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의 진주강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지도.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는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319번지 강응환(姜膺煥)[1735~1795]의 옛 가옥에 남아 있는 유물로 수사공 강응환 가전유물(水使公姜膺煥家傳遺物)에 포함되어 있다. 수사공 강응환 가전유물은 교지 6점, 초상화 2점, 서책 2점, 지도 2점 등 총 4종 12점이며, 현재...
-
1858년에 간행된 고창 출신의 유학자 정회찬(鄭悔燦)의 시문집. 정회찬[1759~1831]의 초명은 형기(亨基), 자는 회숙(晦叔), 호는 계당(溪堂)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지금의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槐峙里)에서 출생하였다. 1771년(영조 47)인 13세부터 족숙(族叔) 이재(頤齋) 정인수(鄭仁壽)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흉년이 들면 종족...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강응환(姜膺煥)이 경상좌도수군절도사[동래수사]로 재직할 때 저술한 정적(政蹟). 강응환[1735~1795]은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정조 2)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779~1783년까지 경상도 칠원현감을 지냈다. 대구영장, 고령진병마겸절제사, 평안도창성도호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동래...
-
1605년에 고창 출신의 김축(金軸) 일문에게 내린 공신녹권. 『단서철권』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공신들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와 쇠로 만든 표지, 즉 공신녹권을 일컫는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 해 5월 호남 사람들이 크게 기대를 걸었던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끈 근왕병이 선조가 서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공주로 돌아오자 김축은 무장에서 의병을 일으...
-
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간행된 읍지. 기록에 의하면 『무장읍지(茂長邑誌)』는 1544년(중종 39) 무장현감 유희춘(柳希春)이 최초로 간행했다고 하나 판종은 알 수 없다. 이후 1636년(인조 14)에 심제(沈𪗆)가 두 번째 『무장읍지』를 간행했으나 역시 판종을 알 수 없다. 세 번째로 1741년(영조 17)에 역시 무장현감 정권(鄭權)이...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승려 이긍선(李亘璇)의 문집. 이긍선[1767~1852]은 조선 후기 백파대사(白坡大師)라고 불린 승려이자 학자이다.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0세손 이종환(李宗換)[1729~1795]의 아들로 전라도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났다. 17세까지 선운사에서 과거 공부에 몰두하다 18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운사에서 출가...
-
1765년에 간행된 고창 출신의 유학자 고우열(高友說)의 시문집. 고우열[1690~1757]의 자는 은경(殷卿), 호는 옥호(玉湖),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690년(숙종 16) 흥덕현 옥호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옥제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가학(家學)으로 글을 배웠다. 19세 때 「유상대기(流觴臺記)」를 지었고, 48세 때 흥덕향교 명륜당의 ‘상량문(上樑文)’을 지었...
-
1842년 황서구(黃瑞九)가 고창 출신의 황윤석(黃胤錫)이 펴낸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주요 내용을 뽑아내어 편찬한 시문집. 이재(頤齋) 황윤석[1729~1791]은 본래 『이재난고』라고 하여 일기 형태의 시문집을 남겼다. 1829년(순조 29) 황윤석의 후손 황수경(黃秀瓊)이 『이재난고』에서 시문을 발췌하여 당시 전라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의 도움과 서문을 받아서 목판본 26...
-
1829년에 간행된 고창 출신의 운학자(韻學者) 황윤석(黃胤錫)의 문집. 황윤석[1729~1791]은 조선 후기의 운학자이다.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실학의 학풍을 이어받아 종래의 이학(理學)과 서구 학문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저서로 『이재유고(頤齋遺稿)...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강응환(姜膺煥)이 칠원현감으로 재직할 때 저술한 정적(政蹟). 강응환[1735~1795]은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출생하였다. 1770년(정조 2) 통예원인의(通禮院引儀)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779~1783년까지 경상도 칠원현의 현감을 지냈다. 1783~1794년까지 대구영장, 고령진병마겸절제사, 평안도창성도호부사, 경상좌도수군...
