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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생계에서 시작된 도부꾼을 17년 동안 지속하였으며, 그리고 딸 일곱을 키워냈다. 밑천이 없어 어렵게 시작한 장사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돈벌이도 괜찮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였고 욕심도 커져갔다. 해산물을 가득 실은 보따리 하나 정도는 그 크기가 점점 커져 오징어를 두 가마니씩 장날에 맞추어 화물로 보내고 미역도 한 동이씩 옮겨가고 꽁치는 한 광주리씩 싣고 가는 등 규모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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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에 두천으로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주막집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시집왔을 때 방 두 칸이고 조그만 집에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그리고 삼촌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 함께 거주하였다. 18살에 시집온 당시 삼촌은 6살이었다. 한참을 어린 삼촌을 시아버지는 업고 마을 아래 부천까지 학교를 통학시켰다. 시집왔을 때 옛날 집에 빈 집이 있어 그곳을 창고로 삼고 부엌 한 개 있고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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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시집 올 당시 장평은 열다섯가구가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었다. 여옥란이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텃골에 세 집, 무조골에 한 집, 씨시골에 한 집, 창골에 한 집, 반지에 두 집 등 이웃이라고 해도 한참동안을 걸어서 가지만 그래도 이웃이 있던 시기였다.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으로 큰 동네인 두천리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면서 장평에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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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은 여름보다 더 바쁘다. 추수도 해야 하지만 벼가 마르기 전에 보리를 갈아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서 발을 동동 구를 때이다. 긴 산골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는 초가을에 정신없이 부지런해야 한다. 겨울이 되면 논일이 없어 그나마 늦잠을 청할 수 있다. 아침을 먹기 전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어두기도 하지만 이도 큰 단지에 넣어두면 그만이고, 낮에는 못한 나무가 있으면 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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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 여자들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길쌈이었다. 시집오기 전 길쌈을 할 줄 모르는 경우에도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길쌈을 배웠는데, 이는 가족들을 위한 옷을 만들기 위함도 있지만 가정경제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 들어서는 농사로는 살아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긴 겨울밤 길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삼베장수가 이곳을 찾아 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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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동신에게 일년 한번씩 함께 정성을 다한다면, 가정에서는 가정을 지켜주는 신들에게 정성을 다한다. 먼저 가정을 지키는 성주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신과 같은 것으로 가정신앙 중에서 유일하게 남자가 제를 주관한다. 이외 부엌신인 조왕에게 올리는 제는 여자가 주간하는데, 성주제를 올릴 때 조왕과 기타 다른 신들에게도 함께 제를 올린다. 성주제는 상량을 한 날이 보통 제를 올리지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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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철종 10)경에 작자가 울진의 망양정 등 관동팔경을 노래한 기행가사. 「관동장유가」는 작자 및 제작 연대 미상이다.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가사 중에, “기미년(己未年) 하사월…… 추석 후 제 삼일에 가벼운 행장으로……”라는 내용으로 보아 1859년(철종 10)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다니면서 풍류를 즐기며 풍광(風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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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경상북도 울진군 망양정과 월송정을 포함한 관동팔경 병풍 그림. 각폭 세로 59㎝, 가로 30.5㎝ 크기의 8폭 민화 병풍으로,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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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인 허필(許佖)[1709~1761]이 그린 월송정을 포함한 관동팔경 병풍 그림. 『관동팔경도병』은 각 폭 가로 42.3㎝, 세로 85㎝의 크기의 8폭짜리 실경산수화 병풍이다. 각 그림마다 화제(畵題)와 풍경의 느낌을 묘사한 시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관동팔경도병』의 「월송정」은 소나무 숲과 모래 해변이 펼쳐진 왼쪽으로는 굴미봉으로 여겨지는 바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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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송이는 먹기 힘든 음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과거의 송이는 두천에서 그리 흔하게 사용하는 식재료가 아니었고, 오늘날에는 귀한 환금작물로써 가정에서 먹을 수 없게 되어 귀한 음식이 되었다. 소나무 밑에서 조금씩 자라는 송이에 대한 가치를 마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천리의 할머니는 ‘아름드리 나무 밑에 쪼매 나는데 그게 먹을 것인지 알았는가 처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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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을 누볐던 선질꾼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등금쟁이, 바지게꾼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선질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동과 또는 생김새에서 비롯된 새로운 용어이다. 김도현은 「울진 12령을 넘나든 선질꾼과 그 문화연구」에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선질꾼이었으며, 바지게꾼은 후대에 새로 생성되었고, 등금쟁이는 일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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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 바깥말래에서는 골마와 주막거리에 위치한 할매와 할배에서 각각 제를 올렸다. 큰 마을인 골말은 할배를 모신다고 하여 이곳의 당은 ‘큰당’이라 불렀으며, 주막거리는 할매를 모신다고 하여 ‘할매’라 부른다. 그리고 할배당에서는 음력 정월 15일, 할매당에서는 다음날이 16일에 각기 따로 제를 올렸다. 