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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에 속하는 현포리의 옛 지명. 동쪽의 촛대바위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치면 바닷물에 검게 보이는 데서 유래되었다. 개척 때 배를 타고 와 보니 대풍감에서 노인봉까지의 약 15리나 되는 해안선이 까마득하게 보여 지명을 가문작지 또는 거문작지·흑작지(黑斫支)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울릉도 부분을 보면 이 지역에 석장 20여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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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 울릉읍과 서면의 면계에 마치 큰 배의 앞부분을 엎어놓은 듯한 산이 바다에 솟아 있다. 이 동리는 신리나 죽영보다 더 산의 끝 쪽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갓영·갓령[邊嶺]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間嶺)·간영이라 불리고 있다. 사동에는 개척 당시부터 옥과 같은 맑은 모래가 바닷가에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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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의 개척 당시 나리 분지에는 93세대 5백여 명의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당시 이주민의 규모로서는 최대였다. 이들 이주민들 중에는 경상도 지방보다 전라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개척 초기 이들은 각각 본인들이 살다가 온 지역의 말을 주로 사용하며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울릉군의 지리학적인 측면이나 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해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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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2리에 속하는 마을. 구암초등학교가 있던 곳의 바닷가 뱃자리 뒤에 산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고 거기에는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굴이 있다. 개척 때 사람들이 이곳에 와 보고 석산에 굴이 있다고 해서 굴바우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는 굴암(窟岩)이라고 하던 것이 오늘에는 구암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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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이 섬에는 깍새가 많이 있었는데, 특히 이곳 등성이에는 깍새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깍새가 많은 등성이라는 뜻에서 깍새등이라 부르다가 산등성이의 모양이 깎아놓은 듯 가파르다고 하여 지금은 깍깨등이라 부르고 있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따라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에 와 도방청을 두었으므로 도방 또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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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서1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민들이 이 곳에서 나팔을 불어 일꾼들을 모았다고도 하며, 또는 나팔 모양으로 생긴 등성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도수(島首) 배상삼(裵尙三)이 암살당하던 날, 이곳에서 나팔 소리가 여러 번 났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 등도 있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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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2리에 속하는 마을. 소를 잡는 도축장이 있었던 동네라 도치장 또는 도축장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저동과 사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동이라 하여 남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보루산의 자락과 닿아 있다. 도동 선착장에서 울릉초등학교와 KT울릉지점을 지나 사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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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초기 전라도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 나무를 베기 위해서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막동(幕洞)이라 하였다. 본래 남면 지역인데,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 등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 등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설치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통구미·석문·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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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예부터 쓰이는 토박이 언어. 1883년(고종 20)의 개척 당시 울릉 지역에는 주로 경상북도 지역 사람들이 이주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개척 초기에는 오히려 전라도와 강원도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개척 초기 이들은 각각 본인들이 살다가 온 지역의 말을 주로 사용하며 생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울릉군의 지리학적인 측면이나 생활·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해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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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에 있는 마을. 해발 600m의 높은 지대에 있는 백운동은 낮은 지대인 죽암동이나 석포동 쪽에서 쳐다보면 항상 흰 구름에 자욱하게 싸여 있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이다. 울릉군 북면 천부리에 있는 백운동은 울릉도에서 제일 높은 지대이면서 평지를 이루어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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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의 옛 지명. 개척 초기 이곳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낸 뒤 막을 치고 사방을 살펴보니 빽빽이 둘러싼 나무들로 인해 주위에 보이는 것은 없고, 다만 나무를 베어 낸 곳으로 동그랗게 하늘만 보였기 때문에 천부(天府)라 하였다. 뒤에 예선창을 천부라고 하자 이 곳을 본래의 천부라는 뜻으로 본천부라고 하였다. 본래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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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에 있는 산. 산의 모습이 악기 중 비파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파산의 양쪽 산허리에 돌이 깨어져 골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돌이 깨어져 골져 있는 곳’이라 하여 골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현재 남양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해발 340.2m의 능선 동쪽에는 남양천에 의하여 하각(下刻)이 이루어진 국수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분출한 용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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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1리에 속하는 마을. 예전 이 곳에는 석빙고가 있었으므로 빙고골 또는 빙구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빙구골 또는 빙구골짝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의하면 이 곳의 지명을 사공넘이[沙工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규원(李奎遠)[1833-?] 