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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1333
한자 仁川公設運動場
이칭/별칭 숭의 운동장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지명/시설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강희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체육 시설
면적 총면적 51,332㎡|건축 면적 11,884㎡|경기장 면적 17,519㎡|공지 면적 39,415㎡
전화 032-882-1034
건설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웃터골 공설 운동장 건설
개관|개장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웃터골 공설 운동장 확장 재개장
이전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인천 공설 운동장 웃터골에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으로 이전
개칭 시기/일시 1964년연표보기 -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숭의 종합 경기장으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8년연표보기 - 인천 공설 운동장 해체
최초 설립지 제물포 고등학교 - 인천광역시 중구 전동 26
주소 변경 이력 인천 공설 운동장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었던 종합 체육 시설.

[개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었던 인천 공설 운동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설 운동장으로, 인천 체육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건립 경위]

1920년에 인천부가 현 제물포 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 분지 공사를 한 후 공설 운동장으로 개설하였다. 1920년은 3·1 운동 다음 해로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뀌는 시기였다.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의 발행과 사회단체 조직을 허가하는 풍조에 따라 인천에도 운동장이 생기게 된 것이다.

웃터골은 우리나라 근대 스포츠의 최초 발생지이다. 당시 관청, 은행, 미두 취인소, 학교 등 인천의 각 기관마다 체육 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스포츠 붐이 일면서 웃터골이 큰 경기를 치르기에 협소해지자 인천부는 결국 조선 체육 협회와 용산 철도 야구부의 협조를 통해 확장 설계를 실시하였다. 1920년 11월에 웃터골 분지에 7,603㎡[2,300평] 이상의 땅을 확장하는 작업을 통해서 웃터골 운동장에 ‘그라운드’의 형태를 갖추었다. 1926년에는 2만 1322.31㎡[6,450평]으로 재확장함으로써 인천 최초의 공설 운동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1930년까지는 빨래터였던 곳을 운동장으로 조성하여 웃터골 공설 운동장으로 불렸다. 육상·축구·야구 등을 할 수 있는 종합 운동장이었으나 당시 축구는 골 포스트조차 없었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야구 백네트 시설은 갖추고 있었다.

웃터골에서는 자전거 경주 대회, 초등학교 운동회, 연합 체육 제전 등이 벌어졌지만, 야구 한일전이 있을 때면 으레 장외 민족 대결까지 벌어져 일본 경찰이 관중을 해산시키는 일도 많았다.

[변천]

1934년 웃터골은 인천 중학교가 설립되어 개교함으로써 학교 운동장이 되었고, 일본인들은 도쿄 올림픽을 겨냥하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육상장·야구장·정구장 2면이 있는 종합 경기장을 건설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인천 공설 운동장은 1955년에 정용복의 주도로 개보수되었다. 정용복이 미군에게서 지원받은 드럼통으로 공설 운동장 담을 쌓던 때부터 10년 뒤인 1964년에 드디어 제45회 전국 체전 개최라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64년 전국 체전에서 인천 공설 운동장은 서울과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이던 경기도 선수단의 홈그라운드 역할을 하였다. 인천시는 제45회와 제59회 두 차례에 걸친 전국 체전 유치로 다양한 경기장을 건립하는 등 시설 확장 및 개보수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인천 체육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인천 공설 운동장은 1964년에 숭의 종합 경기장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숭의 야구장은 고교 야구가 전성기였던 1960년대 당시 학생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1982년 프로 야구가 시작된 뒤로는 삼미 슈퍼 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등 인천 연고 구단들이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인천 공설 운동장은 야구장과 함께 수차례의 전국 체전과 프로 스포츠의 홈구장으로 사용되는 등 인천의 대표 운동장으로 자리매김하였지만, 2002 한일 월드컵에 맞춰 신축된 인천 문학 경기장으로 영광을 넘기며 프로 야구단의 훈련장이나 국내 경기용으로 사용되어 왔다.

[구성]

인천 공설 운동장은 축구와 럭비, 육상과 사이클을 겸용할 수 있었으며 표면은 천연 잔디와 육상용 트랙이 있었다. 22~32단의 스탠드를 보유하고 있었고, 야구장은 9~15단의 스탠드가 있었다. 정구장은 핸드볼 경기장을 겸용할 수 있었고 13단의 스탠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경기장의 총면적은 5만 5544㎡이었다. 경기장은 1만 7487㎡이었으며, 수용 인원은 3만 명이었다. 야구장의 총면적은 3만 5970㎡이었다. 경기장은 1만 1474㎡이었으며, 수용 인원은 1만 3760명이었다. 정구장의 총면적은 4,164㎡이었다. 경기장은 2,538㎡이었으며, 수용 인원은 4,000명이었다.

[현황]

2008년 6월에 인천 공설 운동장이 숭의 야구장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숭의 지구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3년 넘게 여러 가지 어려움 끝에 2012년에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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