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63
한자 郭䞭
영어공식명칭 Kwak Jun
이칭/별칭 양정,존재,충렬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1년연표보기 - 곽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곽준 자여도 찰방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곽준 안음 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곽준 정유재란 당시 황석산성 수호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곽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4년 - 곽준 충현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77년 - 곽준 예연 서원 사액
추모 시기/일시 1692년 - 곽준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관 증직
추모 시기/일시 1708년 - 곽준 충렬 증시
추모 시기/일시 1714년 - 곽준 황암사 배향
거주|이주지 곽준 거주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활동지 황석산성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묘소 곽준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안음 현감

[정의]

조선 전기 경상도 현풍현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곽승화(郭承華)이며, 할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곽미(郭𤧞)이다. 아버지는 곽지완(郭之完), 어머니는 진사(進士) 정옥견(鄭玉堅)의 딸 팔계 정씨(八溪鄭氏)이다. 부인은 전기원(全基遠)의 딸 증(贈) 정부인(貞夫人) 전주 전씨(全州全氏)와 안수굉(安守宏)의 딸 증 정부인 광주 안씨(廣州安氏)이다.

[활동 사항]

곽준(郭䞭)[1551~1597]은 어려서부터 성인과 같은 국량(局量)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존재(存齋)’라고 편액한 서실(書室)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준은 의병장 김면(金沔)을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이때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김성일(金誠一)은 곽준의 현명함과 군공(軍功)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바로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1594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준은 안음 현감으로 있으면서 일가족과 함께 황석산성(黃石山城)[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을 수호하였다. 황석산성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였던 이원익(李元翼)은 곽준 등으로 하여금 황석산성을 수호케 했던 것이다. 또한 이원익은 곽준이 서생(書生) 출신이기에 병법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곽준을 돕게 하였다. 이리하여 곽준은 성의 남쪽을, 백사림은 북쪽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이 황석산성으로 쳐들어오자, 백사림은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곽준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나,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때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곽이후(郭履厚)도 전사하였고, 딸과 며느리는 자결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존재 선생 실기(存齋先生實記)』 2책이 전한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황석산성에서 곽준이 전사할 때 두 아들이 아버지를 보호하다 함께 전사하였으며, 딸은 남편이 왜적에게 잡혔다는 말을 듣고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한 집안에 충(忠)·효(孝)·열(烈)이 모두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세상에서는 이를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불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1610년[광해군 2]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곽준과 일가족에 대해 정문(旌門)을 내렸고, 복호(復戶)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또한 1623년[인조 1]에는 곽준을 치제(致祭)하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도록 명하였다. 1692년[숙종 18]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 증직(贈職)되었으며, 후사가 없는 관계로 곽준의 동생 곽근(郭赾)의 손자 곽창일(郭昌一)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1708년[숙종 34]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위치한 예연 서원(禮淵書院)[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에 배향되어 있다. 예연 서원은 1618년[광해군 10] 곽재우(郭再祐)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충현사(忠賢祠)에서 유래하는데, 1674년[현종 15] 현풍 현감(玄風縣監) 유천지(柳千之)에 의해 곽준도 함께 배향되었으며, 1677년[숙종 3]에는 예연 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1714년[숙종 40]에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건립된 황암사(黃巖祠)에 배향되었다. 황암사는 곽준을 비롯해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액 사우(祠宇)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에는 곽준의 재실(齋室)인 화산재(花山齋)가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