두 마을이 따로 제를 올렸지만 동제에 관련된 모든 행사 및 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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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는 바깥말래라 불리며, 북면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마지막에 위치한 마을이다. 골마와 주막거리, 숲거리 세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골마와 주막거리는 마을 앞 들의 첫 번째 다리를 경계로 숲거리와 구분된다. 두천1리에 들어서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악구산’이 있으며, 마을을 지나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나무목재(이목고개)에 다다르는데, 이곳은 두천2리와 두천1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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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시집와서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었다. 가정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남편이 잃고 나니 그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길이 또 막막해질 때 할 수 없이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당시 생필품으로 팔리던 사카린, 성냥, 술약, 비누, 실 같은 물건을 사서 가까운 범상골, 섭실, 화성리를 돌아다니며 팔기 시작하였다. 장사가 되지 않아 고기장사를 따라다니면서 죽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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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거주하는 영양·의령·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남씨 종친들의 모임. 남씨대종회 울진군지회는 숭조(崇祖), 목족(睦族), 화합과 제사 등 종친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2년 남씨대종회 울진군지회 설립 초기에는 매년 8~9월 종친회를 개최하였으나, 최근에는 6~7월로 종친회 모임 시기를 변경하였다. 2007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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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 끝나는 시점 개울가에 위치한 내성행상불망비는 1890년(고종 27)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던 선질꾼들의 지위격인 접장 전한조와 반수 권재만이 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 것에 대해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를 선질꾼비라 부른다. 비에는 ‘내성행상불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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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교감으로 승진하면서 농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울진군 내 농악을 보급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 농악을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1988년 정년 퇴임 후에는 본격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십이령바지게꾼놀이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면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선질꾼이라 불리는 바지게꾼들을 익히 보았던 그는 집 앞을 지나가는 바지게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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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거주하는 담양을 본관으로 하는 전씨 종친들의 모임. 담양전씨 종친회는 유일한 한 뿌리의 자손으로서 자랑스럽고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조상들의 빛나는 얼을 이어받아 파벌 의식을 타파하고, 족종 간 우의를 돈독히 하며 상호 신뢰와 협조로써 담양전씨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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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2리 바깥말래는 골마와 주막거리, 숲거리 세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이 중 골마가 가장 큰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주막거리로 더 이름이 난 마을이기도 하다. 십이령 고개길의 세 번째 길목에 자리 잡고 바릿재를 넘어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며 쉬어가는 곳이 바로 두천2리의 주막거리이다. 과거 이곳에 두천원(斗川院)이 있었고 원의 기능이 쇠하면서 주막이 생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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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은 산골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이다. 3월이 되면 지천으로 나는 산나물들을 뜯기 위해서 부녀자들의 손길은 바쁜데, 나물 재료는 정해진 것은 없다. 산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그들 생활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며, 봄에는 부족한 조와 쌀을 대신하여 산나물을 넣고 밥을 해 먹는다. 산나물밥은 산에서 뜯어낸 나물을 깨끗이 씻어서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로 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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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활동 또는 그 작품. 문화예술은 한 집단이 살아온 자연환경, 역사, 종교 및 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연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종교는 예술의 주제나 형태미뿐만 아니라 그 지역 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울진군은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울진의 문화예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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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단체. 문화 시설 등 문화적 환경이 열악한 울진 지역에서 문화예술단체는 그 수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현재 울진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단체로는 한국연예협회 울진지부, 한국미술협회 울진지부, 죽변종합고등학교 합주단이 있다. 1. 한국연예협회 울진지부 한국연예협회 울진지부는 2001년 10월에 발기하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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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의 세계상과 인간상을 미적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전통시대 울진과 관련된 미술 중 울진 출신 작가의 작품은 전해지지 않지만, 울진의 풍경을 그려낸 타 지역 출신 작가의 작품은 다수 전해지고 있다. 특히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을 그린 작품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겸재 정선이 1738년에 그린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의 11폭 중 1폭인 「월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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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이 백두대간의 산맥으로 가로막힌 울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길은 남쪽과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연결된 도로를 통해서이다. 