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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 경상감사 이수언이 서인 선현을 모독했다며 성주군 읍지인 『경산지』 판적을 없애버린 사건.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조정에서 남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서인 정권이 남인 세력의 근거지인 영남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였다. 『경산지(京山志)』 파판 사건은 서인 세력이 그런 공세의 하나로 남인 세력의 거두 이원정(李元禎)[1622~1680]이 간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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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 독립운동가 이승희와 김창숙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운동.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에 연해주·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대표적인 주도 인물은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이었다. 1908년 5월 연해주로 망명한 이승희는 1909년에 만주로 이동하여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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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성주 지역에서 나라 빚을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고자 일어난 국권 수호 운동.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일본으로부터 빌려 쓴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해 벌인 거족적(擧族的)인 애국 운동이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1907년 3월 20일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가 설립되었고,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가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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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 통일 신라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의 왕위 계승 실패와 자신의 중앙 정계 소원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다. 9주 5소경 가운데 5주 3소경이 호응한 신라 최대의 반란이었고,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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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주 지역에서 노강서원의 설립을 두고 벌어진 논란. 노강서원 설립 논란은 18세기 전반 남인 세력이 강했던 영남에서 노론계 서원인 노강서원의 설립 추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서인이 남인의 근거지였던 영남에서 서인 계열의 노론 세력 확산을 위해 노론계 서원을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702년(숙종 28) 노론계 인물인 이지완(李志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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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 농민군의 활동과 성주 유림의 대응. 1894년 8월 25일 동학교도들이 성주 지역에 들어와 성주목 관아를 점령했으나, 8월 27일 성주목(星州牧)의 향리와 유생들이 축출하였다. 같은 해 9월 6일 동학 농민군이 다시 성주읍을 점령하자, 향리 출신의 유생 도한기(都漢基)가 수성 조목 15개조를 작성하여 민보군(民堡軍)을 결성하고 동학 농민군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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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성주 지역 한주학파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한 국권 회복 운동. 배일 언론 투쟁은 성주의 한주학파 유생들이 무력 항쟁을 통한 국권 회복보다는 만국 공법에 호소하는 외교를 통한 국권 회복이 더 적실하다는 입장에서 전개한 구국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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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THAAD)의 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원적 사회적 갈등. 사드 기지 배치 논란은 2016년 7월 사드의 성주 배치가 발표되면서 촛불 문화제 형식으로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이 시작되면서 일어난 논란이다.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은 성주군 성주읍 성산포대에 사드 포대가 배치될 예정이었다가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제3 후보지인 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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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3월 27일 선남면 소학동의 이현기(李玄琪)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동의 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을 필두로 4월 2일 성주면과 벽진면의 독립 만세 운동, 4월 3일 지사면 수륜동[현 수륜면 수륜리] 만지 시장의 독립 만세 운동, 4월 6일 가천면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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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이후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지역 사회 개발 운동. 새마을 운동은 생활 환경의 개선과 소득 증대를 도모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이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5월까지 농한기에 실시된 시험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정부는 각 리동(里洞)에 양회(洋灰) 335포대(布袋)씩을 지원하고 농한기 유휴 노동력을 동원하여 마을의 생활 환경 정비 사업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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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성주 지역 의병이 중심이 되어 싸운 성주성 탈환 전투. 1592년 성주성의 탈환을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전개한 전투이다. 치열한 공격을 통해 왜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퇴각하도록 하여 성주성을 수복하게 만든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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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때까지 성주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 수립 운동. 신국가 건설 운동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주에서도 성주면 치안유지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각 면에서 유사한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고 국가 건설 운동을 벌였다. 이후 성주면 치안유지회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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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 때 윤원형이 성주 출신의 인사를 포함하여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1547년(명종 2)에 일어난 사화이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권응정(權應挺)[1498~1564], 권응창(權應昌)[1500~1568] 형제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권응정은 강진에, 권응창은 맹산(孟山)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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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성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의 유생들이 개화 정책에 반대하여 올린 집단적 상소.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는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및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올린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 유생들의 상소이다.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성주 지역의 유생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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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전후로 성주의 영봉서원 건립 과정에서 제향 인물의 결정을 놓고 벌인 논란. 영봉서원 제향 논란은 1558년(명종 13) 성주 최초의 서원인 영봉서원의 건립 과정에서 제향 인물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처음에는 이조년(李兆年)[1269~1343]과 이인복(李仁復)[1308~1374]을 제향하려 했지만, 결국 당시에 확산되고 있던 도학(道學)의 영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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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성주 지역에서 전개된 위정척사 사상과 그 운동.