 대부분 바닷가 호수변이나 하천 유역의 낮은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었다. 1992년...
-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셔올 때 횃불로 신맞이를 하는 놀이와 의식. 대관령국사성황신은 강릉 단오제의 주신이다. 강릉 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신주빚기로 시작하여 4월 15일 대관령에 있는 국사성황신을 강릉으로 모셔오는 영신제를 지낸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기록에 의하면 신목을 베어 모신 대관령국사성황신의 행차가 제민원성황...
-
강릉 지역에 있었던 예국시대의 고대 성곽. 예국고성(濊國古城)은 강릉이 동예의 중심이었던 고대에 축조되었던 성곽으로 추정하며 명칭은 고대 부족국가의 명칭 ‘예(濊)’ 또는 ‘동예(東濊)’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강릉(江陵)은 본시 예(濊)의 고도(古都)로 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하였으며 고구려의 하서량(何西良)이었다가 후에 신라에...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초명(初名)은 여주(汝舟), 본성(本姓)은 김씨.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후손으로 왕씨는 사성(賜姓)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忠肅王) 초에 규정(糾正)을 지냈다. 1321년(충숙왕 8) 좌사보(左司補)로 있을 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이인길(李仁吉)의 장인 최득화(崔得和)를 수주(隨州)의 수령으로 임명하려...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현종(顯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을 지냈고, 이어 우승선 급사중(右承宣 給事中)을 거쳐 지주사예빈경(知奏事禮賓卿)을 지냈다. 1044년(정종 10)에 동북로 병마사참지정사(東北路 兵馬使參知政事) 김영기(金令起)와 함께 장주(長州)·정주(定州) 및 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았다. 1049년(문종 3)에 수사공 상주국(守司空...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고려 밀직사(密直使) 유계조(柳繼祖)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1392년 이조전서(吏曹典書)로 있을 때, 조선왕조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이듬해 중추원 부사가 되어 강릉도관찰출척사를 겸임하였다....
-
조선시대의 충노(忠奴). 박영수(朴英秀)의 종이었으며 타고난 성품이 충직하고 공손하였다. 상전인 박영수의 상사(喪事) 때에는 6년을 하루같이 죽만 먹고 지냈다. 유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가 쌀과 미역으로 포상하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유학(幼學) 유운흡(柳雲翕)이고 어머니는 겸사복(兼司僕) 한덕룡(韓德龍)의 딸이다. 유원명(柳遠鳴)은 1789년(정조 13)에 진사(進士)에 올랐고, 1794년(정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822년(순조 22)에 강릉에 부임되어 왔다가 1824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갔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승지 유태명(柳泰明)의 손자이며, 유무(柳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한중희(韓重熙)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생원이 되고 현감을 지낸 뒤, 176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5년에 정언(正言)·사서(司書)·수찬·교리를 역임하고 1775년(영조 51) 집의(執義)로서 영남어사(嶺南御史)가 되었다. 1776년 왕세손의 응제...
-
조선시대의 효부. 시집 온 지 3년 만에 남편 유진구(兪鎭九)가 병이 났다.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남편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상제(喪祭)와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였다. 거상 기간에는 머리를 빗거나 세수를 하지 않아 얼굴에 검정을 칠한 것 같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퍼하였다. 하루는 산불이 남편의 묘에까지 번지려 하였는데, 하늘에 기도하니 잠시 후 비가...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사간원 정언을 지낸 유성삼(柳星三)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690년 사헌부지평에 올랐고, 같은 해에 부제학 이담명(李聃命)에 의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이 올랐다. 이듬해에 홍문관교리가 되었고, 이후 수찬·교리·장령·부교리 등을 거쳐 참의에 이르렀다. 1707년...
-
조선 후기 강릉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유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 도정(都正) 유심춘(柳尋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의수(李宜秀)의 딸이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이조참판·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남인계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주청사(奏請使...
-
조선 후기 강릉 출신의 무인. 70세에 무과에 올랐다. 참군(參軍) 벼슬에 있을 때 오랑캐가 함경도에 창궐하였다. 그러자 적과 싸울 것을 자청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윤국경(尹國卿)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윤옥진(尹玉珍)이며 어머니는 민윤(閔昀)의 딸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2년 뒤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 장령에 이어 교리(校理)·사간(司諫)·사성·검상·사인·동부승지·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어머니의 상...
-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윤덕함(尹德諴)이며 어머니는 권즙(權濈)의 딸이다. 1774년(영조 50)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에 이르렀다. 아버지 윤덕함(尹德諴)이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 입에 흘려 넣어 아버지를 소생케 하였다. 그때 같은 고을에 살았던 한 집안인 윤덕중(尹德重), 윤정중(尹廷重),...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황시령(黃是齡)이 일찍 죽어 나이 20세에 혼자가 되었다. 남자에게 욕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조카 황운학(黃雲鶴)의 집에 거처하면서 밤에는 열부(烈夫) 송씨의 집에 가서 자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충노(忠奴). 최빈현(崔斌鉉)의 종으로 상전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이 죽자 3년 동안 상식(上食)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렸다. 또 상전의 4대에 걸친 제사를 받들고 산소의 성묘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을득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할아버지는 우계[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출신 이지방(李之芳), 아버지는 참판 이광식(李光軾)이며, 어머니는 이세응(李世應)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에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명종 연간에 정언을 비롯한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언적(李彦迪)을 탄핵하는 등, 윤원형(尹元衡)을 좇아 사림파(士林...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강릉 우계(羽溪).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지역인 우계(羽溪) 출신으로, 중종 조 명장이었던 이지방(李之芳)의 아들이다. 명종 초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1555년에 전라도에 도적이 들어 10개의 진이 함락되었다. 이때의 병란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엄정하였으며, 그의 아들 이전(李戩)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영해(寧海), 조선 전기의 효자 이양무(李陽茂)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급해지자 칼로 살을 베려고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칼을 빼앗아 감추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어머니에게 흘려 넣어 어머니가 열흘을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따라 죽었다. 숙종 때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남편 이돌만(李乭萬)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이웃 남자가 침입해 욕보이려 하였다. 죽기를 무릅쓰고 반항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이돌만의 처 이조이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조이(李召史)의 효열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李善彬)이 남의 묘터를 잡아준 일이 있었는데 이 묘터가 상가집 종인 개산(介山)의 아버지 묘와 가까워 개산(介山)이 이선빈에게 원한을 품고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급히 장사를 지내고 관가에 이 사실을 알려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개산(介山)이 끝내 자기가 지은 죄를 부인하자 방백(方伯)과 수령(守令)들도 명확한 사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7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을 때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임종할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두어 얼마동안 더 살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동수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천거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
-
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가 몇 달 동안 병석에 있을 때 배설물을 맛보고 치료하였으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렸다.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 땅을 파서 샘물을 길어 썼는데, 시묘살이를 마치고 묘막을 철거하던 날에 그 샘물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이동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표창을 하고 호...