서쪽으로는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야 하는데, 열두 개나 되는 산길을 넘어 봉화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그 길이 바로 십이령이다. 십이령은 울진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하는 도로로 그 출발지점은 울진, 죽변, 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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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 고개길은 울진을 동서로 잇는 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용한 길이다. 몇 번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봉화로 서울로 간 이 길을 선질꾼들은 수없이 왔다갔다 반복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선질꾼의 발길이 멈춘 지 30년이 넘었건만 고개길은 아직도 길을 밟을 주인을 기다리는 듯 쓸쓸하지만 넓어 보인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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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생산물을 많은 식구들이 공유하기 위해서는 아껴먹든지, 또는 물을 넣어 그 양을 많게 보이는 방법이 있다. 두천에서의 음식문화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귀한 쌀은 손님과 명절을 대비해서 아껴서 먹었고, 이외 다양한 식재료들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그 양을 많게 하여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계란을 비롯한 고기 등 귀한 식재료는 오늘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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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동안 울진과 샛재 그리고 봉화를 지나면서 도부꾼을 한 이복록은 울진에서도 유일하게 현재에도 도부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부상과 선질꾼에 이어 생계를 위해서 등장한 도부꾼은 1970년대 울진과 봉화를 도보 또는 버스를 타고 연결하며 다양한 상품들을 판 사람들로 주로 여자들이 담당하였다. 태어난 곳은 울진읍 대흥리 밤나무골에서 7남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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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 새벽 4시 나무를 하러 간다. 나무는 한겨울을 날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틈이 나면 모아두어야 한다. 식전에 나무 한 짐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게 겨울이 끝난 봄 마을 사람들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침 6시 아침을 먹고 논밭을 갈기 위해 집을 나선다. 12시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숨을 돌리는가 생각되더니 다시 몸을 추스르고 밖을 향한다. 거름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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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자연부락 장평에서 2001년 마지막까지 거주했던 여옥란은 봉화 석포 솔성골에서 태어났다. 십이령 고개길의 일부로써 선질꾼들을 위한 주막들이 성행했던 이곳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고 여옥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19살 시집와서 2001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던 여옥란에게 장평은 잊히지 않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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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리에서 식혜는 감주를 뜻하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삭힌 것으로 양념장 또는 반찬으로 먹는다. 외부에서 식혜를 말할 때 감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곳에서 식혜는 말 그대로 삭힌 고기를 의미하여 가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식혜를 만들 때 사용하는 고기는 정해진 바가 없다. 바다가 멀었던 두천리에서 선질꾼들이 가져다 준 물고기는 좋은 식혜 재료가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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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옥란이 장평에서 나오면서 장평의 동제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장평의 제당은 마을의 제당이기보다는 선질꾼들이 십이령 고갯길을 넘으면서 안전을 빌며 두 손을 모았던 곳이었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지면서 그렇게 안전한 십이령을 기원했던 그 길의 입구 서낭에게 빌었던 것이다. 여옥란은 주막촌에서 보았던 선질꾼과 도부장수들 그리고 나그네들이 서낭에게 빌었던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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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질꾼이 지난 자리는 도부꾼이 이어 받는다. 도부꾼은 주로 여자들이 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 후 미망인들이 많이 생겨나고 생계를 위해 그들은 울진의 생산물을 가지고 직접 십이령을 넘어 각종 곡식으로 바꿔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한국전쟁이 발발 후 남성들로 이루어진 선질꾼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 자리는 대신 전쟁에서 살아남은 하지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도부꾼들이 자리 잡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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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가 부족한 산골에서 여옥란 역시 선질꾼이 떠난 자리에서 개간한 농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여옥란이 부르는 오늘날 화전을 ‘산전’이라 부른다. 갈아 먹을 땅이 부족하니 해마다 산에 불을 놓아 산전을 일구었다. 산전은 개인 산에서는 할 수 없고 국유림에서만 가능하였다. 국유림도 산전은 국가에서 금지해 놓은 일이니 몰래 몰래 숨어서 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먹고 살기 힘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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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명절을 보내고 날씨와 시간 그리고 절기에 맞추어서 다양한 활동을 한다. 두천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시간과 날씨 그리고 절기에 맞추어서 발생하는데, 현재 그 시간 속에 활동은 지켜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여전히 설과 추석은 중요한 명절로써 떡국을 비롯한 송편 등 절기식도 먹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반면, 단오나 패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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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 거주하는 신안을 본관으로 하는 주씨 종친들의 모임. 