-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상인 및 일반 행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설치된 것이다. 역과 함께 설치된...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개숙(皆叔), 호는 치재(癡齋).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강계오(姜繼吳)이고, 할아버지는 강시언(姜時彦)이다. 아버지는 송암(松庵) 강필주(姜弼周)이며, 어머니는 황주변씨(黃州邊氏)로 변태(邊泰)의 딸이다. 모산(茅山) 강민저(姜敏著)가 형이다. 강만저(姜萬著)는 1655년(효종 6...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茅山). 강희맹(姜希孟)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 강계오(姜繼吳)가 전라남도 영광에서 세거하다 처가[진주정씨(晉州鄭氏)]와 외가[무송유씨(茂松庾氏)]가 있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강필주(姜弼周)이다. 강민저(姜敏著)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문하에서...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 낙향한 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신백(信伯), 호는 청계(淸溪). 대제학을 지낸 진산부원군 강계용(姜啓庸)의 13세손으로, 파조 통계공(通溪公) 강회중(姜淮仲)의 7세손이다. 강순(姜恂)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 및 집안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중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호은(湖隱).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강계판관을 지낸 강계오(姜繼吳)이다. 강시언(姜時彦)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깊었다. 항상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하고 문장과 기절(氣節)이 뛰어나 주위의 추앙을 받았다. 이괄(李适)의...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서(名瑞), 호는 물기재(勿欺齋).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에서 세조 조에 이르기까지의 명신으로 이름난 강희맹(姜希孟)의 11세손이다.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의 여섯째 아들 강흔수(姜欣壽)가 강응환(姜膺煥)의 9대조인데, 그의 6대조 강계오(姜繼吳)가 전라남도 영광에서 외가인 무송유씨(茂松庾...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 낙향한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로(大老), 호는 송암(松庵). 강희맹(姜希孟)의 7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진주강씨 고창 입향조인 강계오(姜繼吳)이고, 아버지는 병자호란에 의병으로 참여했던 강시언(姜時彦)이다 강필주(姜弼周)는 1621년(광해군 13) 할아버지 강계오가 연산군 때의 혼탁한 세상을 피해 남하, 은거한 영광 땅에서 태어났다. 이후 5세...
-
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실학자. 강후진(康候晋)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이재(頥齋) 황윤석(黃胤錫) 등과 더불어 호남 실학자로 평가된다. 한국의 상고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특이한 관점과 식견을 지녔으며, 문헌을 널리 읽고 유적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록한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순(子順)·순보(順甫), 호는 태평산인(太平散人)...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구부(懼夫), 호는 장봉(莊峰). 전라남도 영광에 정착한 강유(康旒)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강응성(康應星)이다. 강흔(康訢)은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성장하여 상례와 여묘(廬墓)를 다시 갖추는 효행을 지켜 냈다. 학덕이 높은 수은(睡隱) 강항(姜沆)과 사귀면서 널리 배우고...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검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토성 터. 창내토성에 대한 문헌 자료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창내토성으로 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11에 나타나는 “오태성 서쪽 15리(吳泰城西十五里)”라는 기록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흥덕읍성에서 서쪽으로 약 5㎞ 떨어진 창내토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내마을 뒤쪽인 북측 야산에 위치하는데...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고창군 성송면 계당리 일원에는 모두 4개소의 고인돌군이 위치하고 있다. A군 고인돌 2기, B군 고인돌 1기, C군 고인돌 4기, D군 고인돌 7기로 모두 14기이다. 대부분 기반식 고인돌이며 덮개돌이 비교적 판석형에 가까운 평평한 돌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B군 고인돌과 D군 1기의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계산리 고인돌은 논 가운데 단독으로 있다. 초대형의 덮개돌 아래에 받침돌들이 묻혀 있었다. 주위에도 3기의 고인돌 덮개돌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확인되었지만 조사 결과 원래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고인돌은 대체적으로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계산리 고인돌과 같이 단독으로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고대라는 개념은 서양의 고대·중세·근대의 세 시기로 나눈 시대 구분을 원용한 것이다. 서양사에서 고대 사회의 특징은 주로 생산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서양사의 경우와 같은 노예 경제 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은 한국사에서 고대 설정을 어렵...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아버지는 참봉 고응진(高應軫)이다. 고덕붕(高德鵬)은 41세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 격문을 작성하여 동지를 규합한 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진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 고경명은 이미 순절한 뒤여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채홍국(蔡弘國) 등...
