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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92
한자 鶴翼支石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인돌
양식 탁자식
크기(넓이 280×169㎝|195×175㎝
크기) 50cm|35㎝
문화재 지정번호 인천광역시 기념물
문물|보호단위등급 인천광역시 기념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 학익지석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 실시
문화재 지정 일시 1995년 11월 15일연표보기 - 학익지석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학익지석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재지정
출토 유물 소장처 인천광역시립 박물관 -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60번길 26[옥련동 525]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었던 고인돌.

[개설]

인천광역시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유적으로는 간 돌도끼, 간 돌살촉, 반달형 돌칼 및 토기 조각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인 역시 고인돌 떼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지역 외에 옛 인천의 중심지였던 원인천(原仁川) 지역인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조사·보고되었지만, 현재 그 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학익동 고인돌 2기, 주안동 고인돌 1기, 문학동 고인돌 1기뿐이다.

[위치]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160번길 26[옥련동 525] 인천광역시립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었던 고인돌[지석묘]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27년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을 받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사와 준이치[澤俊一] 등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졌다. 발굴된 고인돌은 3기인데, 모두 탁자식이었다. 이후 이곳에 인천 소년 형무소가 들어서면서 1기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1929년 오카다 코[岡田貢]는 학익동 고인돌은 모두 8기가 있었고, 그 중 3기를 경성 제국 대학에서 발굴하여 2기를 복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1927년 이후 발굴이 한 차례 더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8년에는 인천 구치소 부지에 있던 탁자식 고인돌 1기를 확인·조사하였는데, 이 고인돌은 기존에 보고되었던 학익동 고인돌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형태]

인천 소년 형무소 자리에 있었던 고인돌의 뚜겅돌 크기는 280×169㎝, 두께는 50㎝이다. 굄돌은 한쪽 지석은 1장의 판석을, 다른 한쪽은 2개의 괴석(塊石)을 이용하였으며, 널방의 형태는 장방형이다. 지석 간 거리는 복원된 지석묘를 토대로 하면 35㎝이나, 최초의 기록을 보면 56㎝로 되어 있어서, 이전 과정에서 다소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150㎝이며, 묘실의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인천 구치소 부지에 있었던 고인돌의 개석의 크기는 195×175㎝, 두께는 35㎝이다. 지석은 판석을 사용하지 않고, 각 열마다 크기가 일정한 2개의 괴석을 이용하여 장방형(長方形)의 묘실을 조성하였다. 묘실의 장축 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출토 유물]

1927년 발굴 조사 결과 고인돌 내부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돌살촉, 돌칼, 지석 등이 출토되었다. 1929년에는 편마암제 돌도끼와 갈판돌 등 다수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마지막으로 1998년 발굴·조사하였을 때에는 조개껍데기와 고려 시대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을 뿐, 청동기 시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황]

현재는 인천광역시립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위치해 있다. 인천 소년 교도소 부지에 있었던 지석묘를 1971년 교도소가 확장되면서 자유 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으로 옮긴 것이다. 1995년 11월 15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였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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