-
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남편 이면기(李冕箕)의 병이 심했을 때 지극정성으로 하늘과 땅에 기도를 올렸다. 끝내 남편이 죽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늙은 시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겉으로는 슬픔을 참으며 남몰래 홀로 울다가 잠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목숨을 끊었다. 이면기의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해. 이연(李壖)과 형제 사이로 조선 전기의 효자 이양무(李良茂)의 후손이며, 이당(李堂)의 사촌 동생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어머니를 소생시켰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오래 고생하자 의관을 풀지 않고 밤낮으로 간호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영해. 이당(李堂)과 형제로서 조선 전기의 효자 이양무(李良茂)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한겨울에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한 후 밤낮으로 7일 동안 울면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흘 남짓 되어 따라 죽었다.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효심에서 나온 이같은 행위에 대해 모두들 슬퍼하였다고 한다 . 숙종 때 조정...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강원도 강릉시 우계 출신인 이지방(李之芳)의 후손이며, 중추부사를 지낸 이전(李戩)의 손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에 나주판관이 되었다. 1593년에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에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 1595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후(李垕)이다. 1827년(순조 27)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과 청안현감(淸安縣監), 통천군수(通川郡守)를 지냈다. 1859년(철종 10)에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방해정(放海亭)을 건립하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아버지는 이형(李珩)이며 형은 이상복(李尙馥)이다. 사마시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전쟁터로 향하던 중 갑자기 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상필(李尙馝)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상필의 행적이 임금에...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 아버지는 이오(李璈)이고 어머니는 채흥후(蔡興後)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과거에 올라 벼슬이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645년(인조 23) 8월, 강백년(姜栢年)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전 직장(直長) 김충각(金忠慤)과 함께 건의하여 향현사를 세워 최치운(崔致雲)·최응현(崔應賢)·박수량(朴遂良)·박공달(朴公達)·최수성(崔壽峸)·최운우(崔雲遇...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영해. 자는 성시(聖始),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이장밀(李長密)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호장(戶長) 최하(崔河)의 딸이다. 강릉 호가리(虎街里)[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 사람들이 백원당(百原堂)이라 불렀다. 일찍이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여 학문이 깊었고 문장도 뛰어났으나 가훈(家訓...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대사헌을 지낸 이감(李戡)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이성헌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 명주장군 김순식은 936년(태조 19)에 부하 장병을 이끌고 신검을 토벌하기 위해 강릉을 출발하여 대현(大峴)[대관령]에 이르러 이상한 중을 모신 사당인 이승사(異僧祠)에 제사를 지내고 후백제와의 마지막 격전지로 향하였는데, 이곳이 현재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사’라 여겨진다. 이승사는 행정구획상 평창군 도...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이업(李嶪)을 일찍 잃고 홀몸이 되자 피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받들었으며, 이가 드러나게 웃지 않았다. 3년 후에 삭망제(朔望祭)를 지냈으며, 이 때 손수 제수(祭需)를 마련하였다. 박씨는 나이 90에 이르도록 매번 슬퍼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업의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아버지는 참판 이광식(李光軾)이며, 어머니는 이세응(李世應)의 딸이다. 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이용은 청백하고 엄정하여 아전과 주민들이 모두 공경하며 따랐다. 조·부·손 3대에 걸쳐 네 사람 모두 북문(北門: 함경도)을 진수하였는데, 위엄과 덕이 있었기 때문에 오랑캐들이 이용의 이름만 듣고도 겁을 먹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남편은 이은진(李殷震)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었으나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셨다. 어느 날 저녁 사나운 도적이 침입하자 시부모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김씨는 도적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고 시부모를 감싸 보호하며 안정시킨 뒤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은진(李殷震) 처 김씨에 대한 효열...
-
고려 후기의 문신. 우계이씨(羽溪李氏)의 시조 이양식(李陽植)의 후손이며, 밀직원사(密直院事) 이사성(李思誠)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여러 도(道)의 원수(元帥)를 역임하였으며,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1486년(성종 17)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1522년(중종 17)에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이전손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선비. 이자개(李自開)의 증손으로 이예하(李藝夏)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호군(護軍) 이곤(李琨)이며 어머니는 장수전(張守專)의 딸이다. 성균관 진사였으나 출사는 하지 않았다.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모든 정성을 다했다. 79세의 생애를 살았다.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에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이다. 아버지는 이응명(李應命)이며, 효자 이지헌(李之憲)의 아우이다.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사흘간 성복(成服)을 마친 후에 형과 함께 창칼을 들고 호랑이를 찾아 나서서 결국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효행이 관부에 알려져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 중기의 무신. 이지방(李之芳)은 1496년(연산군 2)에 무사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 등과 함께 서정장수(西征將帥)에 임명되었다. 후에 종성·회령의 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내고, 1516년(중종 11)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왕비 윤씨(尹氏)의 책봉에 대한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이응명(李應命)이고, 아우는 이지면(李之冕)이다. 아버지 이응명(李應命)이 호랑이에 물려 죽자 아버지 상을 치르고 동생 이지면(李之冕)과 함께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를 발견한 두 형제가 재빨리 호랑이 앞으로 돌진하자 호랑이는 땅에 엎드렸다. 이 때 이지헌과 동생 이지면은 가지고 있던 창과 칼로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이진원(李進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철명(趙哲命)의 딸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이조좌랑·장령·이조참의·대사성·승지를 거쳤다. 1790년에 강릉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이어 대사간·대사헌과 외직으로 안동부사를 거쳤다. 1798...
