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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255
한자 官廳-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집필자 이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06년 - 관청 마을이 있던 읍내리가 관청리와 향교리로 분리
변천 시기/일시 1917년 - 관교리와 승기리를 통합해서 관교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0년 - 관교리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하고 원정(元町)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946년 - 원정을 관교동으로 개칭
비정 지역 관청 마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개설]

관청 마을이 자리하고 있던 관교동문학동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인천의 중심지였으며 인천도호부 관아 소재지였다.

[명칭 유래]

예부터 인천도호부 관아와 그 부속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관청 마을이라고 불렸다. 이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 현재의 관교동이다. 관교란 관청과 향교가 있었음을 뜻한다.

[형성 및 변천]

1906년 인천읍 읍내리가 관청리와 향교리로, 동촌승기리가 대승기리와 소승기리로 나뉘었다. 1917년 6월 19일 부천군 관할 동리 개정으로 관교리와 승기리를 통합해서 관교리가 되었는데 1936년 10월 1일 부천군의 일부가 인천부에 편입될 때, 관교리의 일부[승기 부락]가 인천에 편입되어 주안정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문학면이 인천부에 편입될 때, 관교리도 편입되고 일본식 정명인 원정(元町)으로 개칭되었다. 읍내 관청리는 이름 그대로 인천도호부라는 관청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원정은 원부 소재지를 뜻하고 해방 직후 1946년 1월 1일 원정을 관교동으로 개칭하였다.

관청에는 아전(서기) 9인, 순교 8인, 통인 3인, 순졸 8인, 군인(지방군) 100여 명, 관노 등 소속원이 거의 읍 사람들이었고, 관청 근처에서 음식점과 여관을 경영하여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관청이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문학 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는 큰 나무 주유소 건너편 일대로, 2012년 1월 12일 현재 85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서의 관청 마을은 도시 개발로 인해 그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인천읍은 앞뒤가 모두 산이고 협소한 계곡에 농경지, 특히 논이 아주 적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이훈익, 『인천지지』(사단법인 대한 노인회 인천직할시 연합회, 1987)
  • 『인천의 지명 유래』 (인천광역시, 1998)
  • 네이버 블로그 인천 도시브랜드 행복한 인천 애(http://blog.naver.com/brandincheon)
  • 문학동 주민 센터 해당 연도 담당자 전화 인터뷰(2012. 1. 12)
  • 관교동 주민 센터 해당 연도 담당자 전화 인터뷰(2012. 1. 12)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5 문화재 명칭 변경으로 인한 현행화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도호부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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