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가축을 길러왔다. 최초의 가축은 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축으로 분류되는 동물들은 포유류나 조류 등이다. 우리의 농촌에서 전통적으로 길러온 가축으로는 개, 말, 소, 돼지, 양, 염소 등과 닭, 오리, 거위 등이었다. 가축은 여러 가지 용도로 생활에 이용되어 왔다. 고기, 알 등의 먹을거리를 얻거나 털을 이용하여 실을 만들기도 하고 가죽을 이용하여 옷을 짓...
-
성동 은 비석동산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큰말과 신골(싱골)로 이루어졌다. 성동마을로 가는 길은 풍덕마을과 같다. 즉 주덕에서 노은으로 연결되는 52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1.9㎞ 지점이 주막거리이고 이곳에 성동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 버스정류장 옆에는 성동마을 안내비와 이덕량의 개척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마을에 이르는 길이 나있고, 왼쪽으로...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있는 조선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묘. 경녕군(敬寧君)은 조선 태종과 효빈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비(李示+非), 자는 정숙(正淑)이고, 부인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학문에 밝아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5조에 걸쳐 왕실과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충성을 다하였다....
-
제내리에서는 일찍부터 경로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37년 11월 5일 방풍림계에서 경로잔치를 베푼 이후 간간히 이어오다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로 효친을 위한 마을 사람들의 노력은 남달랐다. 그리하여 1978년 3월에는 경로당을 세우자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준비하였다. 각 반장과 청년회원을 위원으로...
-
1945년 광복 직후인 12월 풍덕마을의 이부영 등 젊은 청년들 16명은 계몽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의 계몽활동에 뜻을 두고 일제하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면서 야학을 시작하였다. 야학은 계몽회 회원인 이상갑의 사랑방을 빌려서 시작하였는데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굳세게 밝게 바르게 생활하자는 뜻으로‘강(强)·명(...
-
제내리의 풍덕마을에는 과거 72동의 주거 가옥이 있었다. 이중 목조가옥이 9동, 토담집이 3동, 흙벽돌집이 40동으로 전통성을 지닌 가옥이 52동이나 되었다. 나머지 20동은 17동의 시멘트벽돌 가옥과 3동의 조립식인 현대식 주거 건물이었다. 그 중 전통성 있다고 생각되는 50여 동의 건축물 중 건축학적 및 보존적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민재의 목조가옥과 이희...
-
여기에 소개되는 고문서류는 풍덕마을의 방호3파인 이충배(李忠培) 씨의 댁에 있는 자료들이다. 이복영·이충배 씨는 숙종 때 벼슬을 한 이진항의 후손으로 이진항(李震恒)이 받은 7점의 교지와 1점의 점령을 소장하고 있다. 고문서류 외에 호패·화살통·화살집·가죽으로 만든 인궤(印櫃) 등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벼슬·시호·자격·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사령의 문서를 말한다. 문무관...
-
‘풍덕문화생활관’은 1996년 충주시에서 도농간 문화생활의 격차를 해소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누구나 살고 싶고, 다시 찾는 복지 농촌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시행된 시의 보조사업으로 건립한 것이다. 11월 30일 문을 연 풍덕문화생활관은 64.4평의 면적에 건강 관리실, 교양실, 샤워실, 조리 실습실, 농사정보실, 독서실 등 각종 시설이 아담하게 갖추어진 현대식 건물이다. 특히...
-
우리나라에서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언제 어디에서나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제내리에서도 마을 공동으로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열성이 일찍부터 있었다. 서당 교육으로부터 강당계를 조직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사립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문맹자를 없애겠다는 젊은이들의 열기가 가난한 농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선각자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교육에...
-
제내리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풍덕마을의 동쪽 언덕인 제내리 353번지에 입향조 이덕량의 장남인 이정지(李廷芝)의 묘와 묘역 입구에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고 여러 기의 묘가 있다. 이정지의 묘는 가장 상부에 있으며 10여 평의 규모에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묘역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마을쪽 언덕 위에 있으며 비각을 세우고 있어 이채롭다. 비석의 총 높이는...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기업인. 김구환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에서 빈농의 차남으로 태어나 계막사립소학교를 졸업한 후, 단신으로 상경하여 고학으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후 약사로 자수성가하여 한독약품의 상무이사와 부사장을 거쳐 부회장으로 재임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재경향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면서 고향의 크고 작은 일에...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낙인은 일제강점기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주부지부회장, 대한청년당 충주군단장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마을에 헌집을 구하여 공회당을 설립, 계막마을과 인근 마을의 문맹자를 모아 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61년 9월 3일 김낙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교육자. 김낙희는 1919년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와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1948년 김달수 주덕국민학교장, 이건학 주덕면장 등과 농촌 청소년의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주덕중학교 설립을 발의하였고, 1950년 3월 24일 충청북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주덕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 김달수는 1911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에서 가난한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김달수는 어려서부터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독학으로 사범학교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세였던 1930년 강의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시작으로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1934년에는 주덕공립...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헌(汝獻). 고려시대 판상사(判相事)를 지낸 김문적(金文迪)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고양공(高陽公)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부친을 위해 강도에게 죽음을 당한 효자 김극충(金克忠)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국왕을 호위하던 내삼청의 정도총경력(正都摠經歷)을 거쳐 1638년(인조 15) 도정(都...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행정가이자 경영인. 김태연은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에서 태어나 1925년 청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충주로 이주하였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사회사에서 1년간 기술을 연구하고 돌아와 미창(米倉) 청주지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충주군수가 되어 혼란기의 경제적 혼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947년에...