-
조선시대의 효자. 15세 때 두 살 아래인 아우 이취번(李就藩)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산에서 밭을 매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태번이 호미로 호랑이를 내려치고 이취번은 어머니를 껴안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호랑이가 끌고 가던 어머니를 버리고 머리를 수그리고 가 버렸다. 두 형제는 어머니를 업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죽음...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미상. 형은 이후(李垕)이고,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은 이당(李堂)이 아우이다. 형 이후와 함께 문장에 뛰어나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는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는데, 일찍이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임영(臨瀛)에서 시율에 능한 사람은 오직 이학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군수 이봉구(李鳳九)의 아들이다. 1844년(헌종 10) 생원에 입격하여 1883년(고종 20)에 음사(蔭仕)로 순창원(順昌園) 수봉관(守奉官)이 되었다. 1887년에 공조좌랑으로 옮기고, 1894년에 도정(都正)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894년 9월 26일에 강릉부사에 임명되었고, 10월 22일에는 관...
-
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미상.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은 이당(李堂)과 이학(李壆)의 형이다. 동생 이학과 함께 문장에 뛰어나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났다. 또한 과거시험의 폐단을 지적하고 스스로 앞장서서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
고려 후기의 문신. 음사(蔭仕)로 예부주사(禮部主事)에 제수되었다가,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명주유수(溟州留守)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냈다. 그 뒤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거쳐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명주(溟州)에 나와 다스릴 때, 하천을 준설하고 도랑...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밤낮으로 자기를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다.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려 여러 번 회생시켰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24절기 중 가장 먼저 드는 절기. 양력으로는 2월 4일 경이며,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든다. 입춘의 ‘입(立)’은 ‘시(始)’와 같은 의미로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강릉 지역에서는 관아에서 토우(土牛)를 만들어 가농작(假農作)을 하는 입춘제를 지냈다. 강릉 향토지인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의하면 “고을 풍속으로 매년 동지에 오곡 씨앗을 항아리...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장취정(張就正)의 손자이다.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이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
조선 중기의 열녀. 남편은 장진문(張振文)이며, 장철견(張哲堅)의 아들이다. 나이 겨우 20세에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었다. 과부가 된 후에는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치아를 드러내고 웃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으로 남편의 신주(神主)에 음식을 올렸다. 정려(旌閭)를 받았다....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그의 손자인 장취정(張就正)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추밀원학사(樞密院學士)를 지냈다....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그의 아들 장칭제(張稱悌)는 희종(熙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은청광록(銀靑光祿)에 승계되었다. 명종(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거르지 않았고 끝까지 효성을 다하였다. 정려(旌閭)를 받았다....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장충순(張忠順)의 아들이다. 고려 희종(熙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문관의 정2품, 혹은 정3품의 품계)에 승계되었다....
-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고려 신종(神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후손이며, 장철견(張哲堅)의 아들이다. 중종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1534년(중종 29)에 조상현(曺尙賢)에 이어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권귀(權貴)에 아첨하지 않았다. 1547년(명종 2)에는 효릉시능관(孝陵侍陵官)을 지냈다....
-
강릉 앞바다에 위치한 육계도. 『관동읍지』,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이 섬은 강릉부 동해 상에 있고 주위가 5리 정도이며 섬은 높지 않고 지금은 파도가 깎아 평탄지가 되다시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 강릉 근처 동해성 섬은 견조도(堅造島)와 죽도(竹島)만 표시되어 있고 이 섬들은 지금은 모두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이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정선(旌善). 자(字)는 낙숙(樂叔).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전성명(全性命)의 아들이며 외조부는 권송(權悚)이다. 1517년(중종 12)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에 발탁되었다. 1531년(중종 26)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함흥판관(咸興判官)·강동현령(江東縣令)·평산부사(平山府使)...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정선(旌善). 자(字)는 원경(元卿). 통덕랑(通德郞) 전계현(全繼賢)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1528년(중종 2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있을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금으로 주조한 향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그 후 풍천(豊川)·정선(旌善)·원주(原州...
-
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39세에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다. 겨울과 여름이면 남편의 옷을 손수지어 무덤 앞에서 태웠으며, 평생을 상중(喪中)에 있는 것 같이 지냈다. 남편 생전에 많은 돈을 남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채권을 모두 거두어 불살라 버렸다. 그 뒤에는 살림이 가난하였으나 성품과 행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지체는 낮았으나 정절(貞節)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
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강릉. 남편은 정곤(鄭鵾)이다. 집에 불이나 시어머니가 불길 속에서 미처 나오지 못하자 불길을 무릅쓰고 뛰어 들어가 시어머니를 껴안고 나오다 함께 죽었다. 관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정려각(旌閭閣)은 강릉시 옥계면 성촌(城村)에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영일(迎日)정씨(鄭氏)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어버이의 병이 심해지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다섯 달 동안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효험이 있어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죽만 먹었으며, 상복을 벗지 않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늙어서도 조금도 게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부모님이 병이 들자 변을 맛보며 치료하는 등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물을 긷다가 물고기가 함께 올라와 잡아다 드렸더니 부모님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조에서 표창을 내렸고,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부모님의 병환이 위독할 때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는 등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예를 다하여 참배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찬양하였으며, 부영(府營)에서 표창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일(迎日).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다 부모에게 드렸고, 병환이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간호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관에서 효행을 표창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증직(贈職)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 효자로 이름 높았던 정종현(鄭宗玹)이 형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9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상막(喪幕)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으며 따뜻한 방에 거처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과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묘소 옆에 평소 어머니가 즐겨 드셨던 고사리가 나자 이를 캐어 아침과 저녁으로 올렸다. 부영(...
