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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젊은 시절 목계(木溪) 강혼(姜渾)은 아름다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또가 부임해 왔는데, 공교롭게도 강혼과 사랑에 빠져 있던 관기가 사또의 수청을 들게 되었다. 분함과 연정을 이기지 못한 강혼은 수청을 들러 가는 관기의 소매 자락을 붙들어 잡고 시 한 수를 휙 갈겨썼다. 강혼의 급작스런 행동에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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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유흥의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1980년 8월 3일 류종목, 빈재황이 당시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오방리 상촌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4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강재용(남, 59세)이다. 저달은 하나라도야 조선천하를 다밝힌데 요네눈은 두눈이라도 내의고향을 왜못보노 보이면 잊을줄이야 나도번연히 알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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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국문풀이 유흥요. 유흥요 국문뒤풀이는 일명 ‘언문뒤풀이’ 또는 ‘한글뒤풀이’라고도 한다. 이 노래는 놀이를 하지 않으면서 유흥의 분위기가 있을 때 부르거나 학동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 불렀다.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한글을 전수하던 한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국문뒷풀이’는 모두 열네 개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모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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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도구유희요. 그네노래는 오월 단오 때 아녀자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그네를 뛰면서 부르는 기능요이다. 외그네뛰기를 할 때는 혼자서 부르게 되나 둘이서 쌍그네뛰기를 할 때는 같이 노래를 부른다. 진주시 자료에 채록된 노래는 외그네뛰기에서 부르는 노래로 되어있다. 경상북도의 고령이나 예천 그네뛰기 노래는 가사가 긴 데 비해 진주 지역에 전승되는 그네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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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의 하나로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유행·전승되는 유흥요. 노랫가락은 창부타령 등과 함께 잡가에 속한다. 이들 노래는 처음에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었다가 점차 기생들에게 전파되어 유행되었던 노래이다. 노래의 주요 사설은 시조로 불리던 것이다. 이번에 채록된 노랫가락은 다양하게 불리던 사설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노랫가락은 창부타령과 함께 잘 알려진 경기 지방의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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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를 원료로 하여 비단을 생산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부르는 민요. 진주시와 통합하기 전 진양군 일대에서 많이 불려진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80년 8월 4일 류종목, 빈재황에 의해 조사된 진양군 미천면 민요와 거의 동일하다. 몇몇 낱말을 이해할 수 있게 고쳐 쓴 것을 빼면 형태 면에서나 노랫말의 진행으로 볼 때 동일한 노래로 보인다. 류종목, 빈재황의 조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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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부터 12월까지 매달의 상황에 맞게 노래로 부르는 민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생활과 감정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1월부터 12월까지 새 달을 맞을 때마다 그에 따른 민속과 생활과 감정을 담아 표현한 것이 ‘달거리’ 또는 ‘달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져 온 민요들이다. ‘달거리’ 또는 ‘달풀이’ 민요는 노래 부르는 시기로 보면 세시요에 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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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불려지는 모심기소리. 모심기소리는 서정민요에 속하는데, 사건의 전개가 아닌 감정의 표출이 주를 이루며 가창 방식은 대개 주고받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남녀간의 애정과 구애와 신세 한탄, 부모·형제를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댕기와 수건」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이 노래는 ‘모정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심기소리의 한 편이다. 궁사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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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모심을 때 부르는 민요. 「모심기소리」는 장르로 살펴보면 서정민요에 속한다. 「모심기소리」는 사건의 전개가 아닌 감정의 표출이 주를 이루며 가창 방식은 대개 주고받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심기소리」의 내용은 남녀 간의 애정과 구애, 신세한탄, 부모·형제를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된 자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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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제2아파트 앞에 조성된 시민휴식 체육공원. 원래 이곳에는 가마못이 있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현재의 비봉산 옛 이름은 대봉산이었다. 예로부터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되자 중앙에서 그 연유를 알아본 바 대봉산에 봉암이 있어 그런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에 봉암을 부수고 대봉산의 봉황을 끊기 위해 가마못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가마못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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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용휴(用休).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에 태어나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정, 좌통례를 거쳐 1485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이어서 판결사·부제학·도승지를 거쳐 1497(연산군 3)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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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 통정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강희수(姜希秀)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강희수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부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강희수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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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위거(渭擧), 호는 지우당(至愚堂).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5대손]이며, 아버지는 강여완(姜汝完)이다. 학문과 인품으로 이름을 날린 강세준(姜世儁)의 아버지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이 이미 성인의 모습과 같았다. 집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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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여중(汝中), 호는 매촌(梅村). 호조참의에 추증된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27)에 출생하여 1627년(인조 5)에 별세한 무인으로, 일찍이 무예를 익혀 같은 시대에 무인으로 활약한 정기룡(鄭起龍)·주몽룡(朱夢龍)과 함께 ‘3룡(三龍)’으로 불렸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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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술(彦述).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득윤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또한 청렴하고 근후하여 가훈(家訓) 3편을 지어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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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면 지역에서 살았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으로써 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예로써 하였다. 가정을 이루어 분가한 곳이 3리쯤에 있었는데도 부모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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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강우덕(姜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惠)의 딸 재령이씨이다. 1410년(태종 10) 태어나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1448년 지승정원사, 1452년(문종 2)에 도승지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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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정당문학 강회백(姜淮伯)의 아들이며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의 아버지이다. 1395년(태조 4) 태어나 태종 초에 음보(蔭補)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천추사(千秋使)가 중국에 가지고 간 무역품 가운데 공조에서 납품한 은이 가짜로 밝혀져 파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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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장(景章), 호는 수헌(守軒). 강우덕(姜友德)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교훈을 받아 호사함을 버리고 글 읽기에 열중하니 이미 대의를 통달했다. 강숙경은 어린 나이에 밀양부사가 되었으나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 위엄과 은혜로 보살피니 간악함과 교활함이 없어지고 한 고을이 평온하였다고 한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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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효자. 강안명(姜安命)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매양 이웃 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니 아내와 상의하여 힘껏 준비하여 이웃들을 모셔와 즐겁게 노시도록 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날로 어려워져갔으나 아버지에게 절대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그 슬퍼함이 자심하였고, 장사를 지내는데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지성으로 해드려 이웃사람들의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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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성재(誠齋).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강관(姜琯)이며, 어머니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이다. 1495년(연산군 1)에 출생하여 1532년(중종 27) 37세의 나이로 늦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541년부터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고, 1544년에는 지평으로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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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에 있는 군영 터. 진주는 통일신라 때 강주(康州)로 불리기 시작하여 수차례 변동을 거치면서 고려 초까지 강주로 불리었고, 이때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진을 두었다. 『진양지』 고적편에 “강주지(康州池) 위에 옛 군영의 터가 있으니, 세상에 전해 오기를 고려 때 절도사가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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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벼슬을 여러 번 옮겨서 한림원의 직한림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진주향교에서 글을 읽었는데 남달리 학문이 뛰어나 글을 잘 지으니 한강 이남의 학동 중에서는 제일이라 하였다. 1212년(강종 1) 봄에 과거에 응시하려 하였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관원에게 호소하여 방면해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관원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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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형지(詗之). 아버지는 승지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이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해에 정언으로 등용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장령이 되고 그 뒤 승진을 계속하여 1504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일어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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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한림(翰林: 예문관 검열) 강흘(姜仡)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도순성장(都巡城將)의 직책을 맡아 진주성을 지키던 황진(黃進)의 부장으로서 빛나는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올랐으며, 그 공으로 인해 자손들은 대대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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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 문신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1424년(세종 6) 태어나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부시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50년 예조좌랑에 이어 돈령부판관을 역임하였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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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신. 