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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간행된, 무주군의 행정 내부 전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수록한 보고서. 한국 행정 연구원은 인문 사회 분야에 있어서 행정 체제의 발전과 행정 제도 및 그 운영의 개선에 관한 사항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정에 관련된 정보와 자료를 수집·관리 지원하며, 국내외 연구 기관과의 교류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국가 행정 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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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발행한 6·25 전쟁 순국자 기록물. 덕유산이 위치한 무주 지역은 1948년 빨치산 토벌이 시작된 이후, 공비 토벌이 완전히 종료되어 총성이 멈춘 1954년 11월까지 7여 년 동안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무주군은 1955년 10월 6·25 전쟁으로 순국한 이들에 대한 기록을 모아 『순국충영록(殉國忠靈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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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가당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길문기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길문기(吉文基)에 대해서는 비문이 훼손되어 있고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덕을 베풀어 가당리 길문기 선덕비(柯堂里吉文基善德碑)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무주군 부남면 가정 삼거리에서 부남로 부남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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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가당리에 있는 김인석의 무덤. 가당리 김인석 묘역(柯堂里金仁碩墓域)은 무주와 금산을 잇는 국도 37호선 도계 부근에 자리한 무주군 부남면 가당리 가정 마을 가정 보건 진료소 동쪽 언덕의 하단부에 있다. 장방형 형태로 근래에 새롭게 조성되었는데 화강석 면석을 사면으로 둘렀으며 맨 위는 잔디를 식재하였다. 묘 뒤편은 선조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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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국악인. 강낙승(姜洛昇)[1916~2010]은 1916년에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유평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풍류에 관심을 갖고 동네 농악 굿이 열릴 때마다 장단을 맞추기도 하였다. 1938년 경찰 공무원에 합격하여, 근무하는 동안에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의 예기 조합(藝妓組合) 권번(券番)에서 장동호로부터 평시조(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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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강윤수(姜尹秀)이며, 강무경(姜武京)으로도 쓴다. 강무경(姜武景)[1878~1910]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필묵(筆墨)을 주로 취급하던 상인이었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처지를 통탄하고 또 걱정하던 의로운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와중 전라남도 함평 지역에서 활동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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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강봉선(姜奉先)이다. 아들은 강호완(姜浩完), 강호열(姜浩烈)이다. 강판종(姜判鍾)[1912~1969]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 대동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원광 대학교 법정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5년 중앙 교원 자격 검정 위원회 시행 고등학교 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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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후 월북하지 못하고 빨치산으로 남아 있던 무주 지역의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 1950년 7월 24일 새벽 공산군이 무주읍 내에 들어왔다가 9월 26일 철수하였다. 그러나 월북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공비들이 무주 주변의 산간 지역으로 들어가서 경찰서 파견대 등 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1950년 9월 공산군이 철수한 이후 무주 지역 청년들은 공산 투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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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장영조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일제 강점기에 흉년이 들어 마을 주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장영조(張榮祚)가 대신 세금을 내 주고 어려운 이웃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선행을 하여 그 뜻을 기리고자 1940년 6월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 무주 반디랜드에서 길산리 방향의 무설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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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육성흠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육성흠(陸聖欽)은 참봉을 지냈는데 국권 피탈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렵게 되자 산모에게는 미역과 쌀, 어려운 이웃에게는 식량을 보내 주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문맹이 없도록 글을 가르치고 흉년이 들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하는 4개 마을의 세금을 모두 대신 납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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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무주 출신의 의병장. 김동신(金東臣)[1871~1933]의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庵)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고종(高宗)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승(祕書丞)을 지냈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문태서(文泰瑞), 신명선(申明善), 박춘실(朴春實) 등과 함께 구국 항쟁의 대열에 나서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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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김동학(金東鶴)[1887~?]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순종 3) 의병대를 조직하여 대일 투쟁을 전개하던 고정길 부대에 들어가서 주로 4~5명의 소규모 의병대로 산골에 은둔하면서 용담, 진안, 장수 지역에서 유격 활동을 하였다. 김동학은 고정길 및 4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곤봉을 휴대하고 전라북도 용담군 일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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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김원일(金元日)[1867~1908]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서 출생하였다. 신명선(申明善) 의병장이 창의(倡義)할 때 휘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신명선은 대한 제국의 시위대 출신 의병장으로 1907년(순종 1) 덕유산(德裕山)으로 들어와 약 4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명선 의병대는 1907년 겨울 전라북도 진안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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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김재옥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김재옥(金在沃)은 본관이 영산(永山)으로 횡천 면장을 역임하면서 흉년이 들어 면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자 곡물 100여 석을 대납하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김재옥 시혜비(金在沃施惠碑)는 면장인 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16년 2월 세웠다. 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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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유당(裕堂). 충목공(忠穆公) 김여석(金礪石)의 후손이다. 아들 김영교(金永敎)는 법학을 공부하여 학부(學部)에서 교관을 지내다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물러나 거문고를 타며 글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고을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 진력하였다. 