-
조선시대의 효자. 아우인 정종수(鄭宗琇)와 함께 두 형제가 모두 효성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어버이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14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과 함께 상막(喪幕)을 지켰으며 따뜻한 방에 거처하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에는 형제가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형제의 효행이 알려져 부영(府營)에서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
-
조선시대 강릉 지역의 장수 인물. 사마시에 올랐으며, 성품(性稟)이 온화하고 기품이 있어 화려함을 따르지 않았다. 매화와 대나무를 즐기며 거문고와 책으로 여가를 보냈다. 94세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3대에 걸쳐 추증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 충정공 조계상(曺繼商)의 후손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고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할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순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조순진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학자. 본관은 풍양(豊壤). 풍양군(豊壤君) 조신혁(趙臣赫)의 후손이다. 조시달(趙時達)은 일찍이 경학(經學)과 『사기(史記)』를 익혔다. 『예서(禮書)』를 두루 보고 『사례촬요(四禮撮要)』를 저술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에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였다. 조시달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가례(家禮)에 대하여 일가...
-
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목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자 흑질백장(黑質白章)이라는 뱀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방으로 구했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손수 숲속 바위틈을 찾아다니며 큰 뱀이나 구렁이가 흑질백장과 비슷하면 무조건 잡아다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와 같은 일을 4~5년 동안 계속하였다. 조영기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평장사 조맹(趙孟)의 31대손이다. 조운흘(趙云仡)은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며,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가 되었다. 합문사인(閤門舍人)을 거쳐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오르고, 1390년(공양왕 2)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강릉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이듬...
-
조선 후기의 무인. 진사 호인(好仁)의 아들로 용맹하였고 의기가 남달리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선전관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를 호위하였다. 1637년(인조 15) 정월 적진을 염탐하기 위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말과 좋은 옷을 하사하였다. 또 적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명을 받고 적진으로 가던 도중...
-
조선시대의 효자.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도저히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잉어를 직접 잡기로 하고 동생 조정주(趙鼎周)와 함께 강가에서 단단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결국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잉어를 잡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잉어를 아버지에게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조...
-
조선시대의 효자. 부모를 봉양하는 데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어머니가 9개월 동안 중병에 시달리자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100일 동안 치성을 드려 어머니를 낫게 하였다. 조진묵(趙晉黙)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효자라 칭송하며 부영(府營)에 보고하였다. 부영(府營)에서 표창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충정공(忠貞公) 조계상(曺繼商)의 후손으로 조근(曺瑾)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조징한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충정공(忠貞公) 조계상(曺繼商)의 증손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이 전생직장(典牲直長)에 이르렀다. 조철(曺哲)은 임진왜란 때에 벼슬을 버리고 경포에 숨어 살았다. 옥산(玉山) 이우(李瑀)와 헤어지면서 시를 짓기를 “석잔 술에 헤어지는 노래 한 곡조, 그대를 보내고 경포 가로 돌아가네. 이별의 정한을 알 리가 없어, 술잔을 거듭 잡고 나눈...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금구현령 조헌주(曺憲周)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2년(경종 2)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36년(영조 12)에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이후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좌랑·의령현령 등을 거쳐 1739년에 승지, 1741년에 대사간을 지냈다. 1742년(영조 18)에 강릉부사로 왔다가 17...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조정벽(趙廷璧)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조항존(趙恒存)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올라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진사 조영진(曺英振)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나 부모에게 아침 저녁 문안 인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모가 병이 나자 약을 구하러 100리 밖에까지 나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며 앞길을 인도하여...
-
조선시대의 열녀.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志)』에는 주문진 나루에 살았던 여성 옥도가 절개를 지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옥도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나이 20세에 일찍이 남편을 잃었다. 부모가 그를 불쌍히 여겨 다른 곳으로 재혼을 시키려 하였으나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거절하였다. 머리를 삭발하고 얼굴에는 먹칠을 하는 등 스스로 추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머리가 자라면...
-
조선시대의 열녀. 이완이(李完伊)의 처인 주문진 해녀 섬이는 나이 겨우 열일곱 살에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었다. 그 부모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몰래 혼자서 머리를 깎고 7일간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다.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개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음식을 먹고 겨우 살아났다. 유복녀가 한 명이 있었는데 이 딸이 시집을 간 뒤까지...
-
조선시대의 열녀. 향리(鄕吏)인 최광봉(崔光鳳)의 딸이다. 남편은 향리 이양면(李樑面)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었다. 정선(旌善)의 향리 이양면에게 시집을 갔으나 혼례를 올린 지 닷새 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 염습할 옷을 손수 짓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반 년 동안 시부모님을 정성을 다하여 모시다가, 어느 날 남편 무덤에 가서 종일 울다가 돌아와...
-
조선시대 강릉 출신의 효자.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최승원(崔承源)이고 동생은 최두령(崔斗齡)이다. 강릉 지역의 향리였다. 효성이 지극해 생부(生父)와 양부(養父)를 위하여 3번이나 손가락을 끊었다. 성산(城山) 백양동(白楊洞)에 있다고 전해지나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706년(숙종 32) 어사(御使) 오명준(吳命峻)의 별단서계(別單書啓)로 정려...