-
풍덕마을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한다. 그러던 중 15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인대군의 후손인 이덕량(李德樑)이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덕량[1576~1651]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 이름은 덕명이었다....
-
풍덕마을에서는 일찍부터 주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를 방풍림계에서 구입하여 활용하고 있다. 1953년 11월에는 양곡의 공판 시에 저울이 필요함으로 5개를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으며, 1958년에는 분무기(배부식)를 5개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다. 1961년 4월에는 미국 극동개발재단에서 동력 분무기를 기증받기도 하고, 1962년에는 양수기를...
-
1952년 당시 농림부장관이 주도하여 사단법인 ‘농촌실행협동조합’을 조직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덕이 이팔영, 이세영 등 10여 명의 회원을 모아 쌀 두말씩을 투자하여 충주책임자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금융조합연합회와 농민회, 농림부, 국회가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협동조합이 금융조합...
-
농촌진흥회는 1932년(壬申) 1월 29일 이성호(李誠浩) 외 44명이 벼 한 말(50전)씩 거출하여 종자돈으로 삼아 자력갱생과 저축 증대를 추진하며, 마을에서 혼인이나 상례 시에 반드시 사용하는 차일·교자·상여·남녀의 혼례복 등을 마련하고, 일이 있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상호 협조하며 상호부조(相互扶助)하던 조직이었다. 1954년까지 가입한 회원의 총수는 82명이었다....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산신당 모롱이에 있어 당우리(堂隅里)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자급이 가능한 넓은 들과 풍부한 용수를 바탕으로 의연하게 터 잡은 마을’이라고도 해석한다. 당우리는 본래 충주군 덕면(德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우(堂隅)[일명 당모루]·석우(石隅)[일명 돌모루]·유동(柳洞)[일명 버들골...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큰 골짜기가 있어 대곡(大谷), 또는 큰골이라 하였다. 대곡리의 중심이 되는 3개 마을 중 동산미(東山尾)는 최초의 마을인 엄동생골이 동산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대곡(原大谷)은 뒷산인 황술재를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게 흘러내리며 큰골을 형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맹동(孟洞)은 풍수적으로 매화자리에 속하는 길지였는...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고묘 유적. 충주 대곡리 유적은 보성파워텍 제2공장 건설부지에서 중앙문화재연구원 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유적이다. 대곡리 유적이 위치한 곳은 충주시 신니면과 음성군 음성읍의 경계에 자리한 가섭산[709.9m]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주변에 충주 견학리 토성, 견학리 유물산포지, 신중리...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장내리·조동·창동을 병합하고 북쪽의 가장 높은 산인 덕련산(德蓮山)[438m, 일명 자주봉산]의 이름을 따서 덕련리라 하였다. 충주군 덕면(德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내리·조동·창동을 병합하여 덕련산의 이름을 따서 덕련리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
제내리는 조선시대 충주목이 관할하는 38개면 중 덕면(德面)에 소속되어 있었다. 덕면이 관할하는 마을을 처음으로 기록한 지리지는 1759년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로 상동리, 중동리, 천서리, 천동리, 금곡리 등 5개리가 기재되어 있고, 그 이후에 발행한 지리지에는 아래 표와 같이 마을 이름이 늘거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표를 보면 『여지도서(輿地圖書)』...
-
일제강점 말기에 사립학교가 문을 닫은 후 제내리를 비롯한 인근마을 학생들은 멀리 요도천을 건너 통학하여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취학 아동 수도 크게 늘면서 1946년 초부터 초등학교의 설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대상지로는 이웃한 성동의 청룡안과, 장록개 흰모루, 풍덕의 마당재가 물망에 올랐다. 각 당...