김직현(金直鉉)은 심성(心性)과 이기(理氣)에 대한 책을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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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교육자. 본관은 김녕(金寧). 아들은 김일권(金日權)이다. 김칠궁(金七宮)[1908~1968]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전라북도 공립 사범 학교 특과 제2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장수 공립 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였다. 1931년 무주 공립 보통학교, 1936년 천천 공립 보통학교(天川公立普通學校),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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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판두(金判斗)[1892~1929]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무주군에서는 적상면 사람 전일봉(全日奉)이 4월 1일 무주읍 장날 만세 운동을 벌였다. 무주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들게 하고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에 있던 사람들이 호응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제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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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문학 비평가이자 교육자.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눌인(訥人). 아버지는 김종원(金鍾元)이고, 어머니는 고씨(高氏)이다. 김환태(金煥泰)[1909~1944]는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다. 무주에서 보통학교 4년을 마쳤다. 1922년 13세에 전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사 추방을 위해 동맹 휴학을 벌이다 무기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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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석굴 문.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 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모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 굴이다. 무주군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 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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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6·25 전쟁 당시 공비 토벌 작전에 참여했던 청년 단체.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大韓靑年團靑年防衛隊)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내에 조직된 준군사 단체이다. 1949년 미군 철수 후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반영하여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청년방위대를 만들어 지역 방위에 투입시켰다. 6·25 전쟁 당시 전라북도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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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어난 항일 운동. 조선이 일본에 강점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노력이 전개되었다. 무주 지역에서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주 지역은 영남과 호남을 양쪽에 두고 덕유산(德裕山)이 위치해 있어 영호남의 의병 활동이 용이했던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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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라북도 무주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 교도와 농민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를 지향한 운동. 1860년 최제우(崔濟愚)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내천(人乃川) 사상을 주장하며 동학을 창시하여 전라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의 농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일본과 불평등한 근대 조약,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로 개항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적 침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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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금평리 두문 마을에서 일제 강점기 제정한 향약. 향약(鄕約)의 일반적인 목적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지역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하였을 때 상부상조(相扶相助)하기 위하여 제정하였다. 1872년(고종 9) 심암(深庵) 박남수(朴南壽)가 무주군 안성면 금평리 두문 마을의 미풍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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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일 무주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전민족적·전민중적 봉기인 3·1 만세 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무주군에 독립 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7일경이었다. 무주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전일봉(全日奉)[1896~1950]으로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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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굴암리에 있는 마실길. ‘벼룻길’이란 강가나 바닷가 낭떠러지로 통하는 비탈길을 이르는 말로 무주 사람들은 '보뚝길'이라고 불렀다. 무주 금강 벼룻길은 금강 마실길, 금강 맘 새김길, 예향 천리 금강변 마실길과 더불어 무주의 대표적인 마실길이다. 무주 금강 벼룻길은 무주군이 토속적이며 이미 추억의 마실길로 널리 알려진 길을 활용하여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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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에 있는 돌담 및 토석담. ‘지전’이라는 이름은 이곳 마을이 예전에 지초(芝草)[천연 염색, 약재로 많이 쓰이는 여러해살이풀]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형성 시기는 17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는데,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 변의 오래된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그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가장 오래된 고목은 약 320년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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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에 있는 명승지.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은 무주 구천동 33경의 제6경이자 3대 경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문화 유적지이다. 원당천이 돛대 모양의 기암을 휘어 감고 도는 모습이 마치 물로 성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여 수성대(水城臺)라고도 불린다. 개항기 우국지사이자 우암 송시열의 9세손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국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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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에 있는 명승지. 무주 구천동 파회·수심대 일원은 기암괴석이 절벽을 이루고 병풍처럼 세워져 마치 금강산과 같다고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렸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중국의 무이 구곡(武夷九曲)을 본떠 무주 구천동에 ‘무계 구곡(武溪九曲)’이라 이름 지은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무주 구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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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문태현(文泰鉉), 별명은 문태진(文泰珍)·문태수(文泰洙), ‘문태서(文泰瑞)’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의 24세손이며, 아버지는 문병현(文炳鉉)이다. 