-
918년부터 1392년까지 존속한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고려 왕조 시대. 918년 왕건(王建)[877~943]이 건국한 고려는 1392년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이다.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은 고려 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한 상질현(尙質縣)과 영광군에 속한 장사현(長沙縣), 고창현(高敞縣), 무송현(茂松縣) 등 네...
-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자룡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통신 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경우, 봉수대는 고창현[현 고창읍]과 흥덕현[현 흥덕면]에는 없었고, 무장현[현 무장면]에만 두 곳이 설치되었다. 그 이유는 무장현이 바닷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봉수조를 보면 “고리포봉수재현서이십리남응영광군홍농산북응소응포(古里浦烽燧在縣西二十里南應靈光郡弘農山...
-
조선 시대부터 근대 개항기까지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소재로 전해온 문서. 문서란 경우에 따라서 서책·서적을 뜻하기도 하였고, 추안(推案)·국안(鞫案) 등 재판 관계의 신문·진술 기록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과 개인 간에 토지·노비·가옥의 매매, 재산의 상속, 전곡(錢穀)의 차용 시에 주고받는 글은 주로 문권(文券)·문계(文契)·문기(文記) 등을 썼으나, 흔히 땅문서·종문서·...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있는 마한에서 백제 시대에 이르는 고대 무덤. 고분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통칭하는 옛무덤을 말하지만,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여기에서 한정된 시대란 고대까지를 말하는데, 고대 특히 삼국 시대 분묘를 의미한다. 본디 고분이란 인간의 마지막 통과 의례인 장례의 결과로 남겨진 기념물로서 당시인의 사유 체계와 내세관이...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와 성송면 무송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백제 시대 석성. 고창군 대산면과 성송면 일원은 백제 시대 송미지현[현 성송면, 대산면, 무장면 일원]에 속하다가 무송현으로 개칭되었고, 1417년(태종 17) 무송현이 장사현과 병합하면서 무장현이 되었다. 고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 고적조에 “...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예지리에 있는 백제 시대 성 터. 백제 시대에 고창 지역의 인구가 다른 지역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고창군 관내에 백제 시대의 성(城)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고적조사자료(朝鮮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흥덕면 흥덕리, 아산면 상갑리, 오산면[고수면: 오산면은 뒤에 고창읍과 고수면에 나뉘어 편입되었다] 예지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와촌리 고수초등학교에 있는 석기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유물. 고수초등학교 내에 토기, 도기, 자기, 기와, 동경 등 40여 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고수초등학교 소장유물은 폐교된 고수남초등학교에서 이전해 온 것으로 이 지방에 거주하는 오재균 등이 학생들의 시청각 교재로 희사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 유물의 명패에는 출토지가 표기되어 있는데 청자, 백...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빈거(賓擧), 호는 요은(鬧隱). 주부를 지낸 고억령(高億齡)의 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응진(高應軫)이고, 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었던 여곡(麗谷) 고덕붕(高德鵬)이며, 아버지는 고수겸(高守謙)이다. 부인은 칠원윤씨(漆原尹氏)로 참봉을 지낸 윤사근(尹思勤)의 딸이다. 자녀로 고재정(高在貞) 등이 있다. 고여흥(高...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은경(殷卿), 호는 옥호(玉湖). 주부 고억령(高億齡)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여곡(麗谷) 고덕붕(高德鵬)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수겸(高守謙)이다. 할아버지는 요은(鬧隱) 고여흥(高汝興)이며, 아버지는 옥숙(玉淑) 고재혁(高在爀)이다. 부인은 도강김씨(道康金氏)로 김세기(金世起)의 딸이다. 자...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무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만든 선사 시대 거석 건조물의 일종으로 작은 돌이 큰 돌을 괴고 있다는 뜻의 괸돌에서 유래하였다. 이를 ‘지석묘’라고도 한다. 고인돌은 한반도와 더불어 중국의 랴오닝성[遼寧省]과 산둥[山東], 일본의 큐슈[九州] 등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원에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한반도는 그중에서 집...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축조를 위한 채석장. 고창 고인돌군은 성틀봉과 중봉을 중심으로 한 남사면에 주로 축조되었으며, 파괴된 고인돌 덮개돌 등을 포함하면 약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지역으로, 세계 최대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다수의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하서는 그에 걸맞는 덮개돌 등을 채굴했던 채굴지가 있게 마련인데, 성...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 있는 동학의 기포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 등지에 진을 치고 머물렀으나,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을 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무장으로 피신하였던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3월 16일경부터 무...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석축 읍성 및 관아 건물. 1991년 2월 26일 사적 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축조한 건물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백제 고분군.