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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67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관련인물/단체 남유|김민선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결
발생|시작 장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종결 장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전쟁.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 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1597년에 시작된 일본의 재침입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당시 자신들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서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 각지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왕이었던 선조(宣祖)도 멀리 의주까지 피난해야 했을 정도로 조선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르게 한 전쟁이었다. 다행히 이순신, 권율 등의 장수들이 분전하고 명(明)의 지원군이 합세하여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회군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문학산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주목할 만하다.

[경과]

1592년 5월 19일 부평에 침입한 소서행장의 일본군은 부천의 원미산(遠美山) 장대봉(將垈峯)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을 물리치고 부평읍[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침입하여 계양산성을 수축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부평 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피신만 하였다. 그리고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한 일본군의 일부가 1592년 5월 20일 인천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부평 출신의 김민선(金敏善) 인천 부사가 만반의 방어 태세를 갖추어 안대평(安垈坪)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결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지금의 간석역 앞 하천의 다리를 일본군이 패전하여 흩어진 곳이라 하여 왜산교(倭散橋)라 불러 왔다. 또한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군사를 갖추어 수차례에 걸쳐 침공하였으나, 이에 맞서 백성을 이끌면서 김민선문학산성을 사수하였다. 김민선을 기리는 안관당(安官堂)을 문학산성 안에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 인천광역시사 편찬 위원회, 『인천광역시사』(인천광역시, 2002)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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