-
농촌마을은 지리적·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기장 기초적인 농민의 생활공동체이다. 제내리에서도 농경을 중심으로 지리적·지형적 특성에 따라 경작지에 인접한 풍덕마을에 정착함으로써 농촌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은 농경에 기초한 노동교환, 상호부조, 문화교류 등과 같은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상호작용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을은 부락민들 사이의 일체감과 동질감을...
-
현재 마을단위로 형성되어 있는 최하위의 행정구역은 리(里)이다. 이를 행정리라 하는데 제내리는 성동과 풍덕 등 두 개의 자연마을을 결합하여 하나의 리가 되었다. 리(里)의 연원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된다. 즉 군(郡), 현(縣)을 두고 현(縣) 밑에는 면(面, 또는 방(坊),사(社)) 그리고 리(또는 촌(村), 동(洞))로 편성하였다. 리장, 동장은 리정, 동수, 존위, 약수, 통수,...
-
제내리 풍덕마을이 선구적인 농촌마을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를 이어 마을을 이끌어 온 선구자적인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풍덕마을에는 마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이장을 비롯하여 각종의 모임들이 조직되어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며 발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각종의 모임들은 운영해 가는 과정에서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
-
마을 숲이 된 방풍림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만남의 공간이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와 휴식처를 제공하며, 특히 1971년 새마을 회관이 건립되면서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공간이자 영농에 관한 정보교환의 장소요, 마을 주민들이 화합을 도모하며 공동 행사를 치룰 수 있는 집회소였다. 그야말로 마을의 중심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풍림에는 고목으...
-
제내리의 방풍림은 마을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공동의 장소가 되었다. 마을 숲이 된 방풍림은 무더운 여름철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와 휴식처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각종 영농에 관한 정보교환의 장소이자 마을 주민들이 화합을 도모하며 공동 행사를 치룰 수 있는 집회소로서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그동안 회의와 토론의 장으로 쓰이던 공회당이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함께...
-
입향조 이덕량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이름은 덕명(德明)이라 했으며, 어려서는 현덕(玄德)이라 불렀다가 다시 덕량으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의 9세손이다. 만년에 벼슬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풍덕의 동북쪽 사락리 산 60의 엄동 황금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정국군 박위(朴威)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박윤정(朴允貞)이고, 조부는 박응규(朴應奎)이며, 아버지는 박대현(朴大顯)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 병과 제1,724인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갔을 때부터...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 조동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 박팽년의 부인 천안전씨의 묘. 박팽년 부인 전씨 묘는 주덕읍 덕련리 조동마을 뒷산의 과수원 옆길로 도랑을 건너 10m 정도 가면 있다. 토광묘의 형태로, 묘의 상태로 미루어 근년에 장방형 화강암 둘레돌을 두른 것으로 추정된다. 장방형 봉토분의 형태로 근년에 두른 듯한 둘레돌은 177×246×42㎝의 크기...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증조할아버지는 박시환(朴時煥)이며, 할아버지는 효력부위 박성구(朴聖耈)이다. 생부는 박필하(朴必夏)로, 박필한(朴必漢)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남궁씨이다. 1653년(영조 29) 문과에 을과 제4인자로 급제하여 1757년 성균관학록, 1759년 성균관전적 겸양현고주부, 1758년(영조 34) 성균관학유, 1759년...
-
제내리에는 몇 개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가금류 육가공을 하는 ‘미림’, 석재 가공업을 운영하는 ‘지이엠 바이오 산업(주)’, 축산기계를 생산하는 ‘(주)풍덕 축산 기계’가 영업 중이다. 그리고 두 개의 미곡처리장이 입주해 있다. 하나는 농협 투자 시설인 주덕·서청주·노은 연합 미곡처리장으로 제내리 서쪽 끝자락 부근의 장록리 마을 입구에 있다. 이곳에서는 ‘남한강 쌀...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에 있는 비. 풍덕마을 입구에는 본래부터 숲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하자 1906년 이석호(李錫浩) 등의 마을 사람들이 호당 겉보리 한 말씩을 추렴하여 숲을 조성하고 방풍림이라 명하였다. 1907년에는 수재, 화재, 풍재 등을 방지하고 위생을 철저히 하여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식으로 방풍림계를 결성하였고, 10개 조의 방...
-
제내리는 우등산 자락이 서남진하며 펼쳐놓은 낮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밭을 일구어 밭농사를 발달시켰다. 앞의 〈표4〉에서 살펴보았듯이 제내리에서는 논농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동안 밭농사는 부수적 농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밭농사의 주된 작물은 고추, 참깨 등의 잡곡과 담배·인삼 등의 특용작물을 비롯하여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일을 재배하였다. 과일은 사과를...