본관은 진주(晋州).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인 강회백(姜淮伯)[1357~1402]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아들인 강기원(姜起源)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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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우경(愚景)·경덕(景德), 호는 인재(仁齋).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형이다.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41년(세종 23)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으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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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운(景運), 호는 담졸(澹拙). 만호(萬戶)를 지낸 강태복(姜泰復)의 아들이며, 정내교(鄭來橋)의 외손자이다. 1710년(숙종 36)에 태어났으며, 1754년(영조 30)에 운과(雲科: 음양과)에 급제한 뒤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서울 삼청동에서 진경산수화가인 정선(鄭敾)과 이웃하여 지내면서 그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姜世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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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주백(周伯). 수헌 강숙경(姜叔卿)의 후손이다. 용력이 뛰어났다. 1728년(영조 4)에 무신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을 도와 적들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절충장군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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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사당. 진주하씨의 사우로서, 하즙(河楫)·하윤원(河允源)·하자종(河自宗)·하계종(河啓宗) 등 4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하즙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원정(元正)이라 하였다. 그 아들인 하윤원은 충혜왕 말년에 등제하여 경상, 서해의 안찰사를 지내고 원주와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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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청 이전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진주 시민들의 반대운동. 경상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하는 데에 따른 반대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부산에 있던 경상남도청을 진주로 이전하지 않고 창원으로 이전하는 데에 따른 반대운동이었다. 진주는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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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정자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700명을 이끌고 공을 세운 관란(觀灡) 허국주(許國柱)가 난이 끝난 후 청담리 염창나루 가에 이 건물을 짓고 은거하였다. 『속진양지』에 의하면, 허국주는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었다. 1812년(순조 12) 고장의 선비들이 임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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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행했던 남자들의 성인의식. 남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의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의식이 행해졌다. 관례는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와 더불어 4대 의례라 하는데, 이들 행사는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양반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 중 관례가 맨 첫 의례인데 이는 성년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삼국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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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성황신을 모신 신당. 관지리는 진양하씨(晋陽河氏)의 집성촌으로, 옷밭·섬말·관음정을 포괄한다. 관지리 서낭당은 북당·서당·남당·동당의 사방에 있었으나 동당이 없어지고, 일제강점기에 와서 서당과 남당이 없어져 현재는 북당만이 존재한다. 관지리마을 북쪽 숲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별도의 당집은 없다. 제례는 음력 12월 말 개소리나 닭소리가 없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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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진주지역의 청소년 보호를 위하여 조직했던 소년운동단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단체생활을 통한 단결심 배양과 국가정신 앙양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진주에는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일환으로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중 안동학교(安東學校)[일명 광림학교]가 진주를 대표하는 학교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발기인은 선교사 거열휴(巨烈休)와 신자 박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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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에 있었던 기독교계 사립학교. 1907년 4월 15일 기독교신자 자녀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거열휴, 박성애, 강주식, 안헌, 서윤보, 김경숙, 이영숙 등이 주축이 되어 진주군 성내면 4동[현 중앙동 중앙광장 부근]에 안동학교(安東學校)를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교과목은 성경, 국어, 지리, 역사, 산술, 한문, 습자, 체조, 창가, 영어였다.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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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광대로 효성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렸다. 어느 날 밤 호랑이가 군만의 아버지를 물고 달아났는데, 그는 하느님께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빌며 활과 화살을 갖추어 산속으로 따라갔다. 날이 밝아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그 호랑이는 이미 아버지를 다 뜯어 먹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고 있었다. 이에 군만은 “내 화살을 받아라”고 고함치며 살기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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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주에서 조직된 영남 사림들의 친목단체.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림파의 친목단체로 조직되었다. 지배층의 솔선수범과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1489년(성종 20), 진주목사 경임, 김해도호부사 이손(李蓀)[1439~1520], 창원도호부사 이영분(李永賁), 전 진주목 교수 김일손(金馹孫)[1464~1498], 조위(曺偉) 등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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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갖지 못하는 집안에서 잉태를 위해 신령한 힘을 가진 대상물에 치성을 드리던 풍속. 아이를 얻기 위하여 치성을 드리는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 시간, 장소, 기간, 그리고 치성의 대상과 방법이 매우 다양하였고, 잉태를 한 뒤에도 딸을 아들로 바꾸는 전녀위남(轉女爲男) 등 다양한 주술이 행해져 왔다. 진주지역의 경우, 치성을 드리는 사람은 아기를 갖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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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의 의병. 본관은 상산(商山). 고려 두문동 은사 단구재 김후의 후손이며 임진왜란 의병대장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의 둘째 아들이다. 1593년 진주성싸움에서 아버지 김준민이 전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힘을 기르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다시 왜적이 진주를 향해 진군할 것으로 예측하고, 발치(鉢峙)에다 토석성을 쌓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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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김개(金介)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안의(安義)의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다. 1826년(순조 26)에 증직을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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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상주. 자는 성인(成仁). 고려 때 직제학을 지낸 김후(金後)의 후손으로 군수 김녹돈(金祿敦)의 손자이다. 아들 김봉승(金鳳承)은 정유재란 때 진주 발재[鉢峴]에서 전사하였다. 출생년은 미상으로 산청의 단성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1583년(선조 16) 북평사 이제신(李濟臣)과 함께 군관으로 출정하여 북쪽 야인을 격퇴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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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다. 1573년(선조 6)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 받아 군기시주부가 되고, 그 뒤 용안현감과 강원도, 경상도의 도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의 자격으로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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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주 어느 절의 노비로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어버이에게 바치는 효성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힘을 다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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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새해 첫 보름날. 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각 지역에서는 대보름날에 축제의식이 열리고 있고, 어느 정도 그때의 풍속이 남아 있다. 한때 대보름날의 하이라이트인 달집짓기가 산림을 훼손한다고 하여 중단되었으나 지금은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부활되어 여러 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대보름날 풍속은 다양하다. 진주지역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대보름날에는 마을의 공동의식인 동제가 베풀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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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중안동 일대에 있던 연못.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지는 신라 혜공왕 2년(766)에 강주 관서(진주성)의 대사(大寺)라는 절이 있던 곳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연못의 크기는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이었는데 난데없이 잉어 5~6마리가 생겨나 점점 커지면서 연못도 따라 커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외곽에 있던 대사지는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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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에 있는 서원 터. 도동서원은 조선 초기 단종 때의 충절 신하였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김문기(金文起) 등 4위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그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이 서원도 훼철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단종을 위해 죽은 사화공신 중 1순위인 삼상(三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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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 호는 절강(折江). 함평 출신으로 1417년(태종 17)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세조 때 모친을 모시고 진주로 와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송이 높았다. 마침내 모친상을 당하여 상여가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물살이 세어 못 건너가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흐르는 물이 중단되어 강을 건너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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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기 소리」 중에서 모판에 모를 찌면서 부르는 민요. 「모심기 소리」는 장르로 살피면 서정민요에 속한다. 「모심기 소리」는 사건의 전개가 아닌 감정의 표출이 주를 이루며, 가창 방식은 대개 주고받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심기 소리」의 모두가 서정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모심기 소리」는 그때그때의 작업을 지시하고 독려하는 명령적 사설로 이루어진 노래도 많이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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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둥근 나무에 줄을 매어 목에 걸고 벌목을 나르며 부르는 민요. 