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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53
한자 李喜朝
이칭/별칭 동보(同甫),지사재(志事齋),지촌(芝村),간암(艮菴),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인천 현감|대사헌
출생 시기/일시 1655년연표보기 - 이희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95년 3월 1일연표보기 - 이희조 인천 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96년 11월 13일 - 이희조 인천 현감 이임
몰년 시기/일시 1724년연표보기 - 이희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0년 2월연표보기 - 이희조 청덕 선정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25년 - 이희조 좌찬성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26년연표보기 - 이희조 학산 서원에 배향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유배|이배지 이희조 유배지 - 전라남도 영암군
묘소|단소 이희조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1
사당|배향지 학산 서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문학산 기슭
선정비 이희조 청덕 선정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인천 향교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 현감(仁川縣監)을 역임했고, 사후 학산 서원(鶴山書院)에 배향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사재(志事齋)·지촌(芝村)·간암(艮菴)이다. 아버지는 부제학을 지낸 이단상(李端相)이고,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이행원(李行遠)의 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2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안동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

[활동 사항]

이희조(李喜朝)[1655~1724]는 15세에 아버지 이단상을 여의고, 아버지와 막역했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어 학문에 전력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南人)들의 탄핵으로 송시열이 귀양을 간 뒤에는 경기도 양주의 지동(芝洞)에 은거하며 「대귀설(大歸說)」을 지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다시 천거되어 전설사[조선 시대에 병조에 속하여 장막(帳幕)을 치는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별검(典設司別檢), 의금부[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 하던 관아] 도사(義禁府都事),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희조는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고 송시열이 사사되자 벼슬에서 은퇴하였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후에 다시 기용되어 1695년 3월 인천으로 부임하여 1696년 11월까지 약 20개월간 인천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희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에 재임하면서 “이곳은 나의 선부(先父)가 부사를 역임한 고장으로서, 선부의 치적이 아직 남아 있는 이곳에서 정사에 능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면목으로 선묘(先廟)를 배알하고 노모를 안도하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대흉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성력을 다하는 등 선치(善治)에 힘썼다. 재임 기간 중에 인천 지역 교육 진흥에 힘쓰는 등 치적이 있어 이임한 지 14년 후인 1710년 청덕 선정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기렸다.

이희조는 그 뒤 동궁 서연관(東宮書筵官)[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인 서연에 참여하는 관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천안 군수(天安郡守), 장악원[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정(掌樂院正)을 거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부임했다. 이희조는 해주 목사에 부임하자 석담(石潭)에 율곡 이이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搖琴亭)을 세웠다. 또 이제묘(夷齊廟)에 송시열의 글씨로 편액을 달고 기문(記文)을 지어 걸었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의 사당을 세워 민심을 격려하였다.

1717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듬해 이조 참판(吏曹參判)·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인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성균관 제주(成均館祭酒)를 지내고 1719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철산(鐵山)으로 배소를 옮기는 도중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희조는 노론과 소론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윤휴(尹鑴)를 이단으로 배척하고 윤증(尹拯)에 대하여 배사론(背師論)으로 일관하면서 송시열의 노론을 옹호했다. 이희조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관하여 이이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기발(旣發)에 있어서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어떤 면에서 원인하는가에 따라서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지지만, 마음 가운데에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작용하여 발(發)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이희조는 중용(中庸)의 중(中)이라는 의미는 정이(程頤)가 ‘불편불의(不偏不倚)’라 하고 주희(朱熹)가 ‘무과불급(無過不及)’이라 하여 미발(未發)과 기발(旣發)을 달리 해석한 것 같지만 정이는 미발과 기발을 함께 말하되 미발의 측면에서 말하고 주희는 정자의 말을 보충하여 기발의 중(旣發之中)의 입장에서 해석했다고 했으며 중이란 둘을 겸한 것이라 하여 이(理)로 표현했다. 이희조순경(荀卿)의 성악설(性惡說)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등 이단을 극력 배척했다.

이희조의 저서로는 『지촌집(芝村集)』이 있으며, 편서로는 『우서 절요(尤書節要)』·『주자 대전 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1번지 마명 마을 뒷산에 있으며, 부인 안동 김씨와 합장묘이다. 묘역에는 묘표, 혼유석(魂遊石), 장대석(長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등의 석물이 있다. 상석은 2개의 북석으로 받쳤으며 망주석은 육각형 받침대를 갖추었다. 묘표는 직사각형의 받침돌과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碑身) 위로 팔작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린 형태이며, 비문은 김원행이 짓고 김상숙이 글을 썼다.

[상훈과 추모]

이희조가 인천 현감으로 재임할 때 그가 거처하는 곳을 ‘인민당(人民堂)’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사실들을 기록한 김창협(金昌協)의 「인민당기(人民堂記)」가 『인천 읍지(仁川邑誌)』에 전한다. 아버지 이단상에 이어 이희조의 선정은 오랫동안 인천 지역민들에게 기억되었고, 1710년(숙종 36)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희조 청덕 선정비(李喜朝淸德善政碑)’가 건립되었다.

이희조는 1725년(영조 1)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726년 아버지를 배향했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문학산 기슭의 학산 서원과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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