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은 개항기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한 운동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대원군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인 양반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위정(衛正)은 주자학적 질서인 정(正)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척사(斥邪)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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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말부터 10월까지 성주 지역에서 나타난 6.25 전쟁의 양상.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성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을 말한다.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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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승희 등 성주 지역 유림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벌인 투쟁. 을사늑약 반대 투쟁은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의 한주학파 유생들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복합 상소를 올리며 벌인 투쟁이다. 일본 군경의 방해로 실패했고, 이승희는 대구경무소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상소와 통문의 정당성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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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성주 지역의 의병 전쟁. 의병 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일어난 민병이 수행한 전쟁으로, 1894년부터 1910년대 중반기까지 전개되었다. 대략 20년 이상 불굴의 항전을 이어갔지만,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창의가 무산되었을 정도로 의병 운동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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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광해군 때 성주 사족 이창록이 시국을 비판하다가 정인홍의 고발로 처형된 옥사 사건. 이창록(李昌祿) 사건은 1614년(광해군 6)에 성주 지역의 사족이던 이창록이 광해군의 폭정과 조정의 난정(亂政)을 비판하는 소초(疏草)를 작성했다가, ‘흉서난언패역부도서(兇書亂言悖逆不道書)’라는 죄목으로 참형당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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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성주 지역민이 조직한 민병.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이 빠르게 북상하자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장 배덕문(裵德文)을 위시한 약 49명의 의병으로서, 성주성과 인근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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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인조 때 권대진 등이 정한을 추대하여 반역을 모의한 역모 사건.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정한(鄭澣), 김안국(金安國), 문일광, 권대진(權大進) 등 정권을 잃은 북인(北人)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역모 사건으로, 성주 사람들도 연루되어 함께 처형되었고 성주는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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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성주 출신 김창숙이 주도한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 모집 사건. 제2차 유림단 의거는 경상북도 성주 유림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머물면서 구상하고 주도했던 것으로 만주와 몽골 접경 지대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통해 군사를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로 자금을 모집한 사건이다. 제1차 유림단 의거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둔전제(屯田制)를 기반으로 군사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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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김창숙 등 성주 유림의 주도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낸 일.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성주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영남 유림의 큰 학자 곽종석(郭鍾錫)을 앞세워 독립 청원서[일명 파리 장서]를 작성한 뒤,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상하이[上海]로 가서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로 발송한 사건이다. 파리 장서 운동(巴里長書運動)이라고도 한다. 김창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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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통일 전쟁기에 성주 지역의 호족 세력들이 참전한 고려와 후백제 간의 조물성 쟁탈 전투. 조물성(曹物城)[조물군]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이 경상북도 일대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일 때 주요 군사 거점 중 하나였다. 924년(고려 태조 7) 7월과 925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격돌한 양군 간의 조물성 전투에 성주 지역의 호족 세력들도 참전했을 것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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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 때 경상북도 성주에서 결성된 의병. 1866년 10월 프랑스의 침략에 즈음하여 조정에서는 영남소모사(召募使)로 이종상(李鍾祥)과 정윤우(鄭允愚)를 파견하여 영남 각 지역에서 소모책을 차출하고 의려(義旅)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영남 지방의 흥해(興海)[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옛 이름]에서는 김천익(金千益), 청도에서는 박시묵(朴時黙), 상주에서는 유주목(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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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1862년 농민 항쟁은 1862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읍폐 해결과 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난 성주 지역의 농민 항쟁이다. 1862년 3월 26일 몰락 양반 이발(李浡)과 이참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성주의 폐막(弊瘼) 해결을 요구한 12개 조의 요구 사항을 감영에 올리고, 탐학한 이서의 집 5호 및 서리와 결탁하여 치부한 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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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1883년 농민 항쟁은 1883년 6월 12일 성주 지역의 농민들이 이방 배장한(裵章翰)의 탄핵을 요구하며 일으킨 농민 항쟁이다. 사족들이 봉건적 특권을 장악하기 위해 향청을 통해 추천한 배장한을 성주목사 이용준(李容準)이 이방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일어난 항쟁이었고, 1862년 성주 농민 항쟁을 계승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성주목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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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성주 지역에서 청년들이 벌인 사회 운동. 청년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청년을 포함한 주민의 봉건 의식 타파와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고, 사회 운동과 민족 운동의 기반이 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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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목숨을 던져 항거한 성주인들의 항일 운동.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민족 운동은 자정 순국(自靖殉國), 의열 투쟁, 의병 운동, 상소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 순수성이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가 자정 순국이다. 자신의 육신을 던져 국권 회복과 민족 독립이라는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말의 자정 순국은 1905년 영일동맹(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