「목도소리」와 같은 운반일 소리는 산간 지역인 경상남도 중북부 지방에서 많이 들을 수 있다. 이는 특별한 뜻이 없는 영탄어를 앞소리꾼과 뒷소리꾼이 반복하거나 지시적 요사를 빠른 템포로 부르는 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래는 「보리타작소리」와 같이 일의 진행을 지시하거나 상황을 표현하는 요사, 즉 지시적 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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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희경(熙卿), 호는 규헌(葵軒)이다. 1550년(명종 5)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뛰어났으며, 의지가 공명정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고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 공조참의에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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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문인석. 문인석은 묘 앞에 조성한 문신의 모습을 한 석상으로, 이 문인석이 있는 문산 갈천역 앞 안골 부근에는 조선시대의 분묘와 석물이 다수 위치하고 있어 다른 석물들과 함께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 155㎝, 너비 48.5㎝, 두께 31.5㎝의 규격이다. 머리에는 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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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익경(翼卿)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전쟁의 책임자인 병사(兵使)가 겁을 먹고 난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칼을 뽑아들고 병사를 위협하며 진군을 재촉했다. 뒤에 경상도에 어사로 왔던 박문수가 뒷이야기를 듣고 이를 나라에 보고하였으며 그로 인해 나라에서 금위영 별군관으로 불렀으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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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한글풀이에 해당하는 문자 유희요. 이 「문자풀이」 노래는 한글의 순서를 재미있게 외우기 위한 방법으로 생겨났다. 문자(한글) 풀이 노래는 아이들이 부르는 짧은 사설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의 노래와, 성인들이 부르는 사설이 잘 짜여진 노래로 나누어진다. 이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문자유희요는 평범한 구성보다는 파격적인 구성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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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여진(汝進)·득여(得汝). 선무랑(宣務郞) 문홍규(文弘逵)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심연 감사가 그를 불러 임시 경상우병사로 임명하였으며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나라에서 그의 공훈을 치하하고 두 번이나 선전관 자리를 주었으나 끝내 취임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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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는 사당. 진주정씨의 사우로서, 정예(鄭藝)·정시양(鄭時陽)·정유(鄭裕)·정수균(鄭守均)·정홍차(鄭洪且)·정안사(鄭安社)·정수(鄭需)·정을보(鄭乙輔)·정이오(鄭以吾)·정황(鄭璜)·정분(鄭苯) 등 11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들 11위 중 진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이오, 정분 부자로, 정이오[1354~1434]는 고려 공민왕대에 나서 세종대까지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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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의 의병.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자신(子愼), 호는 성광(醒狂)이다. 1579년(선조 12)진사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하동의 섬진강 쪽으로 출진했다가 이듬해인 1598년 진중에서 순직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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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힘쓰는 애국운동. 진주사람들은 “진주에는 진주정신(晋州精神)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시민(金時敏) 장군과 진주지역의 주민들이 보여준 애국 및 외세저항의 진주성전투, 1862년(철종 13)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해 저항하였던 농민운동,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진주동학군의 치열한 전투, 일제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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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원량(元亮)이다. 충효청렴하였고, 타고난 힘이 빼어나 무술에 능하여 수문장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에 입성하여 힘껏 싸웠으나 1593년 진중에서 전사했다. 선무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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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진주목의 판관으로 있으면서 1593년 진주성전투로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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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박창윤(朴昌潤)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하달영(河達永)의 딸이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의하면, 1677년(숙종 3) 출생하여 1736년(영조 12)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706년(숙종 32) 사마시에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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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치암 박충좌(朴忠佐)의 후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합포성(지금의 마산)까지 진격해 적과 싸웠다. 진주지역에서 활약하던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이 모함을 당하여 구속되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게 글을 올려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밝혔다. 이후 의병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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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咸陽). 치암 박충좌(朴忠佐) 장군의 후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 박흥주(朴興宙)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합포성(지금의 마산)까지 진격해 적과 싸우다가 형과 함께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박흥주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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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민요. 이 노래의 문형은 일종의 채취노동요였을 것이다. 본래의 기능적인 측면이 매우 약화된 상태로 오늘날 전승되고 있다. 1992년 진주시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통』에 실려 있다. 4·4조 단형 구성이다. 밀양 삼당 영남 숲에 밤꽃따는 저 큰악아 너의 집이 어디건데 해 다 진 뒤 밤꽃따노 처녀(큰아기)가 해질녘을 지나 밤꽃을 따는 행위는 남정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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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최초의 서양식 민간병원. 배돈병원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지역의 환자를 중심으로 기독교 전도 사업을 하기위해 1913년 11월 4일에 세워졌다. 배돈병원의 건립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에 들어왔던 구한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1910년 호주의 건축가 켐프가 병원설계도를 작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당시의 공사업자는 일본인 토목기술자였으며 호주선교회가 세웠던 당시 옥봉리교회 옆에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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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기 소리 중 해가 질 때 부르는 노래. 모심기 소리는 일을 시작하는 아침나절에는 길고 여유있게 부르지만 점심 때나 저녁 무렵 등 일을 마치기 전에는 짧고 빠르게 부른다. 모심기 소리의 가사 속에는 흔히 실무적인 내용과 함께 성애, 식욕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초생인가 그믐인가 베개모에 달이떳네 달뜨고 별난밤에 놀고간들 관계할까 「베게모에 달이 떴네」와 같은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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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역에 전승하는 노동요 중 길쌈요에 속하는 베를 짤 때 부르는 노래. 베짜기는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하는 노동이므로, 지루함과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길게 계속되는 노래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베짜는 소리의 사설은 길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길게 이어지는 베짜는 소리의 사설을 성격에 따라 나누면 둘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베틀과 베틀의 구성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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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초계(草溪).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병조판서에 추증된 변연수(卞延壽)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으며,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어서 당포해전(唐浦海戰)에도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아버지 변연수와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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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오원(吾元). 변남룡(卞南龍)의 5대손이다. 1538년(중종 33) 출생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할 때까지 대의를 위하여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변훈남(邊勳男)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한 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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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노래. 병잡는노래는 의식요 중에서 벽사의식요에 해당하고 구체적으로는 축질요를 말한다. 벽사의식요는 재앙과 우환을 물리치거나 또는 그러한 것의 범접을 미리 막고자 하는 의도로 부르는 민요이다. 그러므로 벽사의식요는 의식요 가운데도 주술성이 가장 강하다. 그 중에서 축질요의 ‘살내리는소리’는 혼사나 장사를 치루는 집에 갔던 사람이 이유 없이 몸이 굳어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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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지역에 있었던 대표적인 근대식 사립 초등교육기관.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을 위한 사업에 힘을 기울인 학교로, 현 진주시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이다. 겉으로는 실용적인 교육을 강조하였으나 민족교육(民族敎育)을 위한 성격이 컸다. 1909년 순종(純宗)이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칙령을 내리자 진주지역의 민족교육과 구국의 뜻을 함께한 김기수, 강재순 등이 모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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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 섬마을에서 전승되는 모심기 소리. 부모꽃(父母꽃)은 주제면에서 부모노래라고 하는 노래의 일종이다. 부모노래라고 부를 수 있는 일군의 노래들은 처음에는 모심기 소리에 포함된 각편이었다가 이후 농사일에서 벗어나거나 민요의 현장이 점차 사라지면서 일상에서 개인의 심정을 표현하는 유희요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노래의 사설에서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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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과 평안동 뒷편에 있는 산. 『국역 진양지』에는 ‘집현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주(州)의 진산(鎭山)이 되고, 남으로는 망진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죽동이 있으며 또 대룡사와 소롱사가 있다. 모두 비봉으로 인한 것이요, 이러한 이름으로 한 것은 진압(鎭壓)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의 이름은 대봉산(大鳳山)이었다. 예로부터 진주강씨 집안에는 뛰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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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상촌마을에서 불리어 지는 중년 노래. 중년 노래는 개화기 이후의 유행가나 잡가가 퍼진 민요로 ‘중년 소리’라 하여 옛날부터 있어온 기능 중심의 ‘옛날 노래’와 구분된다.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8-4의 채록 자료는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오방리 상촌마을에서 1980년 8월 4일에 류종목, 빈재황에 의해 채록되었다. 제보자인 조상딸은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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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마을에서 전승되는 베틀짜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베짜기는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하는 노동이므로 지루함과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길게 계속되는 노래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베짜는 소리’의 사설은 길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길게 이어지는 ‘베짜는 소리’의 사설을 성격에 따라 나누면 둘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베틀과 베틀의 구성에 대해 하나하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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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북마성리 매껄마을에서 전승되는 사위에게 술을 권하는 노래. 