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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57
한자 徐思遠 墓所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능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35[호산동 산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50년 6월 4일 - 서사원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15년 4월 9일 - 서사원 사망
조성 시기/일시 1615년 9월 4일연표보기 - 서사원 묘소 조성
현 소재지 서사원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산1-1 지도보기
원소재지 서사원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산1-1
성격 묘소
양식 봉분
관련 인물 서사원
봉분 크기/묘역 면적 2m
소유자 달성서씨 낙재 문중
관리자 달성서씨 낙재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에 있는 대구 지역 유학자 낙재 서사원의 묘소.

[개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은 1550년(명종 5) 6월 4일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 4월 9일 66세로 사망하였다.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은 소렴(小殮)과 대렴(大殮) 때 두 차례 조문을 하였고, 관찰사 심돈(沈惇)은 부의(賻儀)를 보내 왔다. 9월 4일 대구 하빈현(河濱縣) 파산(巴山) 중턱 간좌(艮坐)[남서향], 현재 대구 달서구 호산동(虎山洞) 산1-1번지에 장사(葬事)하였다. 파산은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뒷산이다. 서사원의 묘소(墓所)에는 1656년(효종 7) 세운 묘비가 있다. 비문은 이조참판 이민구(李敏求)[1589~1670]가 짓고, 경상도관찰사 홍처후(洪處厚)[1599~1673]가 글씨를 썼다. 묘비 전면에는 ‘승의랑(承議郎) 수(守) 호조정랑(戶曹正郎) 낙재서공지묘(樂齋徐公之墓)’라고 쓰여 있다. 묘소 아래에는 재실인 낙선재(樂仙齋)가 있다.

[위치]

서사원 묘소대구광역시 달서구 호산동 산1-1번지 파산에 있다.

[변천]

서사원 묘소는 1656년(효종 7) 세운 묘비(墓碑)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형태]

서사원 묘소에는 봉분이 있으며 묘비는 묘소의 정면에 있다.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이 있다.

[금석문]

묘갈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은 바로 신라의 옛 영토이다. 전한(前漢) 때부터 이미 군자의 나라로 일컬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예의와 겸양을 좋아하여 더불어 그릇된 일을 행하기 어렵고, 이곳의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히며 서로 어울려 학문을 하니 대개 이 지역의 습속(習俗)의 풍기(風氣)가 그러해서이다. 떨쳐 일어나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탁월하게 오도(吾道)의 종사(宗師)가 되는 이는 국가에서부터 지극히 높여 숭상하니, 근세에 대구의 낙재(樂齋) 서공(公)이 있는데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고 선한 도를 지닌 선비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벼슬을 거르지 않은 가문인데, 공의 증조 직장(直長公) 휘 필(弼)과 조부 휘 응기(應期), 고(考) 교관공(敎官公) 휘 흡(治)의 삼세(三世)는 현달하지 못하였다.

공은 휘(諱)는 사원(思遠)이고 자는 행보(行甫)로 가정(嘉靖) 경술년(1550)에 태어났는데, 7세에 백부 진사공(進士公) 형(浻)이 데려가 양자로 삼았다. 그 부인인 이씨는 성품이 엄격하였다. 공은 비록 어렸지만 이미 그 뜻에 순종하여 잘 따랐다.

성장하여 어버이를 섬길 때는 효도하며 안색을 화열하게 하고 예를 어김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묘살이를 하며 평생토록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사당에 인사를 드리고 서실(書室)로 나아가 종일 단정히 앉았기에, 남녀 종과 마부의 내외가 질서 정연하였다. 여러 숙부를 섬기거나 형제들과 지낼 때, 고을의 친구들과 사귈 때도 모두 윤리를 다하였는데 억지로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되었다.

처음 어버이의 명으로 성율(聲律)을 공부하여 글을 지었는데, 일찍이 항시에서 일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장에 가지 않고 매양 성현의 책을 읽으며 개연히 도를 추구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공이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종유하여 학문의 연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뜻을 오로지 하여 나아가 자신을 바로 잡고 “성현이 고원한 데에 있는 것은 아니라 다만 내가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지행(知行)’으로 스스로 힘썼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서책을 대할 때 항상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이 하였다. 일찍이 “공자와 맹자를 배우고자 한다면 의당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주서(朱書)』와 『퇴계문집(退溪文集)』을 가장 좋아하여 “그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을 모른다면 옳겠는가? 주부자(朱夫子)는 진실로 공자 맹자 이후의 유일한 분이며 퇴계 선생은 또 우리 동방의 주부자이다.”라고 말하며 퇴계 선생을 스승으로 직접 섬겨 그 실마리를 듣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동지(同志)·도우(道友)들과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선생의 발자취를 경모하고 우러러 선생을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듯이 하며 수석(水石)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속세의 찌꺼기를 씻어 버리고 호연(浩然)히 돌아왔다.