-
제내리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다. 그것은 마을 앞에 넓게 발달된 평야에 방죽뱀이를 시작으로 공신앞들, 진개들, 사갑들이 펼쳐있어 넓은 들판을 이루었고, 우등산의 산자락이 치마폭을 드리운 듯 많은 밭을 일구어 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들 가운데로 흐르는 요도천은 비옥한 옥토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넓은 대지를 풍요로운 논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러므로 제내리의 주민들은 그동안...
-
제내리에서는 1952년 이순목 여사가 주동이 되어 가정생활을 개선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하자는 취지로 부녀회를 조직하고 부녀 계몽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과 병행하여 1961년에는 이봉영 여사가 국민재건운동의 일환으로 관 주도적인 재건부녀회를 조직하여 운영하였으나 1965년에 해체하고 앞선 부녀회로 흡수되었다. 그 후 1972년에는 개발위원회와 함께...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사람들이 살지 않던 황금곡(현재 사락리)을 처음 개척한 사람들은 함종어씨, 의령남씨, 상주박씨였다고 한다. 함종어씨 입향조인 어맹종(魚孟淙)의 배위(配位)는 의령남씨인데 외조부가 태종의 첫째 왕자인 경녕군(敬寧君)이다. 경녕군의 묘소가 음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이곳에 터를 잡은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1898년에 발...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학보 처 문화유씨 열녀 정려문. 충강공 이상급의 5대 손부인 문화유씨는 부군인 이학보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는 등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타계하자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이 끝난 후 문화유씨는 소복으로 갈아입고 26살의 나이로 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영조가 불...
-
일제의 식민 치하에서 민족정신의 앙양을 위해 1921년 4월 제내리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성동 평전마을에 신성학원(信成學院)을 세우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민호, 서천순 선생님이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선생님은 모두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일제에 의하여 구속되면서 학교는 3년 만에 자동 폐교되었다. 신성학원이 폐교되자...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정자. 삼연정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三)은 향리에 덕련산(德蓮山)이 있고 향리 역시 덕련리(德蓮里)이며 이교면의 호가 연은(蓮隱)인지라 호를 차용하여 삼연정(三蓮亭)이 된 것이다. 주덕읍 덕련리 조동마을 안쪽 약 100여 평의 터에 동문수학한 이교면의 문하생들이 동문계를 조직하여 서당 터에 세운 팔각정으로, 1...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 교육과 상호간의 친교로 우의를 다지며, 지역사회에 봉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2년 서명석 장로의 집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1936년 서명석 장로의 집터에 흙벽돌 초가 33㎡를 건축하였고, 1968년 이종현 목사 때 흙벽돌 기와 33㎡를 건축하였다. 1969년 이성모...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상청리·삼방리·평지리·능말·미나기·배나무골·먹벅골을 병합하고 상청리와 삼방리의 이름을 따서 삼청리라 하였다. 충주군 주류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청리·삼방리·평지리·능말·미나기·배나무골·먹벅골을 병합하여 상청리와 삼방리의 이름을 따서 삼청리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하였다. 1956년 7...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묵동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단군제. 단군전(檀君殿)은 주덕읍 삼청리 산24번지 묵동에 있는 건물로 숭령전(崇靈殿)이라고도 한다. 1945년 원용선(元容璿)이 어래산에 자비로 창건한 후 1961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건축한 사당으로 지방 유림이 중심이 되어 단군제를 지내 오고 있다. 건물에는 ‘숭령전(崇...
-
1970년 10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시작된 이른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1970년 가을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에 일괄적으로 시멘트를 지원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총의에 따라 공동사업에 쓰도록 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물리적 환경 개선은 물론...
-
동족 마을인 제내리에서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서 개량 서당교육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858년(철종 9) 10월 16일에 마을의 30~40대의 어른들이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걱정하던 끝에 강당계를 조직하기로 협의하고 29명의 계원을 확보하여 각각 2전씩을 모아 22일 결성하였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하는 관례를 치른 후 본전을 납입하여야 가입이 허용된다고 하는...
-
제내리가 다른 마을보다도 훨씬 살기 좋은 시범마을이 된 뒤에는 마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가며 주민을 위해 일을 하고 앞서가는 생각을 갖고 있는 지도력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려고 추진한 소방기의 구입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제내리에서는 1928년 12월에 4인 완용 펌프식 소방기를 구입하였다. 풍덕에서는 구입대금의 반액인 5...