신안주씨 종친회는 중앙종친회의 종훈(宗訓)인 숭조경종(崇祖敬宗), 충효예절(忠孝禮節), 참여돈목(參與敦睦)의 실천과 목족(睦族), 화합으로 종인들의 친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본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신안주씨 종친회는 울진에 거주하던 종친 주범중·주석열·주기돈·주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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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생활에서 쌀밥은 구경하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귀한 손님이라도 온다면 감자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쌀밥을 약간 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집안의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만 이것이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힘든 경우에는 조밥 또는 보리쌀을 먹는다. 좁쌀을 넣은 감자밥을 만들 때는 감자를 함께 넣고 끓이지 않는다. 좁쌀을 끓이다가 감자를 넣고 함께 끓이는데 좁쌀을 넣으면 감자가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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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전곡리에서 농한기나 초상이 났을 때 즐겨 하는 놀이. 싸시랭이는 강원도 태백과 경상북도 봉화의 경계를 이루는 석포와 동점 등지에서도 즐겨 하던 놀이다. 시종 불림소리로 엮어 나가는데 그 불림소리는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사설이라 할 수 있다. 1에서 10까지 숫자가 적힌 엽전이 1에서 4까지는 3개씩 12개, 5에서 10까지는 2개씩 12개로 총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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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서 공연·상영된 연극과 영화. 일제강점기 울진에서의 연극 활동은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대 울진청년회가 주체가 되어 「에이브러햄 링컨」을 역사극으로 공연하였고, 울진순회극단을 조직하여 울진제동학교 강당에서 공연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연극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연극 활동은 침체되어 각 초등학교에서 행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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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에 있는 청소년 문화활동을 위해 세워진 문화시설. 울진군 청소년수련관은 울진 지역 청소년들의 문화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99년 7월 31일 건립되었다. 울진군 청소년수련관은 부지 면적 11,974㎡, 건물 면적 3,213㎡ 규모이다. 1층에는 783석의 강당과 전시실·영상실이 있으며, 2층에는 청소년문화의 집과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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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에 있는 비영리 문화예술단체. 울진 지역의 고유문화 보존과 전승 및 새로운 문화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57년 임대득(林大得) 등이 현 울진문화원의 전신인 문화원을 설립하면서 사무실을 군청 공보실에 두고 미국과 우리나라 정부 시책의 영상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경영난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1976년 8월 30일 전영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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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월송리의 월송정을 소재로 한 조선 후기 회화. 월송정을 소재로 한 그림은 정선의 『관동명승첩』, 김홍도의 『해산도첩』, 허필의 『관동팔경도병』, 정충엽의 「월송정」 등이 있다. 1) 『관동명승첩』 간송미술관 소장 정선의 『관동명승첩』 11폭 중 한 폭인 「월송정」은 가로 57.7㎝, 세로 32.2㎝의 크기로, 빽빽이 들어찬 긴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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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출신의 서양화가. 강렬한 색과 기하학적 구성의 울림으로 서사적 장대함과 서정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서양화가이다. 유영국은 1938년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자유미술회우전(自由美術會友展)에 출품하였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1967년 제9회 도쿄비엔날레에 출품하였다. 1978년 파리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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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주막을 하면서 쌓았던 덕은 박금년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주막에서 정을 쌓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는데 박금년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를 넘어 주막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던 강재소 직원들은 ‘할머니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다음에 큰 산에 가서 일 다하고 갈 적에 집을 커다랗게 지어가지고 갈테니 할머니 그래 사시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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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이루어지는 음악과 관련된 제반 활동. 근대 울진의 음악은 1910년대 보통학교에서 시행된 창가 교육과 교회의 찬송가 보급에서 출발한다. 악단에 의한 연주회는 1931년 첼로와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총 4명의 소규모 악단이 울진제동학교에서 공연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영재(李永在) 외 8인으로 구성된 악단이 1931년 11월 울진공회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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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2리 성황당은 두천1리 바깥말래에서 안말래로 넘어가는 길목 성황들에 위치한 성황사와 텃골에 자리 잡았던 장평의 성황당 그리고 사기장골의 성황목인 소나무 2곳 모두 4곳에서 동제를 올렸다. 1968년 무장공비에 의한 화전민촌 이주정책으로 장평이 없어지면서 이곳은 마을이 아닌 개인의 비손 장소로 바뀌었으며, 사기장골은 사람들이 외지로 빠져나가면서 중단되었다. 지금은 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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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힘들지 와 안 힘들어. 그래도 땅은 노력을 들인 만큼 나온다’라고 대답한다. 정성 없이 키울 수 있는 농작물은 없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이구동성이다. 누구나 다 하는 벼농사지만 볍씨를 뿌리기 전 어떤 씨를 선택하는가가 중요하고 그리고 일 년 동안 관심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한눈을 판다면 땅은 질투하고 결국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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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 고개길은 자동차만 다닐 수 없는 길이다. 1968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 이를 소탕하기 위해 미군들이 지도를 들고 두천에 와서 길을 찾았다고 한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십이령 고개길은 사람이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짐만이 오고가는 그런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흥부장과 울진장에서 생산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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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창해(滄海). 