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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0년 진주농림학교 2학년 재학 중 기숙사 학생 48명으로 구성된 토론 연구회의 회장을 맡아 3·1운동 당시의 진주 읍민과 진주농림학교 학생들의 활약과 항일 독립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1920년 5월 29일 동급생 문위동(文渭東), 신영안(申英安) 등과 모의하여 제2차 진주 독립 만세 운동을 1920년 8월 30일 천장절(天長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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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8년 3월 23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소년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16일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탈옥시키기 위해,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 전병건(全秉健)의 지령에 따라 300여 명의 조합원을 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검거되었다. 193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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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여(鼎如), 호는 암서(巖棲). 제숙공(薺肅公) 김곤(金梱)의 후손이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학문이 깊었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고종(高宗)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조선시대 각 진영의 으뜸 장수인 영장(營將)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수직(壽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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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순경(舜卿), 호는 몽천(蒙泉), 삼옥당(三玉堂).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김재연(金在衍)의 동생이다.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에 밝았다. 유정재(柳定齋)의 문인(文人)이다. 양산(陽山) 조충식(趙忠植), 동계(東溪) 한긍인(韓兢人),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몽천재운(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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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독립단에서 함경도로 특파된 박경구 등과 함께 함경남도·함경북도를 한 구역으로 하는 대한청년단 연합회 함경도 의용대를 조직하여, 연락·군자금 모금·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7일 공갈 혐의와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경찰서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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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서울에서의 3·1운동에 참여한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밀지에 따라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닌 채 통도사에 도착하여 승려·유림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여, 3월 13일 신평 장터에서 장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진옥은 김상문(金祥文)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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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눈병을 앓다 시력을 잃어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하자 온갖 약을 쓰고 정성을 다하여 북두칠성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어머니의 눈이 갑자기 밝아졌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효성에 감천(感天)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경상도에서 김칠득(金七得)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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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1년에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에 최달수(崔達守) 등의 권유로 소년부에 가입하였다. 1932년 3월 15일 양산경찰서에서 ‘소작료 4할 결의’를 하였다는 이유로 조합원 간부 17명을 구류 처분하자, 전병건(全秉健)의 지시에 따라 16일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김태근도 주동자 김장호(金章浩) 등과 함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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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응오(應五), 호는 송강(松崗).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여 우러러보았다. 무덤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시묘를 하였다. 조선 철종(哲宗) 때 충훈부·중추부·의금부에 속하여 벼슬아치의 감찰 및 규탄을 맡아 보던 종5품 벼슬인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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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유학자. 자는 여윤(汝胤), 호는 경산(耕山). 나이인(羅以仁)의 후손이다. 성품이 엄격하면서도 너그럽고 온화하였으며, 마을에서 유학자의 본보기가 되었다. 고종(高宗)이 나라 일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닐 때 불러서 마주 대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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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수성(壽城). 호는 북헌(北軒). 양절공(養節公) 나익희(羅益禧)의 후손으로 하동부사 나순손(羅順孫)의 7대손이며, 참봉(參奉) 나경문(羅景文)의 고손자이다. 안시명(安諟命)의 손자사위이다. 천성이 착하였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성리학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뜻을 밝혀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손처눌(孫處訥)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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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6년 박경영(朴瓊榮)과 김남이(金南伊)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심금순(沈今順)과 결혼하였으나, 사별한 후 최명이(崔名伊)와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947년경부터 양산시 원동면 원동초등학교 앞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으며, 1959년 1월 타계하였다. 박대희(朴大禧)는 일제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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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민오(朴玟悟)는 경성 불교중앙학림에 유학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신상완 등과 함께 전도승려의용군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유력 승려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파견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김법린 등과 『혁신공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각지로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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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효자.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형제 사이에 우애를 두텁게 하여 나라로부터 조세와 부역을 면제받았다. 이에 마을에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역의 관리인 역승(驛丞)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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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자는 욱여(旭汝)이고, 호는 법촌(法村). 음덕(蔭德)으로 벼슬을 한 박이혁(朴以赫)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박경홍(朴景洪), 아버지는 박세영(朴世英)이다. 법도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도리로써 일을 처리하였다. 덕망이 있어 사람들이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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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화선(化善).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후손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재주와 기예가 남달랐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남김없이 읽어 학문이 뛰어났다. 자신을 연마하여 행동을 깨끗이 하였고, 후진을 깨우치는 데 앞장서 친구들이 존중하여 우러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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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임갑(朴壬甲)은 1902년 아버지 박도전(朴道銓)과 어머니 문지순(文池順)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양서경(梁瑞慶)과 결혼하여 양산시 남부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1990년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타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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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상욱(沈相郁)은 1881년 아버지 심량택(沈亮澤)과 어머니 손경순(孫庚順)의 장남으로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우초(友焦)이다. 한학을 수학하고, 토곡산에서 은신술과 축지법을 통달하면서 수도하였다. 1911년 박민화(朴珉和)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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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주. 호는 구암(龜庵).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안우(安宇)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자, 두 아들 안시명(安諟命)·안이명(安以命)과 조카 안신명(安信命), 사촌 안도수(安導琇)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병사를 모집하여 양산을 지켰다. 구포산과 금정산에서 왜적을 베었고, 양산시 동면 석산리의 은동석굴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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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상수(安上水)는 1879년 아버지 안덕진(安德振)과 어머니 김재일(金在日)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순악(金順岳)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1939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교리에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양산의 항일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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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명호(梁明浩)는 1870년 아버지 양갑주(梁甲柱)와 어머니 오분출(吳分出)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18년 김순등(金順登)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1946년 타계했다. 