권주가(勸酒歌)는 제재면에서 가족관계요에 속한다. 가족관계요는 말 그대로 가족 관계를 주 제재로 한 노래, 예컨대 ‘달거리’, ‘사친가’, ‘사모곡’, ‘시집살이 노래’, ‘권주가’, ‘환갑노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권주가는 술을 권하는 상대를 찬양·고무하여 술자리를 즐겁게 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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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북마성리 매껄마을에서 전승되는 사위에게 술을 권하면서 딸을 부탁하는 권주가. 권주가(勸酒歌)는 제재면에서 가족관계요에 속한다. 가족관계요는 말 그대로 가족 관계를 주 제재로 한 노래, 예컨대 ‘달거리’, ‘사친가’, ‘사모곡’, ‘시집살이 노래’, ‘권주가’, ‘환갑노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권주가’는 술을 권하는 상대를 찬양·고무하여 술자리를 즐겁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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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삼을 삼으면서 부르는 노래. 삼베일은 전국적으로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고성, 진주,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합천 등지는 지금도 삼베 일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만큼 부녀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삼베일 소리를 전승시켜 오늘날도 불리어지고 있다. 거창 지역에서는 삼베일 소리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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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비. 1971년 7월 1일 3·1운동 5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이 있은 후,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이에 진주에서는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의 시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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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 이 고분군 일대에는 현재 진주강씨 집안에서 만든 일명 ‘봉의 알자리[봉란대(鳳卵臺)]’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에는 상당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학계에 의하여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밝혀졌다. 고분의 규모는 제법 크며, 고분의 위를 평평하게 다듬어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姜以式)의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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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승려이자 효자. 호는 거사(居士). 진주 출신으로 일리현(一利縣)[지금의 성주군] 법정사(法定寺)에서 수도하였다. 성주 법정사에서 수도 중 고향의 어머니가 병환이 위중함을 알고는 번민을 하자 큰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가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라고 허락하였다. 성각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지성으로 보살피고, 고기가 떨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끓여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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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추지(樞之).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로,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았다. 서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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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화백(和伯), 호는 죽와(竹窩). 인조 때의 학자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워 가난한 형편에도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가게 되자 걸어서 서울까지 가 혈서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 그 지성스러운 효성에 감동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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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화례(化禮), 호는 운암(雲菴)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자라면서 큰 뜻을 세우고 시를 지어 그의 회포를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로 진군하던 중 왜군을 만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조정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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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학봉 김성일의 명으로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을 지켰다.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주부(主簿)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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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도(中道). 정가(正嘉) 송서(宋瑞)의 후손이다. 기품이 탁월하여 언어와 행동이 법도에 벗어남이 없었고, 어버이 섬기는 그 효성이 실로 지극하였다. 임진왜란 때 송건도는 어버이의 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라의 위급함을 깨닫고는 상복을 벗어 제치고 “우리 집안이 대대로 절의를 지켜왔었는데 우리나라가 오늘같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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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에 전해오는 임진왜란에 관한 설화. 임진왜란 때 진주시 금곡면 송곡마을에 왜병이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밝힌 전쟁담(戰爭談) 이다. 1980년 8월 10일 정상박, 성재옥, 김현수가 경상남도 진양군 금곡면 검암리 운문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하해조[남, 67세]이다. 『진양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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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때의 기독교계 여학교. 1905년 서양인으로는 진주에 처음으로 정착한 호주 선교사 커넬(Dr. Hugh Currell) 부부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교 설립에 노력해오던 중 1907년 9월 3일 당시 진주군 대안면 2동에 있던 예수교예배당(현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개교하였다. 1907년 9월 3일 진주군 대안면 2동 예배당에 사립정숙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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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지방에 전해오는 결혼한 여자의 애달픈 삶을 노래한 민요. 남존여비의 유교적·봉건적 도덕률 속에서 각종 사회적 구속에 얽매여 시집살이를 하던 부녀자들의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그들의 슬픔과 고난을 감동적으로 노래한 것이 많아 부요(婦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진주에는 8개의 시집살이 노래가 전래, 기록되어 있다. 「시집살이노래」의 특징은 그 문체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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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진주지역 산하 조직.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의 적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었으므로, 두 진영이 협력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1926년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되어 민족유일당운동으로서 조직되었는데, 1927년 1월 19일 발기인대회에서 발표한 강령과 창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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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유흥요. 이 노래는 부녀자들이 심심하거나 유흥의 분위기가 있을 때 부르는 노래로서 일명 ‘쌍금 쌍금 쌍가락지’라고도 한다. 노래를 부르는 시간과 장소가 특정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개 여흥을 즐기는 때에 이 노래를 부른다. 정확하게 언제 이 노래가 발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세월 동안 부녀자들의 입을 통하여 구비 전승하였으며, 진주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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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신. 본관은 순흥(順興). 일사재(一思齋) 안창렴(安昌廉)의 증손이며, 안흥종(安興琮)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벼슬이 낮은 직급의 봉사(奉事)였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우고 이듬해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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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순흥(順興). 일사재(一思斎) 안창렴(安昌廉)의 손자이다. 어릴 때부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기상이 있었으며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은 참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사 이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으며 1593년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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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의 효자.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성심껏 섬겼으며, 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3년간의 시묘살이를 정성껏 했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로상 위에 얹어 놓은 모래그릇을 물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여효제는 자신의 효성이 까마귀보다도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크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일 후면 그 모래그릇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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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연계안(蓮桂案) 보관소. 연계재는 연계안을 보관하는 서재를 말한다. ‘연계’는 연방(蓮榜)과 계적(桂籍 : 문과 합격)의 첫 글자를 모아 지은 명칭으로, 연(蓮)은 사마시에 오른 사람을, 계(桂)는 문과에 오른 사람을 지칭한다. 1736년(영조 12) 사마소(司馬所)를 설립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보존하였다. 1841년(헌종 7) 문과 합격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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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 자는 재일(栽一). 『진양속지(晋陽續誌)』에 의하면,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진사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에서 왜적과 싸우다 불화살[火箭]에 맞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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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의령. 진주 출신으로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 병구완을 했다. 어느 날 의령까지 가서 약을 구해 진주로 돌아오는데 밤이 되고 비가 와서 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이때 마침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호위하여 인도하였으며, 스님이 나타나 사연을 듣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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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전승되는 우곡 정온의 충절을 담은 인물담. 1980년 8월 12일 정상박, 성재옥이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서문경로당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정문석(남, 당시 63세)이다. 이 내용은 『진양군사』, 『진주시사』 등에도 소개되어 있다. 우곡(隅谷) 정온(鄭溫)은 고려 조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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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옥(仲玉). 아버지는 효력부위 유수창(兪壽昌)이다. 1492년(성종 23)에 태어났으며 졸년은 모른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중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진사에 급제한 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뜻을 깊이 두어 후학들을 일깨우는 것으로 자기의 소임을 삼았다. 그와 함께 사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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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기계(杞溪). 진사 유백온(兪伯溫)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계사년(1593년) 진주성이 떨어질 때 장렬히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주부(主簿)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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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 부장(部將)으로 공을 세운 유홍(柳洪)의 딸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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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파평(坡平). 