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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47
한자 百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이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기원전 18년 - 백제 건국
특기 사항 시기/일시 475년 - 백제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538년 - 백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0년 - 백제 멸망
백제 수도 웅진 - 충청남도 공주시
백제 수도 사비 -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 유적 능허대 -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백제 유적 문학산성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정의]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포함되었던 고대 국가.

[개설]

678년간 존속한 백제의 역사는 시조 온조왕에서 사반왕까지의 소국-소국 연맹 시기, 고이왕에서 계왕까지의 5부 체제 시기, 근초고왕 이후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 백제의 역사 전개는 한성 시대(漢城時代) 전기[근초고왕~아신왕], 한성 시대 후기[전지왕~개로왕], 웅진 시대(熊津時代)[문주왕~무령왕], 사비 시대(泗沘時代)[성왕~의자왕]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는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의 구성원이었으나, 마한의 여러 국(國)들을 병합하면서 한강 유역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시달리다가 개로왕 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475년 수도를 웅진[현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이전하였다. 천도 초기에는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문주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 혼란이 매우 컸다. 이러한 가운데 즉위한 동성왕은 금강 유역권의 신진 세력들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하여 남하해 온 구 귀족과 세력 균형을 꾀함으로써 정치 질서는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다. 500년(동성왕 22) 동성왕백가(苩加) 세력에게 피살된 뒤 즉위한 무령왕백가의 반란을 평정하여 왕권 강화를 추진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하나로서 무령왕은 지방 통치 조직인 22담로(擔魯)에 자제(子弟)와 종친(宗親)을 파견하였다.

무령왕 대에 다져진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성왕은 538년에 사비[현 충청남도 부여군]로 천도하였다. 사비 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중앙 통치 조직을 내신좌평(內臣佐平)·내두좌평(內頭佐平)·내법좌평(內法佐平)·위사좌평(衛士佐平)·조정좌평(朝廷佐平)·병관좌평의 6좌평(佐平), 좌평·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좌군·진무·극우의 16관등제(官等制)와 22부제(部制)로 정비하였고, 왕도 조직은 5부-5항제로 편제하였으며, 지방 통치 조직은 5방-37군-200 또는 250성으로 재정비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성왕의 개혁 정책은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수포로 돌아갔다.

뒤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신라와의 전쟁으로 위기 극복을 모색하는 한편, 새로운 외교 정책으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위덕왕대 기사 가운데, 외교 기사가 6할이나 되고, 수, 북제, 진, 후주 등 네 나라와 연 14회의 교섭을 하였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에 의한 국가적인 활로 개척은 무왕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마지막으로 무왕을 계승한 의자왕은 즉위 직후 지방을 순행하면서 사죄(死罪) 이외에는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을 꾀하였다. 그러나 후반기에 신라와 대립하면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고, 또한 측근 세력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재정을 낭비하였다. 결국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인천과 백제]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국가 형성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온조 집단과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류 집단의 결합을 통해 시작되고 있으며, 백제의 건국 신화에는 온조 집단이 비류 집단을 흡수하는 것으로 백제의 건국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백제는 서해안의 비류 세력이나 토착 세력을 통합함으로써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가락동 2호분과 석촌동 파괴분에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한 봉토(封土) 안에 공존하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강화도, 경기도 김포시·시흥시 등 서해안 일대의 토착 세력의 묘제(墓制)인 토광묘가 마한 지역의 주된 묘제인 옹관묘와 같이 한강 하류의 적석총과 함께 분포된 것은 백제 세력의 확대를 의미한다. 또한 비류 세력이 활약하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다는 기록과 같이 소금 산지였는데, 내륙 세력인 온조 세력은 소금 산지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발전은 한강 유역의 문화와 경제적 바탕으로 기반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류가 도읍하였던 미추홀, 즉 현재의 인천 지역 역시 백제로 편입되어 갔던 것이다.

[인천의 백제 문화]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해안 쪽 선단에 능허대라는 곳이 있는데, 중국과 통교하기 위한 백제의 사신을 실은 배의 출항지라고 전하는 곳이다.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고 보호하고 있으나 현재는 해변이 매립되어 해안 도로가 옆을 지나고, 주변에 아파트가 둘러져 있어 능허대의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능허대를 백제 전승 유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이래 1960년대까지 대진 혹은 한진이라 불린 유서 깊은 포구였고, 능허대 동북 해변인 옹암 부근에서 백제 특유의 군사 방어 시설인 옹로(甕路) 시설이 확인된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한성에 도읍을 두던 시기 백제에서도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인다.

이 외에도 문헌이나 구전 자료 등을 통해 알려진 인천의 백제 혹은 삼국 시대 유적은 문학산성, 백제정 등이 있다.

문학산의 경우 선사 시대 이래 인천 고대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여겨진다. 문학산을 비롯한 인천 지역에서 고고학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백제 유적은 8곳이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문학산 주변에서 2곳이 발견되었고, 문학산 서쪽 끝 해안에서 건너다보이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서 6곳의 백제 토기 산포지가 발견되었다. 수습된 백제 토기 조각은 40여 점이고 일부 기와 조각도 확인된다. 연대는 기원전 2~5세기에 걸쳐 있으며 이들 유적은 인천 지역 백제 문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인천 지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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