-
수구란 풍수지리에서 좌청룡, 우백호 사이의 벌어진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 공간을 통해 출입하는 물의 통로를 가리킨다. 수구가 너무 넓거나, 엉성하고 열려 있으면 마을이나 집터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지고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도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
방풍림이 숲을 이루며 마을의 풍요와 편안함이 함께함에 따라 풍덕마을 주민들은 숲의 보호와 육성을 위한 관리에도 열성적인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 왔다. 다음의 사례들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7월 수구막이 숲이 고사하자 다시 조림하고자 이석호 등이 겉보리 한 말씩을 걷어 기금을 조성하였다. 이 기금에 공말과 속담말의 협조를 받아 제내리 306번지의...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신양리는 여러 지역을 병합하여 신설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대리와 양지리의 앞 글자를 따서 신양리라 하였다. 1914년 지방 행정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에 따라 주류면의 5개 리(신중리·신양리·창전리·대곡리·삼청리)와 덕면의 6개 리(당우리·덕련리·장록리·제내리·사락리·화곡리)를 병합하여 주류면과 덕면의...
-
과거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지나치게 높고 이자가 장리(연리 5할)의 고율이었기 때문에 땅을 가지지 않거나 돈이 없는 소작농과 가난한 농민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농지 개혁으로 소작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농촌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고리채로 인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풍덕마을에서는 1961년 1월 풍덕신용조합을 창립하여 마을 주민들 스스로...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충주군 주류등면에 속하였던 망청리, 신대리, 창전3리, 창전7리의 동네 일부를 분할하여 합쳐 만든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중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주군 주류등면에 속한 망청리, 신대리, 창전3리, 창전7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중리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되었다. 1960년에 정식 행정구역...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낙향한 문신. 안경열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옥(景玉)이요, 호는 하산(荷山)이다. 참봉 안택범(安宅範)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파주목사 안성연(安性淵)이며, 아버지는 통덕랑 안정교(安廷敎)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재관(李載寬)이며, 생부는 중추원의관 안정료(安廷燎)이고 생모는 창영성씨(昌寧成氏) 성덕입(成德立)이다....
-
1966년 이세영이 농기업 2차 연도의 보조사업으로 양곡창고의 건립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이 없었다. 이에 창고가 세워지면 공판장 인가를 받아보겠다고 설득하자, 공판장 인가를 먼저 받으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판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진정서를 관계요로에 제출하자, 주덕 공판장에서는 4㎞ 안에는 허가할 수 없으며, 또한 동일 면에는 불가하다는 회신을 전해왔다....
-
충주에서 서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주덕읍 서북쪽으로 새로 확장된 서울 방면 3번 국도를 지나 500m쯤 더 가면 오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우회전하여 접어들면 525번 도로가 북쪽으로 신중리의 넓은 들을 가로지르고, 신설된 3번 국도 지하도를 지나면 주덕평야의 넓은 들을 만난다. 주덕평야는 청원군의 미호평야와 오창평야에 이어 충북에서 세 번째로 큰 평...
-
마을 앞 남쪽으로 넓게 트인 주덕평야가 펼쳐있어 넉넉함을 더해준다. 버드내들, 구레자리들이 자리 잡은 넓은 들판이 있기에 사람살기 넉넉한 터전이 되었다. 마을 앞 방죽뱀이를 시작으로 공신앞들, 사갑들, 진개들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한줄기 젖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대지의 목마름을 풍족하게 적셔준다. 이름하여 요도천(堯渡川)이다. 요임금이 건넌 강이라서 이름 붙였으니, 흐르...
-
풍덕마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곧장 오르면 풍덕마을이 나타나는데 북위 37.5도, 동경 127.5도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멀리 국사봉[166m]이 보이고 화개산[190m] 앞쪽에 가장골산이 자리 잡고 앉았으며, 서쪽으로 장중하고 높은 가섭산[710m]이 멀리서 가려주어 황새동산이 자리하였다. 남쪽 멀리에는 어래산[399m]이 마주앉아 마을의 안산을 자처하였다. 북...
-
제내리에서는 농촌 마을에도 유아원이 필요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1945년부터 유아원 설립을 군과 협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7년 제내리 농협의 발족을 계기로 이동식 전 주덕면의회 부의장이 유아원 설립을 다시 추진하였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였다. 1960년도에 지역사회 개발 시범부락으로 선정되면서 농번기에 탁아소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아원 설립을...
-
제내리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풍덕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토계원지이다. 토계원은 대소원과 용원으로 통하는 중간지점에 설치되어 모도원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하였다. 지금은 논으로 변한 사갑들 앞의 들 가운데 어디쯤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원이 있는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이 마을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수년 전 농경지 정리사업...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지방행정가. 이건학은 버들골사립학교에 교사로 3년여 근무한 후 고시(考試)에 합격하여 청주도청강습소에서 1년 연수를 마치고 충청북도 중원군 주덕면사무소 권업주임(勸業主任, 지금의 산업계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직후 제2대 주덕면장으로 근무하면서 대소원역을 주덕역으로 개칭하고, 충청북도 중원군 이류면[현 대소원면] 대소리 소재의 금융조합을...