윤사복(尹思復)은 첨정 벼슬에 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 입성하였다가 계사년(1593년) 진주성 함락 때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현재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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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조선 전기의 선비 윤여훈의 처이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의 진주성전투 때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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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논개에 관한 유흥요. 이 노래는 본래 진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세월이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전승되고 있다. 전파 범위가 확장된 만큼 노랫말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진주 기생 의암이가···’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가장 원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노래의 정확한 발생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랫말에 ‘진주 기생 의암’이라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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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효자 이경훈(李敬訓)의 아내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남편과 함께 산골 깊이 피난하다 산골을 마구 뒤지던 왜적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살해되고 자색이 아름다운 부인은 그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데 달탄(達灘)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눈을 피해 강물에 몸을 날려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숙종 때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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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우춘, 아우 이성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우춘·이성춘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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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의금부도사인 이번(李蕃)의 아내이다. 진주 운곡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부딪혀 싸우다 죽음으로써 그 고귀한 절개를 지켰다. 숙종 때 이르러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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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남계(南溪) 이번(李蕃)의 아우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우고 화왕산성(火旺山城) 수호에 최선을 다했다. 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휘하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번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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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이우춘(李遇春)과 이득춘(李得春)이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이우춘 및 이득춘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전공을 세워 판관(判官)의 벼슬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이장(李檣)도 이성춘을 따라 여러 번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 공신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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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동성(東城)이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힘껏 싸워 공을 세웠다. 후에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군공으로 선무원종 3등 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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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이득춘(李得春)과 이성춘(李成春)의 형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이득춘과 이성춘, 조카 이장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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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이유해의 아내이다. 진주 종화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하여 집현산으로 숨었는데 뜻하지 않게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왜적은 하씨를 억지로 자기의 말 위로 끌어 올렸다. 잠자코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물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강의 절반쯤에 이르렀을 때 업고 있던 아기와 함께 몸을 날려 강물에 빠져 죽었다. 하씨는 뛰어난 미인이었던 터라 왜적은 그 죽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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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안(咸安). 매헌 이인형(李仁亨)의 현손이며, 판관 이성춘(李成春)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성춘과 중부·백부인 이득춘·이우춘을 따라 의병으로 참여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우춘 등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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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부, 열녀.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자부이며, 이핵(李翮)의 처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딸이다. 14세 때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여 중병을 낫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 섬김에 있어서 지성이었으며, 남편이 죽자 뒤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진주 가좌촌(嘉佐村)에다 효열부 정문을 세웠다. 현재 경상남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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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용선(庸善), 호는 사가(四可).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매우 돈독하여 어버이의 뜻을 어기는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몇 달을 병석에서 신음하자 하늘에 오래 사시기를 빌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으로 마시게 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재산을 기울여 명당을 구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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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동성(東城)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 3등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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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민족사학재단에 의해 설립된 진주 지역의 여자중등교육기관. 1919년 3·1운동 이후 진주군 지수면의 재력가 허준(許駿)이 교육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고 생각하여 진주지역에 남자 중등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유지들의 뜻을 모아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晋州一新高等普通學校)의 인가를 받았다.(현재 진주고등학교 자리, 상봉동 987번지) 그러나 일제가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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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민족사학 교육재단. 3·1운동 이후 민족자각(民族自覺)의 기운이 일어날 무렵, 경상남도의 유지들은 조국의 독립이 오직 인재양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민족재단을 세워 교육사업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독립과 인재양성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1919년 11월 진주군 지수면의 부농 허준(許駿)이 5백석짜리(당시 7만원 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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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강탈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교통·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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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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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수문장을 지냈으며, 이듬해 계사년에 진주성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다. 1743년(영조 19)에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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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장용상(張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장지연은 일찍이 장석봉(張錫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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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서 개최되는 전국 규모의 소싸움대회.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소싸움대회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로, 역사를 대개 100년쯤으로 본다. 물론 진주 소싸움의 역사는 까마득하지만 체계적인 규칙과 시상품을 걸어 놓고 대회를 열게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정기적인 대회가 아니라 한가위를 전후해 열린 행사였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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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전준창(全准昌)의 조카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일으킨 무신란에 숙부인 전준창, 아우 전덕징(全德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거창에서 반도들과 싸워 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전준창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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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군거(君擧)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반도들과 거창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무원종공신에 올랐고 함께 싸운 아들 전성징(全聖澄)과 조카 전덕징(全德澄)에게도 각각 벼슬이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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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일(君一). 군수 정만생(鄭晩生)의 아들이다. 정계남(鄭癸男)은 일찍이 무과에 올라 벼슬은 사과(司果)에 올랐다. 인조반정(1623)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이괄의 난에서 무훈을 떨쳤다. 인조반정 때의 공으로 정사공신이 되었으며 이괄의 난 때 세운 무공으로 다시 진무공신이 되고 은결(恩結)을 지급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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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녀·열부. 비록 천한 출신이었으나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의 난리 속에서도 늙은 어머니의 병을 지성으로 돌보았고, 세상을 떠나자 오래도록 어머니를 사모해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언니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언니가 역질에 걸려 걷지 못하므로 그를 업고 30리길을 달려서 마침내 낫게 하였다. 또한 남편에게도 착실하여 모두 칭송하였다.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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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석초(錫初)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그의 손자 정열(鄭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가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다. 정열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쏜살같이 떨치며 돌전(突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광윤은 판관(判官)을 증직(贈職), 부장(部將)을 추증받았으며 선무원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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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곤양.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진주정씨에서 분적한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중시조이다. 좌찬성에 추증된 정호(鄭浩)의 아들이다. 