일기에는 죽포(竹浦)로도 되어 있는데, 아직도 대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현재는 사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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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1리에 속하는 마을. 사공이 넘어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사구너미라고 하였다는 설과 큰 뱀이 산을 타고 넘는 듯하고, 또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뱀 입아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사구내미[蛇口南]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1910년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이 곳의 지명을 사공넘이[沙工里]로 표기하고 있다. 이규원(李奎遠) 일기에는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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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리 해안에 있는 바위. 사자바위에 대한 전설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우선 바위의 생김새가 사자와 같다고 하여 사자바위라고도 하지만, 주변에 위치한 투구봉과 같이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우산국을 정복하고 공물을 바치게 하라는 지증왕의 명령을 받은 이사부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속에 있는 우산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기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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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삼막골에는 괴목나무가 유난히도 많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배를 만들기 위해 이 곳에 막을 쳐 놓고 벌목을 했다고 하여 산막이라 하였다. 산삼을 캐기 위해 막을 쳤다고도 하고, 또 삼베옷을 만들기 위해 막을 쳐 놓고 삼을 많이 심었다고도 해서 삼막골이라고도 하였다. 태하리는 1882년 개척령이 반포되자 최초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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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1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초에 이 곳에 온 사람들은 삼 열매, 깍새, 바다고기 등을 먹고 사는 아주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어느 해인가 높은 산 중허리가 무너져 내려오다 해변 200m에서 멈추면서 평지가 되었는데, 그 뒤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자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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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1리에 속하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서달래(徐達來)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따서 서달령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서들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하리는 1882년 개척령이 반포되자 최초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본거지로 1902년까지 울릉도의 행정 중심지였고 울릉도에서는 본래의 토속적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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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남양2리에 속하는 마을. 이 곳은 평지이면서 삼면이 성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모양인데, 다만 입구에 서쪽으로 뻗어 있는 큰 바위가 문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석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06년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의 5개 동과 북면의 태하·학포의 2개 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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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4리에 있는 지명. 개척 후 전라도 사람이 나선을 타고 와서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과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을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는데, 울릉도의 생김새가 마치 사람의 머리와 같고 이곳은 그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서 섬목이라 하였다. 북쪽에는 두루봉이 있으며, 주변 지역은 대부분 150~250m의 높고 낮은 산으로 되어 있다. 경사는 30~100%인 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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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3리에 속하는 마을. 이곳에는 예전에 숯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숯구디골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 서면 태하리에 있던 군청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도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군수는 군, 행정, 경찰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청이 옮겨온 도동은 단시간에 울릉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1년 남면 조례에 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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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 이 곳에 사람들이 점차 많이 살게 되자 우복동 일부와 중영 일부를 합해서 새로 된 마을이란 뜻으로 신리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장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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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이곳은 나무가 울창하고 평지도 있어 농사를 짓기에 알맞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데, 산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평지라는 의미로 안평전[內平田]이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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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마을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시냇물과 샘물이 맑고 맛이 좋아 옥과 같다는 뜻에서 옥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여기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옥천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04년부터이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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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옥 같은 모래가 누워 있다는 뜻에서 처음에 와옥사(臥玉沙)라 불렀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와옥사(臥玉沙)가 와록사(臥鹿沙)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산의 모습이 사슴이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와록사라고도 한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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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 신리에서 산 속으로 높이 올라간 곳에 왜막골[倭幕谷]이란 곳이 있다. 