-
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이여연(李汝淵)이다. 이국헌은 1660년(현종 1) 증광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1년(숙종 7) 금산군수로 재직하며 선치(善治)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1691년(숙종 17)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주치(州治)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의창(義倉)인 양진창...
-
조선 중기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충주 입향조.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현덕(玄德), 초명은 덕명(德明), 자는 하경(厦卿). 진안대군의 후손으로 슬하에 이연지(李延芝), 이연명(李延蓂), 이연래(李延萊) 3남을 두었다. 1576년(선조 9) 충청도 괴산에서 태어난 이덕량은 1590년대 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로 이주하여 정착한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입향조이다. 관직으로는 행용양위...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풍덕마을 방풍림계를 창설한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는 비.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의 허함을 막기 위하여 1906년 호당(戶當) 보리 1말씩을 추렴하여 계를 만들어 방풍림을 창설한 참봉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풍덕마을 주민들이 1955년 3월 창설 50주년 비를 건립하였다. 주덕 오거리에서 노은 방향으로...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료인이자 자선사업가. 이수득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뒤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의사가 되었다. 27세에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주덕의원을 개업하여 하루 80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는데, 상당수는 무료로 진료를 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교육과 자선사업에도 관심을...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정치인이자 행정가.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청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코넬대학교 노사관계대학원을 수료하였다. 한국노총 부위원장을 거쳐 제3대 노동부차관을 지냈다.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자유민주연합의 당무위원·노동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교육자. 이용학은 충청북도 의원과 충주향교 전교를 지낸 이원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주중학교와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원주 상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충청실업전문대학이 개교할 때 학교 설립을 주관하였으며, 학장으로 추대되어 학교 경영에 매진하였다. 1997년 지병으로 6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교육자. 이우영은 경성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충북선에서 철도국 기관사로 일했다. 해방 후 신병으로 요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건강이 회복되면서 덕신초등학교 교사 및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학교의 기반을 닦았다. 지역사회 개발계장으로 8년간 일하면서 지역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공무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나 주민들의 가...
-
이형배는 육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오로지 고향만을 지켜온 토박이 농업인이다. 그는 여러 형제들과 함께 성장했기에 인성이 바르고 양보심과 인내심이 남다른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마을에 이름이 나 있었다.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라서 돈독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학교졸업 후 줄곧 고향에 남아 농업 발전에 최선을 다하였다. 농사뿐만 아니라 축산업도 겸함...
-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서(聖瑞). 아버지는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의 입향조인 이덕량(李德樑)이다. 이정지는 어려서부터 밖에 나가 놀다 돌아와도 부모님께 절을 올렸으며, 어머니의 병환에 밤낮으로 의대를 풀지 않고 간병하였다. 돌아가시자 상례를 어긋남이 없이 하였다. 아버지가 병환 중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가뭄에 잉...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 입향조인 이덕량(李德樑)이며 아버지는 이정지(李廷芝)이다. 이진열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첨절제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진열의 공으로 할아버지인 이덕량은 호조참의에, 아버지 이정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형제들도 통덕랑의 벼슬을 받았다. 1723년(경종...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진안대군의 10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향조인 이덕량(李德樑)이고, 아버지는 이정협(李廷莢)이다. 양지현감을 지낸 김시필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고 기개가 당당하여 무인의 기질을 보여 주었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8년(숙종 4) 관직에 올랐다....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 신덕로에 있는 일제강점기 덕면의 면장을 역임한 이희명의 공덕을 기리는 비. 이희명(李羲命)은 주덕읍이 통합되기 전 덕면의 면장을 1908~1910년, 1911~1914년 두 차례에 걸쳐 역임하였는데, 이 때의 선정을 기려 덕면 사람들이 세운 불망비이다. 본래는 1914년 4월 주덕읍 제내리 성동마을 입구 지방도 599호선 변에 세...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대한불교 법화종 소속 사찰. 장왕사는 1983년에 창건되었는데, 절이 위치한 주덕읍의 북쪽은 노은면과 중앙탑면, 서쪽은 신니면, 동쪽은 대소원면, 남쪽은 음성군 소이면과 괴산군 불정면에 접한다. 북쪽 노은면과의 경계 지점은 우리재, 소고개, 질마루재 등이 솟아 있는 높은 산지를 이루고, 계곡에는 덕련리의 벌미못, 발자널못,...