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남쪽에 위치한 태봉[110.4m]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정상부 및 말단부에 있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의 동쪽으로는 계단식 농경지 및 태봉에서 뻗어 내린 가지능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사당제마을과 사근제마을이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후동마을이, 북쪽으로는 고창-아산간 국도 15호선이 동서로 지나가고 있...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백제 시대 금동 신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2009년 고창 봉덕리 1호분을 발굴한 결과, 유력자 부부의 합장묘인 4호 구덩식 돌방[수혈식 석실]에서 금동 신발 한 켤레와 금제 귀고리 두 쌍, 대나무잎 모양 머리 장식 등의 장신구, 중국 청자, 일본계 토기, 큰 칼, 화살통 따위의 각종 무기류 등이 대량 출토됐다고 밝혔다. 고창 봉덕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부곡리 고인돌 중 덮개돌을 갖추고 있는 고인돌은 모두 3기에 불과했다. 덮개돌의 무게는 10톤 내외로 고창 지역 고인돌 중 큰 편이 아니다. 부곡리 고인돌의 형식은 지상 석곽식에 주형 받침돌을 부가한 형태이다. 제일 규모가 큰 3호 고인돌은 후대에 교란되었다. 조사에서 총 20기의 고인돌과 하부 구조로 판단되는 매장 주체...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돌무덤군. 상금리 고인돌은 상금마을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으로 이어지는 노령산맥 가리재[225m] 정상부까지 약 2.7㎞ 거리[고인돌로 판단되는 205기의 석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에 있으며, 아홉 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리재는 법성포와 내륙 산간인 장성을 이어주는 교통로인데, 이 길을 따라...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돌무덤군.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은 죽림리 일대에 442기이다. 세계문화유산은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에 고창읍 도산리의 5기를 포함하여 총 447기이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이 분포된 입지는 다음과 같다. 고창읍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3㎞ 떨어진 곳에 북방식 고인돌[지석묘]이 있는 도산마을이 있다. 다시 이 마...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초기 국가 시대 마한의 분묘군. 고창 만동 유적은 아산~고창간 도로 공사 때에 발굴 조사된 분구묘로서 고창 지역에서 마한 세력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고창 만동 유적은 중부 내륙 지역인 청주 송절동·송대리, 천안 청당동, 공주 하봉리 등지에서 조사된 주구 널무덤[토광묘]과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간촌리·율촌리, 부안, 고창 등지...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객사. 객사는 궐패(闕牌)를 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정청(正廳)으로서, 왕명(王命)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고창 무장객사는 좌·우헌(左·右軒)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창 무장객사의 정문격인 진무루 누각 아래로 진입하면 평지를 두고 만나는...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장현[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의 치소로 사용하던 건물. 고창에서 흥덕으로 11㎞를 더 가면 성내리가 있으며, 이곳에 무장객사, 무장향교와 함께 무장동헌이 있다. 무장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현감이 집무하던 곳이다. 1565년(명종 20)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에서 교실로 사용하는 바람에 변형되었으나 1...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전기 읍성. 조선 시대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었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안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팠으며, 성안에서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척화비. 고창읍성 내 척화비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해 척화비를 세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고창 지역에서는 이듬해인 1872년(고종 9) 고창현감 이동석(李東奭)의 주도 하에 모양성 내 공북루 오른편에 세워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척화비...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군. 고창읍성 비석군은 현재 모양성 앞 주차장에 2열로 모두 18기의 비석이 배치되어 있다. 고창읍성 비석군은 원래 고창현[현 고창읍] 내에 산재하던 것들인데, 보존을 위해서 근래에 고창읍성으로 옮겨놓았다.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현감, 관찰사에 대한 영세불망비 4기, 현감과 관찰사에 대한 선정비 12기, 유애비 2기가 있으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순서(舜瑞)·응중(應仲), 호는 방산(方山). 증조할아버지는 요은(鬧隱) 고여흥(高汝興)이고, 할아버지는 고재경(高在慶)이다. 아버지는 고우용(高友龍)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이인발(李仁馞)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정씨(晋州鄭氏)로 정상악(鄭象岳)의 딸이다. 고한벽(高漢璧)은 5세 때인 1722년(경종 1) 겨울...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에 있는 조선시대 비석군. 흥덕향교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에 총 25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의 내용으로 분류하면, 흥학비 2기, 선정비 12기, 불망비 8기, 기타 3기 등이다. 교운리 비석군은 대부분 공적비로서 흥덕현[현 흥덕면] 일대에 산재해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놓았다. 흥덕농협에서 흥성동헌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고 흥덕터미널에서 큰길 맞...
