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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62
한자 郡縣制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1390년 - 인주(仁州)에서 경원부로 승격 개칭
시행 시기/일시 1392년 - 경원부에서 인주로 환원
시행 시기/일시 1413년 - 인주에서 인천군으로 개편
시행 시기/일시 1459년 - 인천군에서 인천 도호부로 승격

[정의]

신라ㆍ고려ㆍ조선 시대에 지금의 인천광역시를 포함한 지방 제도.

[개설]

군현제 는 한반도에 일찍부터 전해져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는 초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변 소국을 점령할 때마다 군현(郡縣)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나, 일반적으로 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통상 한국에 군현제의 등장은 신라 지증왕(智證王)[437~514] 때 주요 군사 지역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둔 것을 군현제(郡縣制)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군(郡), 현(縣)이 차례로 생기고 이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 정복 지역을 포함한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밑에 군현을 두어 통치하였다.

후삼국을 거쳐 고려가 성립되면서 군현제는 단순한 통치 조직이 아니라 읍의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877~943]은 전쟁 중에 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빈번하게 읍호(邑號)를 주(州)로 승격시켰고, 이후에도 읍호를 승격시키거나 낮추는 일이 많았다. 특히 고려 때는 속현이 등장하여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상태로 다른 군현에 소속되는 일이 있었다.

[변천]

지금의 인천은 처음에는 백제의 미추홀(彌鄒忽)이었다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불렸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한화(漢化) 정책으로 매소홀현에서 소성현(邵城懸)으로 이름이 바뀌고 율진군(栗津郡)의 속현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 현종(顯宗) 때[1018]에는 다시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숙종(肅宗)인예 태후(仁睿王后)[?~1092]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왕비의 친정이 있는 고장]이라 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키게 된다. 다시 고려 인종(仁宗) 때는 순덕 왕후(順德王后)[?~1118]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시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다. 이후 이자겸(李資謙)[?~1126]의 난으로 왕실과 인주 이씨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지만, 1390년(공양왕 2)에 왕이 조상을 추숭하는 의미에서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읍호를 올리게 된다.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1)에 다시 인주로 강등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군현의 이름에서 ‘주(州)’ 자를 모두 ‘산(山)’, ‘천(川)’자로 바꾸면서 인천군(仁川郡)이 되었다. 이후 1460(세조 6)에는 세조(世祖)의 왕비인 정희 왕후(貞喜王后)의 외향(外鄕)[외가(外家)가 있던 곳]이라는 이유로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京畿) 인천도호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 또는 미추홀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소성으로 고치어 율진군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수주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 왕후 이씨의 본관이므로 경원군으로 승격하였고, 인종이 또 순덕 왕후 이씨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왕이 처음에 즉위하여 칠대 어향이라 하여 승격시키고, 또 고을 호장(戶長)에게 붉은 가죽 띠를 주었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인주로 만들었고,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 6년에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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