-
조선시대의 열녀. 목릉(穆陵)[선조의 능] 참봉을 지낸 남편 최맹인(崔孟仁)이 죽자 40여 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슬피 울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다. 최맹인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고려 후기 강릉에 정착한 강릉 최씨의 문한계의 시조. 본관은 강릉. 호는 충재(忠齋).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이며, 강릉최씨 문한계의 시조이다. 최문한(崔文漢)은 기상이 웅위(雄偉)하고 일처리가 명쾌해서 삼도(三道)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고려 말 국운이 다하자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
-
조선시대 강릉의 향리(鄕吏). 본관은 강릉. 향리로서 90세를 살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다. 최성복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개지(介之), 호는 매창(梅窓).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손자이며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의 셋째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소과에 입격하고,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506년(중종 1)에 왕에게 상소하여 성균관 전적에 올랐고, 이어 사...
-
조선 전기의 선비. 자(字)는 성숙(盛叔). 이조참판을 지내고 강릉 향현사에 제향된 최치운(崔致雲)의 손자이며, 생원 최진현(崔進賢)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죽산안씨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안치강(安致康)의 딸이다. 부인은 강릉김씨로서 주부(主簿) 김곤(金坤)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에 올랐다. 성품이 호탕하고 고매하여 술과 시로써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강원도...
-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최세창(崔世昌)의 부인 강릉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旌閭). 강릉최씨(江陵崔氏) 최세창의 처 강릉김씨는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하였다. 남편이 죽자 며칠 동안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결심을 하여 치마 한 폭을 찢고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관에다 넣고 손가락의 피를...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종의(宗誼).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손자이고,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의 맏아들이다. 셋째 아들인 최세절(崔世節)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성종(成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여 진사에 올랐다. 음직(蔭職)으로 울진현령(蔚珍縣令)과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지냈다....
-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강릉.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이다.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증조는 최치운(崔致雲), 조부는 최응현(崔應賢),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이고, 어머니는 철원최씨 승지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 조광조는...
-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효자. 본관은 강릉. 호는 수림(秀林). 강릉 향현사에 제향된 최수성(崔壽峸)의 사촌이다. 1555년(명종 10) 함헌(咸軒)·최운원(崔雲遠)·최운우(崔雲遇) 등과 함께 오봉서원(五峰書院)의 건립을 발의하고, 감사(監司) 윤인서(尹仁恕)와 부사(府使) 홍춘년(洪春年)의 협조를 받아 이듬해에 오봉서원을 건립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상을 당했을 때...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이조참판을 지낸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치료를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3년상을 지냈다. 최수정(崔受禎)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군부정랑(軍簿正郞)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좌승지에 올라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최수황은 독실한 불자(佛者)로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또한 인...
-
조선 중기의 강릉부 향리. 강릉부(江陵府) 향리(鄕吏)로 있으면서 1628년(인조 6) 승려 담화(曇華)가 반역을 꾀하다가 도망을 가자 감영(監營)의 아전으로 들어가 담화를 체포하는 데 자원하였다. 변장을 하고 황해도에 이르렀을 때 한 중을 만났는데 바로 담화임을 알아차리고 춘천까지 유인하여 체포하였다. 참령 사훈권(參寧 社勳券)을 얻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부(孝婦). 본관은 미상이고,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남편의 이름은 최시부(崔始溥)이다. 병이 들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80세의 할머니를 위해 9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하였다. 또한 이가 빠져 음식을 먹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젖을 짜서 미음에 섞어서 먹이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7개월을 더 살...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姓)은 박씨(朴氏)이다. 남편의 이름은 최신규(崔信珪)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으며, 남편 최신규가 죽자 12년 동안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추우나 더우나 매일 한결같이 성묘를 하였다. 최신규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자(字)는 정여(正汝).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으로 강성군(江成君) 최세건(崔世楗)의 12세손이다.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겼으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넣어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최심하(崔心河)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지극한 효성으로 중학교관(中學敎官)에 증직되었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시호는 문충(文忠). 최입지(崔立之)의 아들이다. 최안소(崔安沼)는 충숙왕 때 경상도존무사(慶尙道存撫使)에 임명되었고, 1347년(충목왕 3)에 통정대부 안동판관(安東判官)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 동중서평장사 예부사(三重大匡門下侍中同中書平章事禮部事)에 올라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에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아버지는 최입지(崔立之)이며 형은 최안소(崔安沼), 동생은 최안언(崔安漹)이다. 1326년(충숙왕 3)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고 1328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정선군수를 지내고 한림학사(翰林學士)·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전리(典吏)·예조(禮曹)·이조전서(吏曹典書)에 올랐다. 1361년(공민왕 10...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최우일(崔宇一)이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슬퍼하는 기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시부모의 묘소에 가서 절을 올려 하직인사를 하고, 친정에 돌아가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말로 부모님을 위로하였다. 그런 뒤 유서를 써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음독자살을 하였다. 어사(御使) 조홍진(趙弘鎭)의 장계(狀啓)로 호역(戶役...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최운광(崔雲廣)이다. 나이 30이 채 못 되어 남편이 죽자 매우 슬퍼하였으나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또한 남편의 제삿날이 되면 가난한 살림에도 제물(祭物)을 깨끗하고 풍성하게 마련하였다....
-
조선 중기의 효부. 본관은 안동. 권화(權和)의 딸이다. 남편은 최운부(崔雲溥)[1548~1575]이다. 남편을 따라 서울에 가 있을 때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기도를 올린 뒤 손가락을 끊어 종에게 주어 급히 강릉으로 가도록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머리를 빗지 않고 소금을 먹지 않았다. 밤낮으로 울며 직접 음...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자는 성중(盛中), 호는 사가당(四佳堂)·지곡(芝谷). 강릉최씨 문한계(文漢系)의 후손으로,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강성군(江城君) 최세건(崔世楗)이고, 부는 사재감 부정(副正) 최옥(崔沃)[1511~1572]이다. 형으로 최운흘과 최운준이 있고, 아우는 최운집이다. 아버지가 병환이 있을 때에는 변을 맛보며 보살폈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
-
조선 중기의 선비. 최운우(崔雲遇)는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교수 최담(崔澹)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姜氏) 참봉 강준지(姜俊智)의 딸이다. 진사 최호(崔浩)에게 입양되었다. 김광진(金光軫)에게서 수학한 최운우는 1552년(명종 7) 생원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
-
조선시대의 효자. 3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거의 죽게 되자 손가락을 씹어 그 피를 넣어드리니 하룻밤을 지나 소생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병간호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며, 약을 구하러 다니다 하루는 어두운 밤길에 호랑이 꼬리를 밟고 지나갔으나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꿩이 저절로 날아들어 오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정려(旌...