-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처(處)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일종의 장원(莊園)으로 신라 녹읍제(祿邑制)의 유제(遺制)로 여겨지며, 비슷한 것으로 장(莊)이 있었다. 처는 단순한 면적 단위의 장원이 아니라 단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지역적 행정구역의 하나로서 군현(郡縣)의 하부 단위였다. 그러므로 처는 현으로 승격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 군현에...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전해지는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 금석문은 보통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뜻하며, 넓게는 나무·토기·그릇·직물·전돌·기와 등에 기록된 문자를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역사 연구에 있어 고문서 등의 기록과 함께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고창 지역의 금석문은 공적비와 묘비 중심으로 조사되었고, 그밖에 효열비와 각종의 기념비가 추가로 확인된다. 특히 공적비는...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조선 시대의 저수지. 우리나라는 몬순 지대이기 때문에 수량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였다. 예부터 냇가나 계곡에 방죽을 쌓아 물을 충분히 가둬두고 이를 제언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언은 330년(흘해왕 21)에 축조된 벽골제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1782년(정조 6)에 조사한 전국 제언의 수는 총 3,378개였다. 1778년(정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여(德輿), 호는 우졸재(愚拙齋).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노석(金魯錫)이다. 김경규(金慶奎)는 5세 때인 1811년(순조 11) 집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1813년(순조 13)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배웠으며, 다음해 시를 지어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1817년(순조 17) 고부군수...
-
조선 후기와 개항기 고창 출신의 명창 김경홍은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서 태어났다. 철종 대에서 고종 대에 걸쳐 활약한 명창으로, 특히 「흥부가」를 잘 불렀다고 한다. 그에 관해서는 근래에 발간된 『고창예술의 맥』에 한 줄 언급되어 있을 뿐, 다른 기록들이 찾아지지 않아 활동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인.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아버지는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낸 돈목재(敦睦齋) 김기서(金麒瑞)이다. 김경희(金景憙)는 1515년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호동마을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 생원 3등 34위로 합격하였다. 이어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김안로(金安老) 등의 농간으로 낙방하자 중종이...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의숙(義叔)·경헌(景憲), 호는 송계(松溪). 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일명 삼현파(三賢派)])의 파조 김관(金管)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축(金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80세였던 김여성(金汝聲)의 아버지 김축이 “장남은 종손이므로 노모를 모시고 집안 가솔들을 돌보라.”고 당부하고 두...
-
조선 후기와 개항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경삼(敬三), 호는 죽강(竹岡)이다. 1835년(헌종 1)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태윤(金泰潤)이다. 1854년 청도김씨와 결혼하였으며, 큰아들이 김재헌이다. 김기풍(金箕豊)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웠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군언(君言), 호는 의촌(義村). 종종 조의 명필로 알려진 김경희(金景熹)가 증조할아버지로, 아버지는 정묘호란에 의병으로 참여한 김여성(金汝聲)이다. 김남식(金南式)은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공부를 하다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9세 때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호소사...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이헌(以憲), 호는 청계(淸溪). 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일명 삼현파(三賢派)])의 파조 김관(金管)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김헌(金軒)이다. 김두남(金斗南)은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헌이 행재소로 달려가 근왕(勤王)의 대열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직산...