문태서[1880~1913]는 경상남도 안의군 서상면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순종 1) 제3차 한일 협약(韓日協約)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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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있는 의병장 문태서의 순국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호남 의병장 문태서(文泰瑞)는 경상남도 안의현 서상면 장구지에서 성장하였으며, 개항기에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6년 함양군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뛰어난 지략으로 호남 의병단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사살하는 군사 훈련에 전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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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방송 작가. 박성조(朴成祚)[1939~1997]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동 고등학교와 고려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63년 『조선 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에 인선(人選)하였으며, 1966년 1월 『동아 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에 「여직공 달래」로 가작 입선하였다. 1968년 문화 공보부에서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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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박춘실(朴春實)[1875~1914]의 본관은 밀양(密陽), 본명은 박동식(朴東植)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창의(倡義) 격문을 돌렸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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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언론인. 백낙천(白樂千)[1947~2009]은 1947년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태어났다. 1965년 전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성균관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99년 성균관 대학교 언론 정보 대학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년 중앙 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딛었으며, 1975년~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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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박일표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박일표(朴日杓)가 설천 면장으로 근무할 당시 구천동에 큰 흉년이 들자 어려운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세금을 대납해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에 1919년 7월 마을 사람들이 박일표의 선정을 기려 삼공리 박일표 불망비(三公里朴日杓不忘碑)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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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 있었던 학교. 삼숭학교(三崇學校)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늘갓에 교회[늘갓 교회, 현 여올 교회]가 설립되면서 늘어나게 된 적상면 지역 일원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신학문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사람으로 무주에 와서 교회를 세운 송희중이 교회에 모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자 학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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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원당천 주변에 있는 개항기 정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7]이 낙향하여 머물면서 호남과 영남 지역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서벽정(棲碧亭)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는 천연의 절경을 이루어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각 계곡을 ‘무계구곡(武溪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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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의 소작농들이 소작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벌인 농민 운동.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식민지 지주 소작제가 강화되었다. 무주군은 고산에 둘러싸여 평지가 적었지만 읍내 부근과 무주군 무풍면, 안성면 등지에 평탄한 경지가 있었다. 무주군 내에 100정보 이상의 경지를 소유한 지주는 오성근(吳盛根)과 김영곤(金榮坤) 등으로 경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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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도로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소천리 개도 기념비(所川里開道紀念碑)는 설천면 소재지에서 무풍면으로 넘어가는 임도(林道)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1939년에 건립하였다. 소천리 개도 기념비는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대불리로 넘어가는 지방도 변에 있다. 높이 180㎝, 너비 32㎝ 규모의 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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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백사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소천리 백사순 유적비(所川里白思舜遺蹟碑)는 백사순이 문중과 마을을 위해 힘쓴 공적을 기려 1942년 수원 백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설천 고등학교에서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평지 마을 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소천교가 나온다. 소천교를 건너 바로 좌측에 숭모재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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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수원백씨 문중의 내력을 기록한 비. 소천리 수원백씨 유적비(所川里水原白氏遺蹟碑)는 1949년 3월 수원백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수원백씨가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평지 마을에 자리잡게 된 배경과 문중의 내력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설천 고등학교에서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평지 마을 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소천교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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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개항기 김병택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소천리 전 오위장 김병택 시혜비는 주민들을 위한 공로를 기려서 1902년 3월 건립되었다. 하지만 김병택(金柄澤)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정확히 어떤 공로를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비문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소천리 오위장 김병택 시혜비는 설천면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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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있는 개항기 부사 이성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우국지사 이성열(李聖列)[1865~?]의 호는 퇴암(退庵)으로, 1888년(고종 25) 판관으로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응교, 규장각 직각, 시강원 문학 등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직무상의 문제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난 뒤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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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신명선(申明善)[?~1908]은 대한 제국의 시위대(侍衛隊)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별명은 신명선(申明先)이다. 1907년(순종 1) 제3차 한일 협약(韓日協約)이 체결되고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 무주로 돌아왔다. 이후 창의(倡義)를 결심하고, 1907년 먼저 거사 준비를 위하여 황이만(黃二萬) 등과 함께 거병에 필요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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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자신(自信), 호는 계은당(溪隱堂). 문희공(文僖公) 신개(申皆)의 8세손인 신춘석(申春錫)[1572~1633]의 후손이다. 