공이 거처하던 이천(伊川)은 금호강(琴湖江) 하류에 있는데, 산은 서려 있고 물은 고여 있어 은거하기 적당한 곳이다. 소나무는 푸르게 집을 둘러싸고 정원에는 매화가 향기롭고 대나무가 정갈하니 이곳에서 일 년 내내 소요하고 독서를 즐겼다.

선사서재(仙査書齋)가 전란에 불타 버리자 공이 중건하고 자양서원(紫陽書院)의 옛 체제를 취하여 경(敬)·의(義)·완락(玩樂)이라고 재우(齋宇)의 이름을 지었다. 선유(先儒)의 격언(格言)을 모아 정사학규(精舍學規)를 만들고 강의를 시작하는 처음에 거론하여 학도(學徒)를 경계(警戒)하였다. 이취(理趣)를 논하고 게으르지 않도록 진작하여 말하기를 “‘뜻이 하루라도 나태해서는 안 되며 마음이 하루라도 풀어져서는 안 된다’, ‘군자가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노력하게 되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는 두 구절을 더욱 체득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한가하면 문생 한두 명을 데리고 가벼운 배를 타고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풍월을 읊조렸다.

당시 사수(泗水)에는 한강 정구 공이 계시고 옥산(玉山)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공이 계셔서 공과 솥발과 같이 벌여 서서 거처하였기에 종유하는 선비들이 모두 왕래하며 의문점을 질문하였고 벼슬아치로 동서를 가는 자와 남쪽 지방의 관리가 된 자들이 모두 그 집에 예를 표하였다. 처음 조정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곧바로 감역(監役)과 찰방(察訪)에 임명하니 한번 출사하여 어명(御命)을 받들고는 바로 돌아왔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에는 청안(淸安) 현감(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국가가 침략을 받아 어려움이 많으므로 평소의 뜻을 굽히고 힘써 일어났다. 정무(政務)를 볼 때는 유망(流亡)하는 백성을 안집(安輯)하는 데 힘을 쏟았다. 가장 먼저 성묘(聖廟)를 수리하여 예법대로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는데, 성황(城隍)이나 여단(厲壇)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관청의 수많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매달 모일(某日)에는 학사(學舍)에 나가 스스로 구두(句讀)를 강해(講解)하고 아울러 사예(辭藝)를 익히니, 근방의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다투어 와서 학업을 익혀 문질빈빈(文質彬彬)하게 되었다.

무술년(1598)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길이 막혀서 돌아가지 못하자 서원(西原)의 산 속에 흙집을 짓고 독서하며 홀로 즐겼는데 그 문도들이 또 서로 이끌며 와서 공부하니 고을 사람들이 돌에 새겨 추사(追思)하였다.

얼마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우아하고 고상한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연이어 개령(開寧)·옥과(玉果)·연기(燕岐)에 부임하라는 명이 있었고 또 형조좌랑(刑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익위사어(翊衛司禦)·역학교정(易學校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을묘년(1615) 여름 4월에 돌아가시어 하빈현(河濱縣) 파산(巴山)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죽산 박씨(竹山朴氏)에게 장가드니 고(故) 정승 박원형(朴元亨)의 후손이다. 아들 항(恒)을 낳으니 무과에 급제하여 언양(彦陽)현감(縣監)이 되었지만 후사가 없어 육촌 동생 신(愼)의 아들로 종통(宗統)을 이을 후사로 삼았다. 서출(庶出)로 구(懼)가 있다.

영남은 퇴계가 돌아가신 뒤부터 선비된 자의 부류를 대소로 기록할 수 있다. 공 같은 이는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대개 풍모를 듣고 사숙(私淑)한 분이 아닌가? 만약 공의 조예의 깊이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쓸데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의 호고(好古)와 지방(知方)은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거처할 때는 그 자신을 착하게 하여 그 영향이 고을에까지 미쳤으니 말학(末學)에게 본보기가 됨을 또한 속일 수 없다. 위대한 성현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유풍은 더욱 저하되어, 물결이 무너뜨리고 잡초가 가득 찬 듯하여 세상이 기나긴 밤에 들었다. 항심(恒心)이 있는 자를 보는 것은 대개 옛날부터 어려웠다. 가령 미래의 사람들이 사문(斯文)에 뜻을 두고 흐름을 따라 근원을 거슬러 가서 백대의 뒤에까지 진작할 수 있다면, 도와서 서게 하고 보호해 인도하는 공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명(銘)을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고[鷄鳴而起]

이로운 일이 아니어도 부지런히 하니[非所利而孜孜]

성인의 무리로다.[聖人之徒猗]

은거하며 뜻을 구하고 외물에 뜻을 뺏기지 않고[隱處求志而不奪乎外競]

마음으로 만족하여 스스로 즐기도다.[內足以自娛猗]

책으로 살찌고 도(道)로 살찌기에[書腴道膏]

고량진미를 부러워하지 않도다.[無慕乎肉梁猗]

이미 순하고 이미 편안하여[旣順旣安]

평생을 바르게 살았네.[終考其貞猗]

문인들로 하여금 고사를 인용하여 이름을 바꾸게 하니[使門人援古而易名]

어찌 ‘문강선생(文康先生)’이라 하지 않으랴?[盍亦曰文康先生猗]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이조참판(行吏曹參判) 이민구(李敏求) 지음.

