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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단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04
한자 祈雨壇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산 27-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배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우단 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49년 5월연표보기 - 기우단 터 인천시립 박물관에서 조사
소재지 기우단 터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산 27-1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던 기우단의 터.

[개설]

농업을 주 산업으로 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물을 중요시 여겨왔다.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잦다. 때문에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야 했고, 기우제는 국왕의 임무일 뿐만 아니라 지방 수령들의 임무이기도 했다. 한 해의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이러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을 기우단(祈雨壇)이라 하는데 임금이 몸소 지내는 기우제에는 우사단(雩祀壇)을 쓰고, 제관(祭官)이 지낼 경우 기우단을 사용하였다. 가뭄이 들면 7일마다 한 번씩 산림천택(山林川澤)에 제사를 지내고, 만약 이같이 해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처음과 같이 산림천택에 제사를 지내고, 가뭄이 더욱 심하여지면 기우초제(祈雨礁祭)를 지내는 제단인 기우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변천]

인천도호부를 다스렸던 인천 부사의 경우에도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에 있었던 기우단이다.

[위치]

문학산에서 서쪽 연경산 북쪽 산기슭에 있었다고 전한다.

[발굴조사 경위 및 결과]

기우단 터는 1949년 인천시립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학산 방면 고적 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사는 지표 조사 및 구술 채록 조사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기우단에 대한 현황이나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당시 조사 내용을 전하면 다음과 같다. “문학사에서 또 산중턱을 끼고 서쪽으로 우회하면 산허리가 길게 돌출한 곳에 다다른다. 이 돌출부에 선단(先端)은 마치 인공적으로 구축한 것 같은 돌기를 하고 있는데 이 선단에 바로 기우제단이 있다. 몇 개의 자연석으로 단을 만들고 날이 가물 때 제관이 이 제단에다 정성껏 차려 놓고 북면에서 남면 산봉을 올려다보며 산신과 하늘을 향하여 비오기를 기구(祈求)하던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사 당시만 해도 자연석으로 조성된 석축 제단이 일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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