초명은 무수(茂壽)이나 1586년(선조 19) 무과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62년(명종 17) 출생하여 1622년(광해군 14) 60세로 별세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1590년 경상우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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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시민(金時敏) 목사의 휘하에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러웠으며,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끝까지 왜군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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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자는 여신(汝信). 효자 정경량(鄭慶良)의 손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다.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으며, 선무원종 2등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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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학여(鶴如). 군일 정계남(鄭癸男)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선전관으로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의 동문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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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수백(壽伯).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증손이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날렸으나 문과에는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병환 때에는 귀한 물고기와 산삼을 구해 병을 고쳐 드렸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으로만 3년을 연명하며 예를 다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경상감사에게 알려 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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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할아버지인 정광윤(鄭光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항전하였다. 정광윤이 1593년(선조 26) 진주성이 함락될 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 그 뒤를 이어 적진으로 돌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결국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인정되어 부장(部將)을 추증 받았고, 선무원종2등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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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효자. 선산군수를 지낸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아버지의 임지인 하동에서 동생과 함께 변경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때마침 왜구가 갑자기 침입하자 동생 정손(鄭愻)과 함께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호위하여 모시고 피란 갈 때 왜구들이 뒤쫓아 와 해치려 하자, 말을 달려 공격을 하며 사력을 다해 물리쳤다. 그러나 동생 정손은 적의 칼에 찔려 젊은 나이에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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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무신.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의하면,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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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호는 면재(勉齋). 평장사를 지낸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국자시에 합격하여 1345년(충목왕 1) 정당문학이 된 후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 당시의 권세가 조일신(趙日新) 세력의 배경으로 찬성사가 되었으나 곧 조일신이 주살되자 그 일파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군수로 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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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용인(勇仁)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용(司勇)에 올랐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서궁(西宮) 유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임금 앞에서 폐서인을 지지하는 회의가 있었다. 정호신은 태연히 그 회의의 참석을 기피하였는데 부도덕한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던 충의가 인정되어 정청불참자록(廷請不參者錄)에 이름이 실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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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판결사 정유성(鄭惟誠)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선무원종공신이 되었고 주부에 제수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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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함안. 자는 준여(竣汝).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5세손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후 금군위(禁軍衛)와 고성 참군(參軍)을 거쳐 방위장(防衛將)이 되었다. 방위장(防衛將)으로 있을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터지자 죽음으로써 보국하기를 맹세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진주 반성(班城)에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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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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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신안(新安). 무열공(武烈公) 주몽용(朱夢龍)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터지자 크게 공을 세워 진무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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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군성(君聖).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들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상을 당해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들에 불이 나서 온 골짜기가 다 타고 묘소와 여막까지 불에 탈 위기에 처했으나 돌연 바람이 둘러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고종 때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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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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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낙이(樂而). 아버지는 진사 진복명(陳福命), 어머니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의 딸이다. 또 문인으로 이름을 떨친 진우(陳宇)가 그의 형이다. 1519년(중종 14) 출생하여 1568년(선조 1) 49세로 별세하였다.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검열·대교·정언·이조정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형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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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전기 때의 장군 강민첨의 탄생유적지.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자 강감찬(姜邯贊) 장군을 도와 부원수로서 귀주전투에서 적을 격파, 전승을 거둔 바 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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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비각. 조선 말 가선대부 김상현(金尙鉉)의 정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와 그의 아들 전 의관(議官) 김정식(金正植)은 질병 등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던 주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뒤에 주민들이 “마을이 재난을 입었을 때 참다운 정성과 물자를 풀어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모자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2기를 각각 1901년과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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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78번지에 있는 자웅을 상징하는 1쌍의 암석. 이 자웅석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 변에 누워 있던 것을 1970년 음력 3월 3일 옮겨 세우고 1973년 명석각(鳴石閣)을 준공하고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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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효자인 모순(牟恂)의 정려비. 모순은 진주모씨로 호는 절강이다. 조선 1417년(태종 17)의 식년친시(式年親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사간을 지냈다. 세조 때 진주로 와 살았다. 일찍이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하여 상여가 강을 건너지 못하자 하늘에 통곡하니 흐르는 물이 중단되었다. 마침내 강을 건너 장례를 치렀고, 이 때문에 호를 절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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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평동의 삼현여자고등학교 내에 있는 불상. 머리 부분이 떨어진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으며, 머리가 몸에 비해 너무 큰 편으로 괴체감(塊體感)이 든다. 두부의 길이는 58㎝ 정도이며 왼쪽 머리 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다. 정수리 부분에 솟아 오른 육계는 낮고 작으며 아래로 이어지는 머리는 얼굴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얼굴은 타원형에 가까운 장방형으로 이마는 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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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제말(諸沫)·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념하는 사적비. 제말[?~1592]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정암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대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제홍록[1558~1597]은 제말의 조카로서, 1581년 무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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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있는 서당.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선조 시기에 이조참판·대사성을 지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모시기 위하여 1920년 지방 선비들이 건립하였다. 김우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서 학문을 배워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20권의 문집과 『속강목(續綱目)』36권을 지었다. 『속강목』은 동양사(東洋史)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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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전통정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자결한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18세손 박헌경(朴憲慶)이 일제강점기 때인 1922년 해마다 거듭되는 재해로 굶주림이 심하자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현재의 취로사업 형식을 취해 토지와 현금을 주어 이 정원을 조성케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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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서재. 우곡정은 고려 말의 문신 우곡 정온(鄭溫)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정온은 진주정씨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조선 태조 2년(1393) 이곳 진주에 서재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우곡정이라 하였다. 정온은 앞뜰에 못을 파고 백일홍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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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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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7[용암길 59-2]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본래 귀곡동에 있었는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정문부는 호가 농포(農圃)로,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길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그 전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다. 