-
조선 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무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대건(大健), 호는 죽강(竹岡). 할아버지는 고려조의 대신으로 공훈을 세워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진 김수(金隨)이고, 아버지는 직제학을 지낸 김미(金彌)이다. 어머니는 개성소윤을 지낸 정길(丁佶)의 딸 나주 정씨(羅州 丁氏)이다. 슬하에 김원량(金原亮), 김희량(金希亮), 김문량(金文亮) 삼 형제를 두었다. 김빈길(...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매산(梅山). 증조할아버지는 판서를 역임한 김인우(金仁雨)이고, 아버지는 매은(梅隱) 김오행(金五行)이다. 김석원(金錫元)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1469년(예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녹사(錄事)와 통사랑(通仕郞)이 되었다. 계공랑(啓功郞)에 올랐을 때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익대순성명량훈(翼戴純誠明亮勳)을...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지(遠之), 호는 국재(菊齋). 집현전 학자 김양원(金暘元)이 증조할아버지로, 아버지는 참봉 김한련(金漢璉)이다. 김성진(金聲振)은 어려서부터 강개한 지기(志氣)가 넘치고 효행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고, 몰래 허벅지살을 떼어내 탕으로 달여 먹임으로써 주변의 찬사가 끊이...
-
조선 후기와 개항기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김수영(金壽永)은 조선 헌종~고종 대에 활약했던 판소리 명창으로,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후기 8명창의 하나로 유명한 김찬업(金贊業)이다. 관례로 볼 때 김수영은 아들 김찬업에게 어려서부터 서편제 소리를 가르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 문하의 박만순(朴萬順)과 김세종(金世宗)에게 소리를 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이(遠而). 명필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의 자손이며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의 일원으로서 정유왜란 소사 전투에 명장의 전공을 세운 좌랑 홍우(弘宇)이다. 김여성은 1564년(명종 19년)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에서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침입하자 사계(沙溪) 김장생...
-
개항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성규(聖圭)이고 호는 만수(晩睡)이다.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김양대(金養大)의 아들이다. 1842년(헌종 8)에 공음면 선동리(扇洞里)에서 출생하여 20세 때 고창읍 도산리(道山里)로 이사했다. 자질이 총명하여 일찍 문리가 통했고 효심이 깊어 부모를 잘 섬겨 정성을 다했다. 또한 부모의 상사(...
-
고려 후기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김양감(金良鑑)의 11세손으로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의 현손이다. 김인우는 4남 중 맏아들이다. 매은공 김오행(金五行)이 김인우의 손자로, 고려가 망하자 선대의 유훈을 좇아 의리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김인우(金仁雨)는 전리판서(典理判書)와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공서(公瑞), 호는 남계(南溪).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의 후예로, 이조판서 김호(金湖)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김중겸(金仲謙)이고,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이다. 김정(金珽)은 29세 때인 1555년(명종 10) 진사시 3등으로 합격하였다. 당대에 문장과 절효로 이름이 났으며, 충암(冲庵) 김정(...
-
조선 후기와 개항기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김창록(金昌祿)은 철종과 고종 대에 활약한 판소리 명창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에서 태어나 흥덕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 동편제(東便制) 소리로 박만순(朴万順)·김세종(金世宗)과 같은 명창과 어깨를 겨루어 뒤지지 않을 만큼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러나 행적에 대한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김해(金海). 장사군(長沙君) 김선(金璇)의 후손이다. 김천복(金天福)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수백 명과 가동(家僮) 수십 명을 산 아래 요새에 매복하여 수천의 적을 습격하여 베었다. 그래서 그곳을 토적동(討賊洞)이라고 이름 하였다. 삼종숙인 병사(兵使) 김수연(金秀淵),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금산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후에 진주 촉석루에...
-
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의병. 김축(金軸)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솔과 후학을 거느리고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활약하다 이듬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대를 이를 큰아들만 집에 남기고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진하여 6충, 1효, 4열부를 배출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고언(高彦), 호는 남계(南溪). 덕원군의 21세손으로 아버지는 함...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거짓 고변 희생자. 1733년(영조 9) 11월 4일 포도대장 신광하(申光夏)가 괘서사건에 대해 상소하였다. 신광하가 말하기를, “창원 사람 김계보(金繼寶)가 금년 8월 16일에 창평 땅에 갔는데, 태인 사람 홍구채(洪九采), 정읍 사람 김명신(金命信)·서정구(徐鼎九), 흥덕 사람 김팔기(金八起)·정제인(鄭齊仁), 부안 사람 김남역(金南繹) 등이 고만령(高萬...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이자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용(伯容), 호는 백곡(白谷). 증조할아버지는 김명원(金命元)이고, 할아버지는 김기서(金麒瑞)이며, 아버지는 생원 김경희(金景熹)이다. 김홍우(金弘宇)는 일찍이 윤두수(尹斗壽)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1593년(선조 26) 전주에서 치러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경...
