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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해상 항로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48
한자 西海海上航路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세호

[정의]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 백제, 신라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이용했던 서해의 항로.

[개설]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과 그 이듬해에 중국의 진(晋)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하고 한반도 서남부의 대표적 세력으로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공식적인 외교 관례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4세기 이후 중국 대륙은 양자강을 경계로 하여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로 갈라져 있었다. 이후 진나라는 유목 민족인 5호(五胡)의 침입으로 강남까지 밀려나 동진(東晋)이 되었고, 이에 동진은 그들 나름대로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지배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와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로 백제와 고구려가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와 적대 관계에 놓인 백제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통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때 백제가 이용한 항로가 등주항로(登州航路)로, 한강 하류 지역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물도(德物島,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항로이다.

인천이 백제 사신의 출항지가 된 것은 백제의 한산에서 서해로 빠지는 한강 하류 지역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전통적인 해상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현재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해안 쪽 선단에는 능허대라는 큰 나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백제의 사신들이 해로로 중국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던 곳으로 전해진다.

[변천]

백제가 능허대를 통해 중국과 통교한 것은 근초고왕 대에서 475년(개로왕 21)까지의 100여 년간이다. 한성 시대에 대중국 통교의 관문이었던 능허대의 역할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끝이 났다. 남쪽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는 백마강을 통하여 중국과 통교하였고, 고구려는 한강을 점령한 후에도 육로를 통하여 중국과 통교하였다. 이후 한강 유역을 점령한 신라는 남양의 당항성(黨項城)을 통하여 중국과 통교하였으며,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당항성과 영암 방면의 흑산도를 항로로 이용하였다. 이후 후백제는 나주를 통하여, 고려는 예성강을 통하여 중국과 통교하였기 때문에 능허대가 있는 인천 지역은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더는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이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서해 해로와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적극적인 대당 외교 정책을 실시하여 100회 이상의 견당사를 당에 파견하였는데, 황해를 이용한 해상 항로의 경우 황해 북부 연안 항로ㆍ황해 중부 횡단 항로ㆍ황해 남부 사단(斜斷) 항로 등의 세 갈래 뱃길을 이용하였다. 이중 인천 연안을 이용하는 항로가 북부 연안 항로와 중부 횡단 항로이다.

또한 북부 연안 항로는 한반도의 서북쪽 연안과 중국의 동북 연안을 따라 반원 모양을 그리고 항해하므로 난파나 조난의 위험이 없는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 그러나 무역선의 교역 상품과 선원들을 탈취하는 해적들의 피해가 적지 않게 발생하여 국가에서는 서남해안 교통의 요지에 진(鎭)을 설치하여 대외 무역선의 항로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진들 가운데 844년 인천 강화도에 설치된 것이 혈구진(穴口鎭)이다. 강화도의 혈구진은 당시 해상 교통의 길목이었던 강화도에 해적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에 중국과의 통교 시 서해상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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