신백희(申百熙)[1857~1939]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양하고 곧았으며 효심이 깊었다. 무주 지역에서 거주하였는데, 학문을 좋아하여 고금의 문전(文典)을 섭렵하였다. 세상의 명리(名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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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언론인 겸 시인. 신찬균(申瓚均)[1937~2006]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에서 출생하였다. 1956년 전주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전주 고등학교 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스승이었던 시인 신석정(辛夕汀)의 가르침을 통해 작가 정신과 언론인의 자세를 배웠다. 1961년 동국 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경향 신문사 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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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단지봉에서 벌어진 무주 경찰, 학도의용대와 인민군과의 전투.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는 6·25 전쟁을 목전에 두고 유격 활동을 해오던 남로당의 이현상(李鉉相) 빨치산 부대가 집결해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한 후인 7월 21일 덕유산에서 안성으로 내려와 무주군을 점령하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과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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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오산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초계 군수 권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초계군수 권공 서식비(草溪郡守權公棲息碑)는 초계군수를 지낸 아버지 권표(權杓)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아들인 권용빈(權容斌)이 1920년(경신년) 8월에 건립하였다. 무주읍 오산 삼거리에서 무설로 성주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1.4㎞ 이동하면 오산 마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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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서 1910년 사이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무주 지역은 영남과 호남을 양쪽에 두고 덕유산(德裕山)이 위치하여 영호남의 의병 활동이 용이하였던 곳으로 강무경(姜武景)·문태서(文泰瑞)·김동신(金東臣)·박춘실(朴春實)·신명선(申明善) 등 많은 의병 부대가 활동하였다.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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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주 출신 무인. 이만번(李晩蕃)[1680~?]의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두천(斗川)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출생하였다. 무술 실력이 뛰어나 정희량(鄭希亮)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 안의까지 그 소문이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가끔 이만번에게 금품과 사람을 보내 가까이 지내려고 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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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애국지사이자 교육자. 이시발(李時發)[1865~1934]의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간설(艮雪)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에서 태어났다. 1896년(고종 3) 2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무주에 들렀을 때 항일 의사(抗日義士) 유완무(柳完茂)와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김구를 보호하였다. 당시는 김구가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죄로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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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이용이(李用伊)[1868~?]는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에서 출생하였다. 문태서(文泰西)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며,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문태서는 대한 제국 군대의 하사 출신으로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지리산에서 창의(倡義)하였다.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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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이장춘(李壯春)[1888~1910]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출생하였다. 이병렬(李秉烈)이라고도 불렸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며 군대까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이장춘은 1906년 10월쯤 덕유산(德裕山)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2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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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흥양(興陽), 호(號)는 척산(尺山). 아버지는 이시발(李時發)이다. 이시발은 1894년(고종 31) 교우하던 유완무(柳完茂)가 나라를 걱정하며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활동할 때 그와 뜻을 같이하면서 그의 처자식을 친히 돌보았다. 김구(金九)가 무주를 방문하자 상봉하여 구국의 방책 등에 대하여 장시간 토론하였다. 한편, 어버이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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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이종성(李鍾誠)[1871~1910]의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순종 2) 문태서(文泰西)[1880~1913] 의병 부대에서 활약하였다. 문태서는 1907년 제3차 한일 협약(第三次韓日協約)이 체결된 후 무주에서 의거하며 덕유산(德裕山)을 주요 무대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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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이팔문(李八文)[1885~?]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마곡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순종 1) 10월 무렵 전라북도 무주군 동면 소숙방산(少宿方山)에서 이장춘(李長春)이 인솔하는 의병 부대에 가담하였다. 이장춘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출신으로 덕유산(德裕山)을 근거지로 무주, 남원, 장수, 함양 안의, 영동, 옥천 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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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무주 지역의 인구는 1911년 조선인 3만 5912명, 일본인 63명, 1921년 조선인 4만 6228명, 일본인 198명, 1930년 조선인 5만 737명, 일본인 249명, 1940년 조선인 4만 7717명, 일본인 256명, 1943년 조선인 5만 1184명, 일본인 268명이었다. 조선인은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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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임익상(林翊相)[1887?~1910]은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7월 박화윤(朴化允) 외 5명과 함께 전라북도 장수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0월 박화윤, 이사필(李士必), 이달서(李達西), 이문재(李文在), 서학서(徐學三) 등과 함께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에서 일본인 벌목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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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장광옥(張光玉)[1888~1966]은 전라북도 무주군 횡천면 상두리[현재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대한 제국기인 1908년(순종 2) 유종환(兪宗煥)[1859~1909] 의병 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유종환은 서울 출신으로 선전관을 역임하였는데, 1906년 고종(高宗)의 밀지를 받고 의병에 투신하여 육남 소모장(六南召募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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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장군선(張君先)[1876~?]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서 출생하였다. 