이는 개척령 반포 전후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베기 위해서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이 곳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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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3리에 속하는 마을. 대바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웃대바위라 한다. 본래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석포동과 나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천부동이 되었다. 그 뒤 구제 실시에 의하여 3개 구로 나누었다가 1952년 구를 동으로 고쳤다. 1965년 북면 조례에 의하여 천부3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17일 동이 리로 명칭이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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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현포1리에 속하는 마을. 현포리에서 태하리 쪽으로 나가면 있는데, 이곳은 지형이 움푹하게 들어가 모퉁이가 졌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북면 지역으로 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살았고, 공도 정책에 의하여 수백 년을 비어 오다가 1884년(고종 21) 울릉도 개척 정책에 따라 전라도 개척민들이 이 곳에 살면서 가문작지바위 이름을 따서 가문작지 또는 현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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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2리에 속하는 마을. 이곳에는 대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이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로 절골 또는 절골짝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태하에 있던 군청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도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군수는 군, 행정, 경찰 등 업무를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동은 단시간에 울릉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중 절골에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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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자연마을. 바닷가에서 가파른 길을 오르면 넓은 고지대가 나오는데, 이 동리는 그곳에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대나무[竹]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대가 많은 고개’라는 뜻으로 ‘죽령(竹嶺)·죽영’이라 불린 것이 지금은 ‘중령·중영’으로 소리가 변하였다. 사동에는 개척 당시부터 옥과 같은 맑은 모래가 바닷가에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곳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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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사동2리에 속하는 마을. 약간의 경사진 평지가 있어 농사를 경작하기도 알맞고, 또한 사동에서 안평전에 들어가는 중간에 있는 평지라고 해서 중평전(中平田)이 되었다. 1884년(고종 21)에 울릉도 개척 정책에 의하여 전라도 개척단들이 이 곳을 개척하는데, 울릉도에서 여기에만 모래가 있어서 사동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옥천동과 장흥동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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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천부면 현포2리에 속하는 마을. 석봉산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가까운 산에 닥나무가 많아 이 껍질로 한지를 만들던 지통(紙筒)이 있었기 때문에 지통골이라 부른다. 본래 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평리동을 병합하여 현포동이 되었다. 그 뒤 구제 실시에 의하여 3구로 나누었다가 1952년 평리·구암·살강태·지통골을 합하여 현포2동이 되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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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나리에 있는 산등성이. 마치 깎아 놓은 듯이 가파르다고 깍깨등이라 한다. 울릉읍 도동리에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깍깨등이 있어 이와 변별하기 위해 추산깎깨등이라고도 한다. 천부에서 약 10여 리 올라가면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성인봉[983.6m] 아래 매우 큰 분지인 나리분지가 있다. 이 곳은 원래 화산도인 섬의 옛 분화구의 화구원으로 울릉군 유일의 평야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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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1리에 속하는 마을. 원래 태하에는 황토가 많이 났다고 한다. 지금도 현포 쪽 바닷가 산에 보면 황토를 파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때는 이곳의 황토가 나라에 상납까지 되었다고 하고, 또 조정에서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을 보냈는데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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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현포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전라도 사람들이 나선을 타고 현포에 들어와 보니 조그마한 항구가 있었다. 배를 정박하기 적당한 듯하여 이곳에 내려 해변을 따라 현포 쪽으로 가보니 이미 몇 집이 살고 있었다. 다시 반대쪽을 살펴보니 경작할 수 있는 평지가 있어, 이 곳에 자리를 잡아 살면서 고기도 잡고 전라도에 내왕하기도 하였다. 이후에 이 곳 지명을 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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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2리에 속하는 마을. 조선시대 이규원의 일기를 보면 마을 뒤편 학이 앉아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학포(鶴圃)라고 하였는데, 1958년경 학의 부리 부분이 바람에 떨어지고 몸통만 남았다고 한다. 이곳은 태하1리와 마찬가지로 황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나, 태하1리 보다 면적이 좁고 황토가 적다고 해서 작은 황토구미(黃土邱尾)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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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와 북면 현포리에 있는 고개. 이규원 일기에는 향목구미라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향나무가 별로 없지만, 개척 때에는 이 산등성이 일대에는 잡목이라고는 별로 없고, 오직 아름드리 향나무만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면의 북서쪽에 있으며, 서쪽 태하등대 근처에는 향나무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울릉읍 도동 선착장 부근의 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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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2리에 속하는 마을. 개척 당시 이 곳 한 농가의 주인이 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점을 쳐 보았다. 그러자 집 앞에 붉은 대문을 세워 두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주인은 곧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좋은 나무를 베어 대문을 만들고 붉은 칠을 해서 세워 놓았다. 그러자 정말 신통스럽게도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곳은 붉은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