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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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의 진주걸인·기생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는 역사문화 이벤트. 3·1운동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신분인 걸인과 기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겁내지 않고 만세를 불렀던 고귀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진주문화사랑모임에 의해 1996년 2월 29일 처음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 행사는 1996년 77년 만에 재현하여 숭고한 3·1운동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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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공립학교로서 현 진주고등학교의 전신. 1919년 경상남도 진주의 유지들이 모여 설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925년 4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51년 진주북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로 분리·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교육열이 높아가던 1919년 11월 지역의 유지들이 남자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1920년 사립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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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실업학교. 일제강점기에 경상남도 진주시에 처음으로 설립된 실업학교로, 1910년 개교한 이래 1993년 진주산업대학교로 승격·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9년 처음으로 실업교육에 대한 조서(詔書)가 발표된 뒤 1907년 실업학교령이 발표되자 관찰부 주관으로 설립되었다. 1910년 4월 30일 개교한 이래, 1911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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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최초의 일본인 학교 1908년 1월 29일 현 마래제백화점 자리에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통감부의 보조를 받아 진주의 일본인 학교로 개교하였다. 1908년 1월 29일 진주공립심상소학교(晋州公立尋常小學校)로 개교하였다. 1909년 4월 1일 교명을 진주심상고등소학교로 바꾸고, 심상과는 6년제로 6학급이 있었으며 고등과는 2년제로 2학급이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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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었던 여자야학회. 경상남도 진주지역 부녀자들의 교육과 문맹퇴치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1936년 4월 15일, 통도사 진주포교당 포교사 박만선(朴萬善)에 의하여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야학회(교)가 설립되었다. 위치는 옥봉정으로서 현재 진주시 상봉동이다. 진주불교여자야학회(교)는 1932년 자명유치원(慈明幼稚園)으로 개원하였다가,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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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와 삼천포시(현재 경상남도 사천시로 개편되었음)를 중심으로 전래되고 있는 농악. 진주삼천포농악의 유래는 농사안택축원설(農事安宅祝願說)·군악설(軍樂說)·불교관계설(佛敎關係說) 등이 있으나 농악의 목적에 따라서 당굿과 같은 마을굿·지신밟기·걸립굿·두레굿·판굿 등으로 분리 발전한 것으로 본다. 진주삼천포농악은 12차의 판굿으로서 걸립굿과 두레굿 등의 가락을 12종 36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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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누각. 현판에는 진남루(鎭南樓)로 되어 있으나,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장대로 불린다. 또한 내성의 북쪽 끝에서 내성과 외성에 주둔한 병사 모두를 지휘할 수 있어 공북루(拱北樓)라는 별칭이 생겼다. 1584년(선조 17) 목사로 부임한 신점(申點)이 처음으로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7번지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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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의 서쪽에 위치한 누각. 진주성(晋州成) 서문(西門)의 지휘장대이다.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214-4번지에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건물은 허물어지고 1934년 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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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진주성(晋州城)은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하며, 촉석성(矗石城) 혹은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내성과 그 주변 지역 176,804㎡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촉석루(矗石樓)는 남강 가 돌벼랑 위에 세워진 우뚝한 누각으로, 남강 가 뾰족뾰족한 돌의 모양을 따서‘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주성의 남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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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진주여고 내에 있는 석불좌상. 석불좌상은 두부, 오른쪽 다리, 대좌 부분이 결실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한 상태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그 아래 가슴은 풍만하나 탄력감이 없다. 둥근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통견이며 사선방향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선이 굵고 투박하다. 등에도 역시 사선방향의 옷주름을 표현하였으나 양감 없이 굵은 선만을 물결 문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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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에 설립되어 여성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 기예는 사전적 의미로 ‘미술·공예 따위에 관한 기술’이다. 이러한 관련 교과목을 토대로 부녀자를 비롯한 젊은 여성과 여아의 교육을 담당하던 기예학원이다. 여성들의 기예교육, 직업교육, 취업안내 및 현모양처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여성들에게 사회 진출의 기회와 참여를 높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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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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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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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와 성씨들이 대성을 이루어 모여 사는 마을. 진주는 신라시대 구주의 하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항상 영남의 계수관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토성세력도 강성하였다. 진주의 성씨는 정(鄭), 하(河), 강(姜), 류(柳), 소(蘇), 임(任), 강(康), 김(金), 박(朴)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진주목(晉州牧) 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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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의열단(義烈團) 최초로 국내에서 폭탄의거를 계획했다가 발각된 사건. 1919년 중국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일본인 고관 및 한국인 민족반역자 처단과 식민통치의 주요기관 및 시설물 폭파를 목표로 삼았다. 즉 의열투쟁의 목적은 일반 대중의 각성과 아울러 대대적인 반일봉기를 촉발시킴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종식과 친일배를 응징함에 있었다. 맹목적인 테레리즘이 아니라 식민지 약소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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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월아산 해돋이, 진양호 노을 등 여덟 곳의 비경. 진주는 예로부터 산과 들과 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고을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형승조(形勝條)」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파한집(破閑潗)』의 내용을 인용하여 “진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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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문신,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一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화순] 출신. 고려 명신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최천부(崔天符)의 아들이다. 1532년(중종 27)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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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관인 발견 유래담. 1992년 진주시에서 편찬한 『내 고장의 전통』에 기록되어 있다. 1747년(영조 23) 남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가 철인 하나를 건졌는데, 앞면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慶尙右道 兵馬節度使印)’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만력십삼년월일조(萬曆十三年月日造)’라 새겨져 있었다. 당시 병사 최진한(崔鎭漢)은 이 사실을 조정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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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었던 사우.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김시민의 신위는 창렬사(彰烈祠)주벽에 옮겨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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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 망진산(望晋山)에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군. 진주시 망경동 망진산의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다. 주약동으로부터 칠암동에 걸쳐 상당수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지수골의 최영세 소유 대밭 속에 연대가 확실치 않은 분묘가 확인된다. 높이 40m, 직경 5m 정도의 이 분묘는 가시덤불과 잡초로 뒤덮혀 있는데, 그 형태와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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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진주 망진산 북동쪽에 있는 칠암동 김모씨의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서 채집된 유물은 없다.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고인돌 1기가 보고되어 있다. 현재 칠암동의 도시개발로 인하여 유적을 확인할 수 없다. 주변에 칠암동고분군이 있어 고분군을 조사할 경우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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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출생하여 조선 건국 후인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상호군을 지냈다.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첨지총제로서 함경도 경원과 경성의 군사 요새지를 수비했으며, 세종 때에도 경기도 및 경상도의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1433년(세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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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공곽(公廓). 호는 매헌(梅軒).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상주에 갔다가 도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아버지를 베려 하자 하경휘는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칼을 막았으나 무도한 왜적은 부자를 모두 무참히 살해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하경휘의 효행을 기려 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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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하계선(河継先)은 어린 선비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계사년 진주성 함성 때 장렬하게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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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희가(希可). 호는 신당(新塘).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 생전에 봉양을 잘 하였으며,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예에 따라 행하였다. 그의 4형제가 한집에 살았으나 전혀 다툼이 없이 화목하게 살아 고을 사람들이 ‘효우군자(孝友君子)’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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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은 진주.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강응태(姜應台)의 손녀이며, 사직(司直)을 지낸 강렬(姜冽)의 딸이다. 남편은 하국보(河國寶)이다. 평소에 부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에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뒤에 조정에서 절부의 정문(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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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삼(汝三). 조선 전기의 문신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남원양씨 부인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 그의 나이 14세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영약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디딜방아 공이를 다듬어 읍내 장에 가서 팔려고 가다가 수곡의 조계마을 앞 길 위에서 쓰러져버렸다. 이튿날 햇살에 놀라 황급히 일어나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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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몽징(夢徵), 호는 불우당(不憂堂)이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두드려졌으며 말달리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선전관으로 있으면서 난의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무신란 때 세운 공으로 벼슬이 부호군(副護軍)에 오르고 2등 공신에 올랐다. 