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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 황무지 개간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17
한자 仁川富平荒蕪地開墾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이희열|마츠다 코조|아유가이 후사노신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5년 2월연표보기 - 인천 부평 황무지 개간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06년 12월 -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을 반포로 인한 외국인의 토지 소유 전면적 허용
발생|시작 장소 주안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정의]

1905년과 1906년에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 개간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발생한 분쟁.

[개설]

일본인 마츠다 코조[松田行藏]이 1905년 2월 한국인 이희열의 명의를 빌려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에 대한 개간 특허권을 획득한 후,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에게 양도하려 하였다. 한국 정부가 개간 특허권 환수 조치를 하자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역사적 배경]

인천 개항 후 개항장에 들어와 거주했던 다수의 일본인들은 인천 인근 지역에 분포돼 있는 간석지와 황무지 등 미간지를 개간해 소유하려고 계속 시도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의 토지 소유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명의를 이용해 불법으로 토지를 획득하는 방법을 자주 실행하였다. 1899년 월미도 미간지 침탈 사건이나 1905~1906년에 발생한 영종도 개간 사건은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토지 침탈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과]

1905년 2월 이희열은 경기도 인천군 주안면 주안포와 부평군 가자포의 황무지를 영친왕궁에 부속시키고 개간 후 3년이 지났을 때부터 영친왕궁에 납세하기로 약정하여 해당 토지에 대한 개간 특허권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의 황무지 개간 특허권 획득은 사실상 일본인 마츠다 코조이 이희열의 명의를 이용해 추진한 것이다. 마츠다 코조은 1906년 6월 황무지 개간 특허권을 획득하는 데 지출한 비용 7,600원을 받고 같은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에게 권리 일체를 양도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토지의 매매나 전당은 불법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미 이희열과 약정한 개간 특허권을 환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마츠다 코조은 통감부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특허권 인정 여부를 통감부를 통해 확인하는 절차를 밟고자 하였다. 이로써 황무지 개간권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통감부 사이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결과]

통감부는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할 법제를 추진하여 1906년 10월 26일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을 반포,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12월부터 전면적으로 허용하였다.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에 관한 종래의 국지성을 폐지하고 국내 어디에서나 부동산 소유를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어서 1907년 7월 ‘국유 미간지 이용법’을 반포하여 일본인들도 국유 미간지를 합법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인천 부평 황무지 개간 사건은 인천 개항 후 인천 지역에서 자행된 일본인의 불법적인 토지 침탈 과정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시키고 일제 강점기 때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토지 침탈의 합법화를 완성시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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