문태서(文泰瑞) 의병 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김부개(金富介)·장한갑(張漢甲) 등과 함께 각자 곤봉과 총을 휴대하고 총 35정을 휴대한 다음 동료 의병 50명과 함께 1909년 음력 3월 25일 밤 충청북도 영동군 양남면 필력촌(筆力村) 용산리의 홍관서(洪寬西)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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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장여준(張汝俊)[1858~?]은 전라북도 무주군 횡천면 헌방리[현재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순종 3) 8월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조석우(趙錫祐)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유력한 의병장들의 전사와 일본 군경(軍警)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위축되어 가자 그해 8월 23일, 충청북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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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할아버지는 전치선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찾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위하여 일부러 선교사와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후 집안사람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전일봉(全日奉)[1896~?]으로, 1919년 4월 1일 무주읍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체포된 후 8개월 동안 형을 살았다. 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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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일봉(全日奉)[1896~?]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가리 늘갓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전치삼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점차 신학문을 접하면서 민족 자결을 통해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독립 정신을 갖게 되었다. 1916년 삼가리 늘갓 마을에 삼숭 학교(三崇學校)가 설립되고 교장에 전우삼이 추대되었는데, 전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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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에서 무주 공공 프로젝트를 통하여 공공 건축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鄭寄鎔)[1945~2011]은 인위적인 건축을 배제하고, 자연이나 주어진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그래서 '흙 건축의 대가', '생태 건축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기용은 건축 작품을 통하여 '사람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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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있던 무주군 최초의 근대식 병원. 지남병원(芝南病院)은 무의촌(無醫村) 무주 지역의 주민들에게 근대식 의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신현돈(申鉉燉)이 1933년에 개설하여 의료 활동을 하다가, 1948년 제헌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하면서 아들 신숙철에게 병원장을 물려주었다. 후에 영성 병원으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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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낙철(崔洛哲)[1921~2005]은 1921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무풍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사범 학교 심상과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모여 민족의 장래에 대해 협의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체인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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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최충길(崔忠吉)[1891~?]은 1907년(순종 1) 말 동지를 규합하여 호남 의병단에 들어가 무주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호남 의병단은 문태서(文泰瑞)가 중심이 되었는데, 문태서가 덕유산(德裕山)의 원통사(圓通寺) 부근에서 산포수 10여 명을 모으고, 장수군에서 활동하던 박춘실(朴春實) 의병대, 박수문 의병대, 전성보 의병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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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에 있는 구한말 전사한 신명선 의병 부대의 유해를 합장한 무덤. 칠연의총(七淵義塚)은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 통안 마을 은반대에서 0.1㎞ 지점 계곡 왼편에 있다. 1907년 일본의 강압으로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조직된 의병 신명선 부대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15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한 후, 의병 문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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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백남(柏南). 조선 전기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이며, 취은공(醉隱公) 하형도(河亨道)[1606~1678]의 8세손이다. 생몰년이 미상이나 8대조 하형도가 17세기 사람이니 개항기 정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이 집안이 무주에 들어온 것은 하형도의 아버지 하위국 때이다. 하현(河鉉)은 과거에 뜻을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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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한진수(韓鎭壽)[1878~?]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에서 출생하였다. 29세이던 1907년(순종 1) 말 문태서(文泰瑞) 부대에 들어가서 호남 의병단으로 활동하였다. 호남 의병단은 문태서 부대를 비롯하여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출신 박수문(朴守文) 의병대, 무주군 안성면 오동리 출신 전성범(全聖範) 의병대 등 여러 소부대가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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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허항(許恒)[1863~?]은 삼곡면 촌이본[현재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허항은 조석우(趙錫祐)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운봉 출신인 조석우는 1909년(순종 3) 8월 충청북도 영동군 양내면 영국사(寧國寺)에서 장군선(張君先)·조덕장(趙德章)·권덕원(權德元) 등과 뜻을 같이 하고 의병을 조직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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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이후 현재까지의 전라북도 무주 지역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주군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분단과 6·25 전쟁,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이루어 낸 경제 발전 등 한국 사회의 성장 및 발전과 그 궤적을 함께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23부(府), 331군(郡)으로 개편함에 따라 무주 지역을 관할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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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황대연(黃大淵)[1876년~1908]의 자는 진연(鎭淵), 호는 석정(石亭)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고종 4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高宗)을 위협하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 뒤 국권 침탈이 빠르게 진행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황대연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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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무주 출신의 의병. 황이만(黃二萬)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서 출생하였다. 의병장 신명선(申明善) 부대에 가담하여 충청남도 금산군, 전라북도 장수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순종 1) 11월 30일 황덕화(黃德化) 등 동료 의병 8, 9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금산군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1908년 4월 10일 신명선 의병 부대의 일원으로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