은궁(銀弓)과 옥시(玉矢)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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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潾)이다.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한 후 1367년 감찰규정이 되어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좌천되었고,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여 양주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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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하억(河檍)이며 어머니는 풍천노씨(豊川盧氏)로 통덕랑(通德郞)노약(盧爚)의 딸이다. 부인은 현풍곽씨 곽약의 딸과 경주김씨 김필백의 딸이다. 1647년(인조 25)에 출생하여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7세 때 진양하씨의 집성촌인 진주 수곡 사곡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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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하경복(河敬復)의 손자. 성종 때 사람으로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성품이 청간(淸簡)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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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이어 집의, 동부대언,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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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河演)의 묘. 하연의 본관은 진주,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65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판서·대사헌·대제학·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49년(세종 31) 영의정에 올랐다. 문종이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453년(단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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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과거에 급제한 후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에 있으면서 임의로 정원 외의 연호군(煙戶軍)과 별민군(別民軍)을 두었다하여 파면 당하였다. 이때 후임으로 온 원수 유영(柳瑩)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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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원룡(元龍). 호는 영무성재(寧無成齋). 1540년(중종 35)에 태어나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효심이 깊고 우애가 남달리 뛰어나 3형제가 한 집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항상 웃으며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한 후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이 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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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응백(應伯), 호는 어은(漁隱)·초은(樵隱). 하맹산(河孟山)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영특하였으며 지조가 높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소학』의 「내칙(內則)」에 뜻을 두어 힘써 익히다가 닭이 울면 어버이 침소를 돌아보고 보살펴 드렸다. 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여막에서 지새니,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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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경가(敬可). 쌍강(雙岡) 하홍운(河洪運)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공부하였으나 가난이 심하여 봉양할 수가 없음을 알고 가산을 잘 다스려서 집안을 일으켰다. 형이 병에 걸려 여러 해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나 부인을 잃었을 때도 한 번도 수심스럽거나 괴로운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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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망추(望秋)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강득용, 신남과 더불어 군대를 훈련시키고 위풍을 떨치니 군율이 엄정하였다. 허물어진 진주성을 수축하고 못을 다시 깊이 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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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보(大甫). 호는 조산처사(螬山處士).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년여 동안 서울에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의 열녀 정문을 내리게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어머니는 열녀요 아들은 효자라.”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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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시호는 강장(剛莊).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하승해(河承海)이고,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정씨(鄭氏)이다. 부인은 순흥안씨 순흥군의 딸과 함양박씨 박한의 딸이다. 1434년 회령진(會寧鎭) 절제사에 제수되었고, 동년 12월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전임되었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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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호원(浩源), 호는 각재(覺齋). 1538년(중종 33)에 태어나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한 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질한 후 어머니 침실로 찾아들어 문안을 드리니, 여러 문인들이 말하기를, 『소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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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성경(成卿).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어버이에게 드릴 고기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스스로 방에 날아들어 그것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배를 원했으나 끝내 구해 드리지 못하자 이것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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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진사 하협(河悏)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깨우쳤고, 성품과 행실이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몸을 다하여 공경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의 시묘를 정성을 다하여 예로써 마쳤다. 후일 마을 사람들이 그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하효자 시묘골’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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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하광국(河光國)이며,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1593년(선조 26)에 출생하여 1666년(현종 7) 73세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정성껏 치렀으며, 옛 성현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스스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촌부(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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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의 한국전쟁 기간 중 진주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한국전쟁은 민족의 비극으로서 우리 사회에 큰 피해와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 수행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대한 쟁점이 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 주체를 둘러싼 논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전통주의설과 수정주의설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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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 자는 천뢰(天賚), 호는 유계(柳溪).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중이었으므로 이를 통분히 여겨 “늙은 신하는 임금의 욕됨에 놀라 적개심에 불타는 마음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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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우경(佑卿)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무신란을 일으키자 난을 진압하고 위세를 떨쳤다. 뒤에 양무공신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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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호는 관란(觀瀾).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모집하여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염창강 언덕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술로써 여생을 보냈다. 1812년(순조 12) 고장의 선비들이 조정에 임진왜란 때 허국주의 공을 알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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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군무(君茂).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16세 때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써 3년을 더 연명시켰다. 그리고는 손을 항상 감추고 다니면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니 아버지가 타이르면서 몸조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서도 상복의 띠를 풀지 않고 3년을 시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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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대응(大應). 진주 승산에 살았다. 천성이 충의롭고 지략이 있어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성재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정희량과 동서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처남인 조성재와 동서인 정희량의 뜻하는 바가 사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알고 일체의 왕래를 끊어버렸다. 그러던 중 1728년(영조 4) 두 사람이 두목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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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북마성리 매껄마을에서 전승되는 농사 노동요. 밭을 매는 일은 단조로우면서 지루한 과정이다. 혼자서 매기도 하지만 몇 명이 어울려 같이 매기도 한다. 간혹 남자들이 밭을 매는 수도 있으나 이 일은 부녀자들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밭을 매는 곳은 절로 넋두리, 신세 자탄의 자리로 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밭매기 소리도 주로 시집살이의 한을 독백조로 읊는 독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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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종. 1980년 12월에 선조들의 거룩한 호국의 얼을 계승, 선양하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제작하였다. 호국의 종 주조는 김철호(金哲怙)가 맡았으며, 처음에는 1972년에 준공된 촉석문에 걸었다. 그러나 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촉석광장에 호국의 종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호국의 종각은 재일동포 최복순(崔福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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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윤경(潤慶). 호는 송암(松菴). 장무공(莊武公) 황윤(黃潤)의 8대손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때 의병장이 되어 적을 거창의 소사평(素沙坪)에서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무신란은 청주 출신의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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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운선(雲善). 통정대부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삯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3년간을 자리에 눕게 되자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이고 하늘과 산신에 빌었다. 그가 약을 구해 밤중에 산길을 오는데, 그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동하였는지 그를 지켜주었으며, 의원집에 가도 사나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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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의 5대손이며, 좌의정에 추증된 황윤공(黃允恭)의 아들이다. 1550년(명종 5)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 일생을 무장으로서 활약하였다. 평소 인품이 중후하고 절개가 남달리 굳었으며, 힘세고 날쌨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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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 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