양명호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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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선비. 조선 전기 성종 때 도승지를 역임한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1439~1504]의 후손이다. 양의화는 선현을 존중하여 우러러보며, 학문과 덕행에 정진하였다. 송담서원에 힘을 쏟았으며, 유림을 주관하여 임금께 편액(扁額)을 청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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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춘도(楊春到)는 1902년 아버지 양경률(楊敬律)과 어머니 고상남(高尙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니면서 승적(僧籍)을 가졌다. 1937년 박무금(朴武今)과 결혼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양춘도는 1919년 3월 18일 동래시장 만세 운동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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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수만(尹守萬)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에 항거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여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윤수만은 이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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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개득(李介得)은 190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永)과 어머니 권보배(權寶培)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복쇠(金福釗)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며, 1973년 양산시 북정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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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규린(李圭麟)은 1856년 아버지 이하찬(李夏燦)과 어머니 박용당(朴用堂)의 차남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능통하여 유학자로 이름이 났다. 1927년 박수(朴銖)와 결혼하였으며, 1937년 양산시 주남동에서 타계하였다. 이규린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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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규홍(李圭洪)은 189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榮)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농(白農)이며, 자는 도숙(道淑)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9년 5월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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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춘(李萬春)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만춘은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만춘은 이 일로 검거되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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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재(李鳳在)는 대구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공산주의자 장적우(張赤宇)에게 포섭되어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사유 재산을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27년 12월 대구부 남산정에서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책임자 장적우 등의 강의를 듣고 신우동맹을 결성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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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희(李元熙)는 1914년 아버지 이의문(李義文)과 어머니 류복금(柳福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다방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제2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서울의 대동상업학교(현 대동정보산업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1939년 조복조(趙福助)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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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희우(李禧佑)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희우는 다른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희우는 이 일로 검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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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수만(林壽萬)은 1903년 아버지 임갑이(林甲伊)와 어머니 김소임(金小任)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조봉아(趙奉兒)와 결혼하여 2남 6녀를 두었으며, 1992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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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과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이 모의하여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8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전봉호(全鳳浩)는 이갑이(李甲伊) 등 일신여학교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여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때 전봉호는 주동 학생으로 검거되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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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정착한 노동 운동가. 전세집(全世執)은 1894년 함경남도 원산부 명석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월남하여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 거주하였다. 1929년 원산부 원산노동연합회의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결행하자 일본 자본가들이 일제 어용 단체인 함남노동회를 동원하여 파괴 공작을 자행하였다. 이에 원산노동연합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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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영(鄭圭永)은 1883년 아버지 정순용(鄭淳鎔)과 어머니 백아지(白牙只)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윤석(胤錫)이며 호는 낙산(洛山)이다. 한학을 배우고 낙산한의원을 경영하였다. 1909년 2월 변봉련(卞鳳連)과 결혼하였으며 부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다 1959년 타계하였다. 묘지는 화룡 가마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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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기옥(鄭冀鈺)은 1906년 아버지 정재관(鄭在瓘)과 어머니 김복림(金福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이명련(李命連)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으며, 1999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타계했다. 1932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다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구출하는 작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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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주봉(鄭周奉)은 1901년 아버지 정갑룡(鄭甲龍)과 어머니 정아기(鄭兒其)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김갑선(金甲先)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이후인 1944년에는 배희이(裵喜伊)와 재혼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서 타계하였다. 정주봉은 1919년 3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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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진영(鄭鎭永)은 1916년 아버지 정원모(鄭原謨)와 어머니 박인수(朴因洙)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순임(丁順任)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1982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타계했다. 정진영은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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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지용준(池龍俊)은 1894년 아버지 지재연(池載演)과 어머니 박치숙(朴致淑)의 막내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승적을 가졌으나, 1924년 김기장(金琪莊)과 결혼하였다. 해방 후 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2동의 동장을 역임하였다. 금정중학교의 범어사 3·1운동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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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차상명(車相明)은 1895년 아버지 차인수(車仁守)와 어머니 이수년(李守年)의 장남으로 동래군 동래면 교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범어사에 들어가 명정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 최학전(崔學傳)과 결혼하여 외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945년 부산시 동래구 남산동에서 타계했다. 서울에서 거족적인 3·1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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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수(崔達守)는 1916년 아버지 최성운(崔聖運)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김기출(金己出)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으며, 1962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서 타계했다. 최달수는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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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동선(韓東善)은 1915년 아버지 한암외(韓岩外)와 어머니 손숙이(孫淑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9년 김차열(金次烈)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1966년 타계했다. 한동선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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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함성관(咸成寬)은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구출 작전에 다른 조합원과 함께 가담하여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벌금 5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