-
강릉 출신의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호는 동강(東崗).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이 손자이다. 99세를 살아서 기애(耆艾: 장수한 사람)에 속하였다. 영월군수와 정선군수를 지냈으며 중정대부(中正大夫)에 봉해졌다. 벼슬은 삼사(三司)의 좌윤(左尹)에 이르렀다. 조선 초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
고려 전기의 문신. 자는 원택(元澤). 시호는 장경(莊敬). 최유는 선종 대 과거에 급제한 후 인종 대에 이르기까지 이부상서를 비롯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지냈다.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의 주리(州吏)로 있다가 1090년 문과에 급제, 교서 교감(校書校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1128년 이부상서(吏部...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다 섞어 올리자 병이 나았다. 1508년(중종 3)에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 전기 강릉 출신의 문신. 본관은 강릉.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최치운(崔致雲)이고, 어머니는 강릉함씨 현령(縣令) 함화(咸華)의 딸이다.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저작·박사·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사(江原都事)가 되었다. 그 뒤 고성·영월 두 고을의...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삼척. 남편은 최의규(崔義圭)이다. 남편이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앓다가 죽었다. 시신을 끌어안고 같이 누워서 먹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시신을 염(殮)하여 관(棺)에 넣고 벽에다가 혈서로 “남편이 굶주려가며 지은 농사를 내 어찌 혼자 먹으며, 남편이 수고롭게 지은 집에서 내 어찌 혼자 살겠는가” 라고 쓰고는 남편을 따라 죽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찬보(粲甫).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으로 최하적(崔夏績)의 아들이다. 1729년(영조 5)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함경도판관에 이르렀다. 벼슬을 지낸 후 조급하거나 서두르는 일이 없이 분수를 지키며 살았다. 거처하는 곳에 집을 지어 ‘양한재(養閑齋)’라 이름 하였다. 소나무와 대나무·매화·국화를 매우 사랑하여 군자로서의...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행(崔允行)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와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다.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으로 있었으나 간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고성군수로 나갔다. 이 때 강원도 감사 박원종(朴元宗)이 간신들이 사주를 받아 최자점을 파직시키기 위해 최자점의 재산을 조사하였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자점(崔自霑)[1434~1508]의 묘비. 최자점의 자는 자흡(子洽), 호는 괴헌(槐軒), 부마(駙馬)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崔沇)의 아들로 1465년(세조 11)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 고성군수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교1동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산록에 묘와...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강릉(江陵).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최주명(崔柱溟)이다.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으로 진사에 올라 일찍이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풍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사림(士林)에서도 뛰어나 고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1661년(현종 2)에는 향인들과 함께 향교를 새롭게 중수하였다. 최재태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
조선 후기의 효자. 부모가 병이 났을 때 병의 차도를 알아보기 위해 변을 맛보아 가며 간호하였고,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는 등 효행이 뛰어났다. 82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아들 최방빈(崔邦彬) 또한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1841년(헌종 7)에 음사(蔭仕)로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조정에서 최점록의 효행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 한림(翰林) 조휘림(趙徽林)이...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첨추(僉樞) 최익록(崔益祿)의 아들이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죽을 먹었고, 국상(國喪)과 인산(因山)에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최정검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 조흥진(趙興鎭)은 최정검의 효행을 듣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사림에서 여러 번 관에 호소하여 “...
-
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두 달 만에 남편 최종집(崔宗集)이 괴질에 걸려 죽고 연달아 시부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슬픔이 지나쳐 몸이 수척해졌으며, 빗질을 하지 않고 옷과 이부자리에 때가 끼어도 빨지를 않았다. 첫 번째 부인이 낳은 아이를 잘 길러 남편의 뒤를 잇고자 하였으나 그 아이마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삿날에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상막에 들어가 제상 앞에서 독...
-
조선시대의 열녀. 예도가 밝았으며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 최종학(崔鍾鶴)의 병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반나절을 더 살게 하였다. 최종학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서 단자를 부영(府營)에 올려 포상을 받았고 요역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최치운의 후손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집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사천(沙川) 용연동(龍淵洞)에다 장사를 지냈으며,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하루는 새벽에 성묘를 갈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 앞까지 길을 인도하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매번 호랑이가 앞서서 집 근처까지 인도하...
-
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강릉. 자는 국신(國臣), 호는 한송자(寒松子). 조선 세종조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崔致雲)의 아들이다. 부인은 죽산안씨 여흥부원군 안치강(安致康)의 딸과 강릉함씨 호장 함순(咸順)의 딸이다. 아들은 둘이었는데 첫째는 최세번(崔世蕃), 둘째는 최세창(崔世昌)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에 입격하였고 음사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강릉. 생원 최만재(崔萬栽)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에 올랐다. 최징은 아버지 최만재(崔萬栽)와 함께 문한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으나 취하여도 남과 시비를 하지 않았다. 소학대(巢鶴臺) 아래에 살면서 한가롭게 지내다 일생을 마쳐 학담주인(鶴潭主人)이라 불렸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강릉 강동면...
-
조선시대의 열녀. 28세 때 남편 최찬구(崔燦九)가 죽자 슬픔이 지나쳐 여러 번 기절을 하였다. 심씨는 대상(大祥)과 그 다음 달에 지내는 담제(禫祭)를 마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최찬구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아름다운 행실을 찬양하였으며,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최찬구 처...