참판(參判) 수헌공(睡軒公)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소초(素樵) 최대순(崔大淳)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으며, 1909년(순종 3) 13세 때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개최된 시회(詩會)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다. 1911년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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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1리 바깥말래에서 봉화 방면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재를 하나 넘으면 산능선을 넘어서 마을이 보인다. 속칭 안말래 또는 원말래라 부르기도 하는 두천2리는 마을 앞으로 북쪽에 위치한 세덕산에서 발원한 말래천이 지나간다. 안말래는 본 마을인 안말래와 사기골, 장평 세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말래는 다시 서낭골과 밤나무골로 구분된다. 서낭골은 안말래에서 넘어오는 입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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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년 월송정을 소재로 하여 겸재 정선이 그린 담채화. 정선(鄭敾)[1676~1759]이 63세 때인 1738년에 8촌 친척 아우인 우암 최창억을 위해 제작한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11폭 중 한 폭이다. 지본담채(紙本淡彩)에 가로 57.7㎝, 세로 32.2㎝이다. 그림에는 ‘월송정(越松亭)’이란 화제가 쓰여 있으며, 빽빽이 들어찬 긴 소나무 숲을 화면 중앙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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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이 월송정을 포함한 관동 지역과 금강산 등을 그린 시서화 합벽첩. 『풍악장유첩』은 1788년(정조 12)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강세황이 김홍도, 김응환 등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할 때 그린 그림으로, 14면으로 제작된 시서화 합벽첩이다. 13일 강세황은 일행들과 함께 회양관아를 출발하여 신창으로 향하였고 14일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15일 장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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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에 있는 한국미술협회 산하 울진 지부. 울진의 열악한 미술 환경을 개척하고 울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며 서로 협력하는 마당을 만들고자 설립되었다. 1997년 10월에 창립된 후 2003년 11월 12일 한국미술협회 울진지부로 승인되었다. 2003년 5월부터 꾸준히 정기전 및 전시회를 열고 있다. 2003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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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호월리에 있는 한국연예협회 산하 울진 지역 지부. 울진군 지역 문화예술인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회원의 권익을 옹호하며, 울진의 공연예술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문화공연을 통해 군민의 문화생활이 윤택해지는 데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01년 10월에 발기하여 2002년 1월 11일 창립총회를 거쳐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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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와서 26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났다. 그해 동짓날 그믐에 작은 아들을 낳았다. 지방 빨갱이(인민군을 대신하여 마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들이 박금년의 집에 순경들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추궁하자 마을 아래로 피난을 갔다. 당시 큰 아들이 다섯 살이었다. 멀리 가면 힘들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마을에서 살고 싶었지만 주막을 하던 집들은 모두 다 나쁜 일을 당하였다. 다음 순서로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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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에서 각급 학교에 농악을 최초로 보급한 이규형 전 울진초등학교 교장은 북면 주인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우연히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후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제동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부구공립보통학교는 4학년제였으며, 그는 9살에 입학하였다. 4년을 마치고 울진읍 내에 위치하던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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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가 월송정을 포함한 관동 지역과 설악산,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린 화첩. 『해산도첩』은 김홍도가 1788년 가을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으로 사생 여행을 떠나 그린 그림이다. 『해산도첩』의 「월송정」은 소나무 숲과 모래 해변이 펼쳐지며, 왼쪽으로는 소나무 숲 사이에 굴미봉으로 여겨지는 바위가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석축으로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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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 있는 울진군 유일의 미술관. 향암(鄕岩) 주수일이 미술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울진군에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여 지역 미술 인구의 저변 확대와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1999년 8월 1일 향암미술관을 건립하였다. 향암미술관의 부지 면적은 4,676.00㎡, 전시실 면적은 369.80㎡ 규모이다. 전시관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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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혀를 두르는 여옥란은 말 그대로 눈물이 쏙 빠지는 시집살이를 했다. 장평에서 9남매를 주막을 운영하며 키웠던 시어머니는 여옥란의 남편만을 제외하고는 위와 아래 시숙들이 모두 울진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낼 정도로 억척스러운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렇게 일찍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를 하고 지냈던 그녀의 시숙들과 달리 그녀의 남편과 그녀는 이곳 장평에서 일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