-
광복 20주년이 지난 1965년에 제내리가 농기업 선도 시범 마을에 선정되어 1차연도 사업으로 전기가설이 책정되었다. 전기는 마을 사람들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외부의 가설비는 정부 보조였으며, 내선공사비는 자부담으로 하되 200등 이상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덕 구장 이복영이 일본 농업을 견학 중이었으므로 구장을 대신한 이세영이 풍덕에서는 그 숫자를 채울 수 없었으므로 성동...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교육자. 전완근은 아버지 전시명과 어머니 김경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살미국민학교 훈도를 시작으로 교직에 발을 내딛었다. 약 40년간 교단과 교육 관련 업무에 종사하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학력 신장과 깨끗하고 아름다운 학교 환경 조성에 힘썼다. 부임하는 곳...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집성촌. 제내리(堤內里)는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한 법정리이다. 이전에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죽안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제내리다. 제내리는 풍덕·성동·대촌 3개의 행정동(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주이씨 제내리 집성촌은 1590년대 중반 조선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의 9세손 이...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대곡리 맹동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려문. 초계정씨 정수동 처 전주이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03년(순조 3) 명정(命旌)되어 건립한 건물이다. 전주이씨는 어느 날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의심하여 시아버지를 집 뒤 서당에 은거케 하였는데, 시아버지에게 병이 발병하자 새벽 일찍 약을 달여 남편과 같이 간호하였고,...
-
제내리에는 마을에 다음과 같은 풍덕전거(豊德奠居)가 전해지고 있다. 마을 개척자인 이덕량이 방죽안을 개척하여 성동·대촌·풍덕의 세 마을에 터를 닦아 세 아들에게 각기 나누어 장남은 성동에, 차남은 대촌에, 그리고 막내는 자신이 자리 잡은 풍덕에 살게 하였다. 그런데 이덕량은 막내를 제일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가장 좋은 터를 잡아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풍수가에게...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대곡리 석포마을에 있는 전희철의 공적을 기리는 비. 전희철(全熙喆)은 천안전씨(天安全氏) 곡산공파(谷山公派) 문중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여 족보 발간, 사당 건축, 신도비 건립 등의 공적이 있고 산수국민학교를 세울 당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성품이 온화하고 양순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검소하므로 천안전씨 곡산공파 문중...
-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육영사업가. 정인시는 1883년 정관조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1945년 1월 화재로 소실된 주덕초등학교 재건축을 위해 아들 4형제와 함께 15개 교실을 건축할 수 있는 비용을 희사하여 지역의 교육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1990년 3월 30일 정인시의 향토 사랑과 교육 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주덕면민과 졸업생들이 주덕초등학...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제내리(일명 방죽안)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세거지로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온 이덕량(李德樑)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여지도서』에 보면 덕면은 6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6개 리는 상, 중, 천서, 제내, 황금곡, 계막이다. 1898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제내리가 속했던 덕면이 석우, 당우, 유동...
-
제내리는 주덕읍 11개 법정리 중의 하나이며, 성동과 풍덕의 2개의 행정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동이 28통이고 풍덕이 29통이다. 2008년 3월 현재 98가구 258명이 살고 있으며 남자가 139명, 여자가 119명이다. 주덕읍 전체인구가 6,480여명이니 제내리 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5% 정도이다. 제내리의 주민 258명 중 성동에 109명(남자 56명, 여자...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과 주덕읍, 이류면에 걸쳐 있는 평야. 주덕들이라는 명칭은 1914년 충주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주덕면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났다. 그 전까지 이 지역은 통합된 명칭 없이 지역에 따라 버드내들, 장록개들, 계막들, 망청개들, 음버들 등으로 불렸다. 주덕들은 신니면 문락리 수레의산[678m]에서 발원하는 요도천이 주덕읍 지역을 지나...
-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주덕읍은 남쪽은 과거 주류면 지역이고 북쪽은 과거 덕면 지역이다. 면적에 비해 들이 넓고 교통이 편리해 충주시 읍면 중 인구가 가장 많다. 1914년 지방 행정 조직 개편에 따라 충주군 덕면과 주류면을 통합하여 충주군 주덕면이라 하였다가,1995년 충주시 주덕읍으로 승격되었다. 1872년에 나온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에...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재래시장. 주덕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이다. 주덕장이 서기 이전에는 전통적으로 원 터였던 인근 대소원면의 대소원장이 크게 열렸다. 대소원장은 4일과 9일에 장이 섰기 때문에 주덕장은 대소원 장날을 피해 3일과 8일에 열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대소원 지역에서 주덕장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소원과...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 선교 사업을 수행하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한 양로, 보육, 아동복지, 장학 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48년 11월 24일 최용복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모태였다. 1949년 3월 2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회 충북노회에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0년 2월 17...