-
조선시대의 효자.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고을의 의원이 살펴보더니 “사람의 이가 가장 좋은 약이다.”라고 말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창효는 곧바로 자신의 이 세 대를 뽑았다. 그리고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 어머니의 상처에 발라 어머니를 살렸다. 최창효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최운상(崔雲祥)의 병이 위급할 때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최충남(崔忠男)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충남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9년(명종 14)에 정려를 내렸다....
-
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최안린(崔安麟)이고, 어머니는 정선전씨 낭장(郞將) 전인구(全仁具)의 딸이다. 최치운은 1408년(태종 8) 19세 때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417년(태종 17) 27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정자(承政...
-
조선시대의 효자. 22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최태민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태민(崔泰旻)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다....
-
조선시대의 효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점차 자라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통탄하였다. 그러다 어머니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할 때 관을 보고 통곡하였다. 그 후 처음 상을 당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3년 상을 치렀다. 최택항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최택후(崔宅垕)의 병이 위급하자 이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다시 소생했지만 오래지 않아 죽었다. 이씨는 남편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을 하다 기절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약을 써서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3년 동안 눈물로 지내면서 상을 마쳤다. 그 후 옷단장을 하지 않고 나물밥을 먹으며 14년 동안 문밖출입을 삼가...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최필숭(崔必崇)의 아버지는 최옥연(崔玉淵)이다. 1480년(성종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8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충청도사(忠淸都事)에 이르렀다. 최필숭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향리 출신으로 효자 최두상(崔斗相)의 현손이다. 성품은 굼뜨고 우직스러웠으나 효성만은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의원이 뱀의 기름을 쓰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빌고는 백방으로 뱀을 구하려고 다녔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뱀을 구할 길이 없어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하루는 까마귀 한 마리가 지...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회생시켰다. 아버지가 뱀에 물렸을 때에는 뱀을 잡아 그 허리를 씹어 피를 뽑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리자 즉시 나았다고 한다. 사림에서 지극한 효성에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최운우(崔雲遇)의 현손이다.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에게 글을 배웠으며, 1684년(숙종 10) 생원에 올랐다. 최해웅이 16세 때 지은 「경포대」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대관령에 올라 읊은 시가 전해진다. “대장부 칼을 집고 높은 봉에 의지하여, 맑은 정기 호흡하며 땅 끝을 굽어보네. 기운이 충만하니 산도 낮아 보이...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교리(校理) 최자점(崔自霑)의 후손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옷깃을 부여잡고 슬퍼하였으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를 하였다. 또한 집안 살림이 가난해도 몸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시묘살이를 하면서 채식만...
-
조선 후기의 효자. 1763년(영조 39) 생원에 올랐다. 5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지자 예를 갖추어 상을 치렀다. 장례를 마치고 바로 아버지의 묘 옆에다 묘막을 짓고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나아가 절을 하고는 꿇어앉아 슬피 울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를 듣고 모두 감복하였으며, 강릉부사 유의양(柳義養)이 자주 찾아 위로하였다. 강원감사 이형규(李亨逵)가...
-
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으며,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매일같이 슬퍼하며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수 약을 지었으며, 밤에는 촛불을 켠 채 부채를 부치며 간호를 하였다. 남편이 죽자 초종(初終)을 치른 후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자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로 평생 머리에 빗질과 세수를 하지 않았으며, 90세가 가까...
-
음력 7월 7일로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날. 칠석은 양(陽)을 뜻하는 7자가 겹치는 날로, 저녁 하늘의 별자리를 보는 명절이다. 낮에는 옷과 고서를 햇볕에 말리고 칠성맞이굿도 한다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를 사이에 놓고 부부 별자리가 만나지 못하다가 까치가 다리를 놓아 그리던 정회를 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다리를 오작교라 하는데 까치들이 돌을 머리로 이고...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 한배후(韓配厚)의 아들로, 한배연(韓配淵)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유익기(兪益基)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벼슬길로 나아가 1740년(영조 16)에 정선군수를 거쳐 정랑에 올랐다.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60세의 나이로 보덕이 되었고, 이어 지평·정언·헌납·장령을 역임하였다. 1756년...
-
동지 후 105일째 드는 24절기의 하나. 조선시대부터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사명일(四名日)에 속하였다. 한식날은 조상의 산소에 가서 ‘한식차례’를 올리는 날로 절기상 음력 2월에 들기도 하고 3월에 들기도 한다. 한식(寒食)은 ‘찬밥 먹는 날’이라고 하는데, ‘한식’이라는 용어는 불의 사용을 금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한식을...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2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좌정언(左正言)을 지냈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우헌납(右獻納)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지춘주사(知春州事)에 좌천되었다가 뒤에 형조정랑이...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함상현(咸商鉉)이다.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남편에게 아내의 도리를 다하여 섬겼다. 시집간 지 10년이 채 못 되어 남편이 병이 나자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정화수를 떠 놓고 자신이 대신 앓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남편이 죽자 시신을 거두어 놓고 밖으로 나가 약을 먹고 죽었다. 군(郡)에서 그릇에 표를 새겨 포상을 하였...
-
조선시대의 무신. 본관은 강릉. 형조판서를 지낸 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1360~1410]의 현손(玄孫)이다. 별시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감찰과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지냈다....
-
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뛰어나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가면서 병세를 살폈고,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산꿩을 먹고 싶다고 하자 이튿날 새벽 뜰 안에 있는 살구나무에 꿩이 날아들어 활로 쏘아 잡았다. 사람들이 효성이 지극한 탓에 꿩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숙종 때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문명(文命), 호는 송담(松潭).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함부림(咸傅霖)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이어 고부군수·군기시부정·나주목사를 거쳐, 1451년(문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457년(세조 3)에는 공주목사·함길도관찰...