墓碣銘

嶺南 卽新羅舊封 自前漢時 已稱爲君子之國 其人喜禮讓 難與爲非 其子弟習詩書 相從問學 盖其俗風氣然也 其作而名世 犖犖爲吾道宗師 自國家尊尙之至矣 近世有大丘樂齋徐公 亦藏修善道之士也 達城徐氏 在勝國時 代不乏衣冠 至公曾祖直長公諱弼 祖諱應期 考敎官公諱洽 三世不顯耀 公諱思遠字行甫 以嘉靖庚戌生 生七歲 伯父進士公浻 取以爲子 其配李氏性嚴 公雖幼 已能順適其意 及長事親孝 色養無違 沒而廬墓 哀慕終身 晨興必謁廟 出就書室 危坐竟日夕 男女僕御內外斬斬 事諸父處兄弟 與鄕黨交 俱盡其倫理 不待強而至焉 始以親命治聲律爲文 嘗發解第一 非其好也 旣所後父母喪 遂不復赴擧 每讀聖賢書 慨然求道 聞寒岡鄭公早遊退溪先生之門 學有淵源 乃專意就正 以爲聖賢之不在乎高遠 顧吾力行何如 故勉勉以知行自勵 整飭衣冠 對越方冊 常若親承警誨 嘗謂欲學孔孟 當以程朱爲準的 最喜朱書及退溪文集曰 讀其書不知其人可乎 朱夫子實孔孟後一人 而退溪先生又吾東方朱夫子也 恨未及摳衣凾丈 獲聞其緖餘 乃與同志道友 入淸凉山 景仰遺躅 彷彿躬奉杖屨 周旋於水石間 洗滌査滓 浩然而歸也 所居伊川 在琴湖下流 山盤水渟 簻軸攸宜 松翠繞屋 庭階惟梅芳竹潔 婆娑卒歲 樂以圖書 仙査書齋經燬于兵 公重加營葺 取紫陽舊制 以敬義玩樂名其齋宇 裒集先儒格言 作精舍學䂓 開講之初 擧以警學徒 論難理趣 提掇不怠曰 志不可一日惰 心不可一日放 君子莊敬日強 安肆日偸 此兩句 尤當體認 暇則從一二門生 輕舟沿遡 嘯咏風月 時泗水有寒岡鄭公 玉山有旅軒張公 與公鼎峙而居 從遊之士 咸往來考質 而搢紳之東西行及吏于南服者 皆禮於其廬 始朝廷聞公名 就拜監役察訪 一出拜命卽還 萬曆乙未 以選授淸安縣監 屬國被冦多難 屈志強起 爲政務安輯流逋 而首先治聖廟 春秋俎豆如禮 至城隍厲壇 官事百爲 莫不具修 月日就學舍 自爲講解句讀 兼隷辭秇 傍近翹秀 競來執業 彬彬質有其文 戊戌罷官 路梗不得歸 等土室西原山中 讀書自樂 其徒又相率就學 邑人刻石追思 旣而返故居 雅尙愈確 連有開寧, 玉果, 燕岐之命 且以刑曹佐郞, 戶曹正郞, 翊衛司禦, 易學校正徵 皆不應 乙卯夏四月卒 葬河濱縣巴山之麓 公娶竹山朴氏 故相元亨之後 生男恒 武科彦陽縣監 無后 以六寸弟愼之子繼宗爲後 庶出曰懼 嶺南自退溪先生沒 爲士者類能記其大小 若公旣以不及門爲恨 盖其聞風而淑艾者非耶 苟欲評其所造詣淺深則汰矣 然其好古知方 脫乎流俗 處而善其身 以及其鄕 矜式乎末學 亦不可誣也 去大賢益遠 流風益寢 波頹茅塞 世入長夜 得見有恒者 盖終古所難 使來者有志斯文 沿其流遡其源 振作乎百代之下 則扶植衛導之功 又何可量也 遂爲銘曰

雞鳴而起 非所利而孜孜 聖人之徒猗 隱處求志而不奪乎外騖 內足以自娛猗 書腴道膏 無慕乎肉粱猗 旣順旣安 終考其貞猗 使門人援古而易名 盍亦曰文康先生猗 嘉善大夫 行吏曹參判 李敏求 撰

[의의와 평가]

서사원연경서원(硏經書院)과 선사재(仙査齋)에서 강학하여 대구를 학술과 교육, 문화의 도시로 만든 인물로 대구 지역의 인사들이 기억하고 기릴 만한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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