-
1971년 초 출향인사인 이달영 원장(당시 강릉에서 동인의원 운영)이 고향에 온 기회에 우연히 회관 이전 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마을의 공공건물이 모두 숲거리에 있으나 유독 공회당만이 떨어져 있어 불편을 겪고 있었으므로 마을주민들이 옮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전 비용으로 30만원을 희사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상립(충주에서 충...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위탁 영농 업체. 기업적 농업 경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유통 판매를 병행함으로써 농업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90년 제정된 ‘농어촌 개발 특별조치법’에 5명 이상의 농민이 일정 규모의 시설과 장비를 갖추면 영농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1991년 3월 9일 설립되었다. 회사 설립 등...
-
지역사회개발 사업은 1958년 10월 이 사업을 추진할 ‘지역사회개발중앙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도 및 군 단위의 지역사회개발위원회가 결성되며 시작되었다. 관 주도로 시작된 지역사회 개발사업은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군의 관계과장, 교육감, 농사교도소장, 협동조합장 및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된 4명의 지도원으로 ‘지역개발군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밑에 시범부락의 부락민으로 구성된 ‘지...
-
제내리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집성촌으로 번성을 이루어 왔다. 이덕량의 부친인 이식(李軾)을 시조로 방호파를 이룬 것이다. 이처럼 전주이씨가 대종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의 공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마을에 존재했던 대동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동계의 역할을 종회가 중심이 되어 풀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성동마을의 경우에는 타성의 유입이...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의 이름은 대동창(大同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또한, 옛날에는 버드나무가 많아 은버들마을[銀柳村]이라 하였다고 한다. 본래 충주군 주류면(周柳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창전1리·창전2리·창전3리·창전4리·창전5리·창전6리·창전7리로 나누어 있다가 동산리의 일부가 통합되어 창전리로 개편되었다. 195...
-
주덕에서 노은으로 연결되는 52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2.2㎞ 지점에 이르면 풍덕마을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이곳 버스정류장 옆에는 풍덕마을 안내 입석과 ‘전주이씨진안대군파세거지(全州李氏鎭安大君派世居地)’라는 표지 입석이 마주 서서 오는 이를 반겨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황새동산과 서방모랭이를 끼고 동북쪽으로 이어지다 숲거리에 와서 두 갈래 길이 된...
-
향약(鄕約)이란 향촌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선조들이 향촌에 살면서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고 약속한 것을 일컫는다. 향규, 향약계, 향안, 동약, 동계, 동안, 족계, 일향약속, 약속조목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향약은 서로 간에 유교적인 도덕을 선양하기 위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바탕으로 지방자치 정신을 함양하고 향민의 화합을 위...
-
현재 제내리에는 2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풍덕에는 53가구 149명(남자 83명, 여자 66명)이, 성동에 45가구 109명(남자 46명, 여자 52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간 제내리를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살아온 이들의 호구 변동을 각 지리지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 〈표2〉와 같다. 위의 표를 보면 1759년에는 3,583명의 주민 중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 보다 1천여 명...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에 있는 홍기원의 공덕을 기리는 비. 홍기원이 고향 후세들을 위하여 사립학교 터를 희사함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1994년에 홍기원 송덕비를 세웠다. 주덕읍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당우리 쪽으로 우회전한 후 원당우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유동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 입구에 비가 세워져 있...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화곡리는 화개산 아래 골짜기에 위치하여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본래 충주군 덕면(德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중리(中里), 계막리(桂幕里), 이암리(耳巖里), 제내리(堤內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곡리라 부르고 주덕면에 편입되었다. 1990년 1월 1일 행정리인 계막, 화곡1...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계막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계막은 주덕오거리에서 요도천 쪽으로 우회전해서 요도천을 건너면 바로 나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풍산김씨 집성촌으로 대동단결이 잘 이루어지는 마을이다. 계막 입구 삼거리에서 화곡리로 가는 길로 200~300m쯤 가면 마을 끝 부근에...
-
1956년까지만 해도 풍덕마을에는 라디오가 한 집도 없었다. 유성기가 2대, 신문 구독자가 겨우 세 집 뿐으로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면사무소나 조합의 회의에 참석하고 온 대표가 소식을 전하려면 동산에 올라가서 회의하러 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전달 방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행정적 전달...
-
1932년 풍덕과 성동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공회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풍덕마을의 이칠영(李七榮)이 제내리 303번지의 밭 200평을 부지로 희사함으로써 풍덕마을에 세우게 되었다. 풍덕에서는 방풍림계에서 건축비의 반액(62원 50전)을 지불하였다. 그 후 1934년에는 동네의 학생들이 멀리 용원과 대소원으로 통학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사립학교를 건립 운영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