-
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함윤근(咸潤根)이다. 남편이 과거를 보러가다 중도에서 병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니 깨어나 며칠을 더 살았다. 남편이 죽자 같이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시아버지가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편의 상을 마친 후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삼강록(三綱錄)』에 그 효행이 실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字)는 석정(石挺).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 문익공(文翼公) 함순(咸淳)의 5세손이다. 아들 함승우(咸承祐)는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냈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봉랑 전법좌랑(承奉郞典法佐郞)을 거쳐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 함윤근(咸允根)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대신 앓겠다고 빌었다. 의원이 뱀탕이 효험이 있다고 하자 수천 마리를 잡아다 약을 지어 드렸다. 아버지가 붕어회를 먹고 싶어 하여 웅덩이를 파니 본래 붕어가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마리의 붕어를 얻을 수 있어 이것을 잡아다 드렸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해서는 3년간 시묘살이...
-
조선 전기의 문신. 1423년(세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함한(咸漢)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 아들은 홍순대(洪順大)로서 역시 효행이 뛰어났다. 어머니가 고령(高齡)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항상 옆에서 부축하며 보살폈다. 어머니가 고기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자 울면서 빨아냈다. 또한 어머니의 병환에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으며, 위독할 때는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죽으니 70세의 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이며, 아버지는 업유(業儒) 홍봉산(洪奉山)이다. 효행이 뛰어났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홍순대(洪順大)에 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관청에서 홍순대의 지극한 효행을 듣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
고려 말·조선 초기의 강릉 기생. 홍장은 경포호수를 배경으로 한 강원도 안찰사 박신(朴信)[1362~1444]과의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시조 작가로서 시조 1수가 전한다. 강원도 안찰사로 온 박신은 강릉의 기생 홍장과 정이 두터웠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홍장을 찾으니 부사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죽었다고 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부사 조운흘은 경포...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홍재무(洪在武)이다. 남편이 병이 나자 밤낮으로 자신을 대신해서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남편이 끝내 숨지자 몰래 뒤뜰에 나가 따라 죽었다. 유림에서 예조(禮曹)에 상소를 올려 정려(旌閭)를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 남편은 홍재수(洪在壽)이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9년간이나 문둥병을 앓았는데, 밤낮으로 자신을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백방으로 구하여 올렸다. 시집올 때에 가지고 온 패물과 소를 팔아 남편의 약값에 썼으며, 남편이 죽을 무렵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다. 유림에서 부영(府營)과 어사에게...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 예문관대교를 지낸 홍계정(洪係貞)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5년(중종 30)에 별시(別試)에 올랐다. 1555년(명종 10)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 1556년 강원도관찰사 윤인서(尹仁恕)와 전 부사 함헌(咸憲), 최운우(崔雲遇) 등과 함께 오봉서원(五峰書院)을 건립하였다. 오봉서원을 건립할 때에 윤인...
-
정몽주(鄭夢周)와 최수성(崔壽峸)을 배향한 사당.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 선생과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사당이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와 문정공(文正公) 최수성의 시호 가운데 글자를 따서 충정사(忠正祠)라 하였다. 강당문무(講堂門廡)를 총칭(總稱)하며 구정(邱井) 개화(開華)의 동쪽...
-
정몽주(鄭夢周)와 최수성(崔壽峸)을 배향한 화동서원의 묘정비.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 선생과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사당의 묘정비이다. 구정(邱井) 개화(開華)의 동쪽에 있다 하여 화동서원(華東書院)이라고 하였고 묘정에 세운비석이라 화동서원 묘정비라 하였다. 후손인 최종만(崔鍾萬)과...
-
강원도 강릉시 교동(校洞)에 있는 조선 말기의 사당. 말갈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화부산(花浮山) 아래에 사당을 세운 데서 유래되었다. 신라 삼국통일 후 강릉이 신라의 변방이었던 시기에 말갈족들의 침입 때문에 이 지역이 불안할 때 김유신이 출정하여 강릉[당시 명주군] 화부산 아래에 오랫동안 주둔하여...
-
강릉시 교동의 화부산사 경내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업적을 기록한 비. 화산(花山)은 화부산(花浮山)을 말하며, 이곳에 사당을 짓고 기적비를 세운 데에서 유래하였다. 1910년 후손들이 김유신의 은택에 감사하며 김유신의 충정을 비석에 새겨서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석은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큰 벚나무 밑 그늘진 곳에 있었다. 그 후 도로 옆으로 옮겼다...
-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모안이굼에 있던 조선 시대의 정자. 환선정(喚仙亭)은 16세기 후반경 권협이 지은 건물로 아들 권수경, 손자 권칭(權稱)에게 물려준 누정 건축물이나, 지금은 없어졌고 그 터만 전해지고 있다. 환선정과 관련된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권칭이다. 권칭은 안동 권씨로, 강릉 지방의 사족이었으며, 1627년(인조 5) 증광 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
조선시대의 열녀.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으며 아내로서의 행실도 매우 뛰어났다. 시어머니가 죽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이 때 남편 황기윤(黃基倫)도 어머니의 상을 치르다 병을 얻어 위독해졌다. 매일 남편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나 남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며느리가 되어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시아버지께서는 저를 생각하지 말아 주...
-
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다시 살게 하였다. 그 후 어머니는 14년을 더 살았다. 황손길(黃遜吉)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 강릉 지역의 장수 인물. 1510년(중종 5) 74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200여 명의 동갑들이 잔치를 베풀며 시를 지어 주었다. 이 시를 그의 손자 황계우(黃季友)가 가보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장(李璋)의 서문이 함께 전한다....
-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극진히 봉양한 사람. 효도를 중요시한 조선 시대의 문화적인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다.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학자들의 문집에 담기거나 효자비(孝子碑)의 비문에 실려서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덕행(德行)의 표준이 되어 왔다. 효행의 본보기로 기록에 남아 있는 사례들 중에서 특히...
-
최응록(崔應祿)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최응록은 중종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릉참봉(定陵參奉)에 천거되었다. 최응록의 호는 성재(省齋)이다. 희경공(僖景公) 좌찬성(左贊成) 최이(崔迤)의 6세손이고 아버지는 최숙남이다. 최응록은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다 섞어 드시게 하여 병을 낳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