-
1592~1593년 고창 유림이 참여한 임진왜란기의 의병 항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창과 장성 지역의 유림이 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왜군을 막기 위한 의병을 일으키면서 일어났다. 1차 남문창의는 1592년 8월 24일 김경수(金景壽)를 맹주로 하여 김홍우(金弘宇)·기효간(奇孝諫)·이수일(李守一) 등이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향(鄕)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권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조(登神莊條)에 “신라가 주군(州郡)을 건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가 현이 될 만하지 못한 곳에는 향 또는 부곡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인구나...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부곡(部曲)이란 특수 행정구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조(登神莊條)에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부곡이 삼국 시대부터 존재했다...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삼국 시대 분묘. 도산리 유적은 고창기능대학 남쪽에 동서로 뻗은 해발 48m 정도의 구릉에 있으며, 현재 구릉 정상부 중심지에는 밭이 경작 중이다. 조사 지역 동쪽으로는 고성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는 구릉의 곡간 지대를 사이로 삼국 시대 주거지가 확인된 우평리 유적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구릉에...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부곡(部曲)이란 특수 행정구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조(登神莊條)에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부곡이 삼국 시대부터 존재했다...
-
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원촌리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는다....
-
고창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삼한 시대 마한 54소국 가운데 한 나라. 한반도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B.C. 2000년 또는 늦어도 B.C. 1500년부터이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면서 국가가 형성된다고 봄으로 한반도에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늦어도 B.C. 1500년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B.C. 1500년부터 한반도 각지에 많은 소국들이 형성되었고,...
-
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무령군조에 "본디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무장현조에 "무송현(茂松縣)은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군.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 1991년 2월 21일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가 옛 정취를 자아내고, 성내에는 객사, 동헌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
조선 시대 고창 지역의 군사 조직. 조선의 군사제도는 고려의 유제를 답습하였다. 각 도마다 전담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있어군사 행정과 전투 수행을 책임졌다. 1397년(태조 6) 태조는 군사 단위로서의 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진(鎭)을 설치하여 도절제사 대신 첨절제사를 두고 부근 군현의 병마를 통괄하는 동시에 도관찰사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도, 경...
-
고창 지역에 설치된 조선 전기의 행정구역. 조선 시대에 현(縣)은 지방 행정구역인 주부군현(州府郡縣) 가운데 가장 낮은 단위의 행정구역이다. 현은 지방 행정구역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군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군현제도가 그것이다. 군과 현은 군이 현을 거느리는 행정적 상급 단위라기보다는 병렬적 관계였다. 군현제도는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 체계이고, 이는 중앙 집권화를...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있는 국가 및 지방 지정 문화유산. 문화재는 유형에 따라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 등으로, 지정 여부에 따라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 2010년 현재 고창군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23점[보물 5점, 사적 5점, 천연기념물 7점, 중요민속문화재 2점, 국가무형문화재 1점, 등록문화재 2점, 명승 1점], 도 지정 문화재 54점[유형문...
-
조선 후기 흥덕현감을 역임한 무신. 민후기(閔厚基)는 무과 출신으로 1727년(영조 3) 10월 흥덕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햇수로 무려 4년간이나 흥덕현감으로 재직했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1728년(영조 4) 7월 22일, 동경연(同經筵)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흥덕현감 민후기는 부임한 뒤로 치적(治績)이 현저하고 군비(軍備)를 보완하였습니다....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화숙(和叔), 호는 매월헌(梅月軒). 찬성사(贊成事) 박열(朴說)의 13세손이며, 증참의(贈參議) 박현손(朴賢孫)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박개(朴漑)이다. 박기호(朴奇琥)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각별하여 어려서부터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고 예로써 몸을 닦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곡식을 모아 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충국(忠國). 증조할아버지는 밀양 박씨 고창 입향조인 양오공(陽梧公) 박서봉(朴瑞鳳)이다. 박서봉은 1463년(세조 9)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무오사화로 스승인 김종직(金宗直)과 친척들이 화를 입자 가족을 데리고 밀양을 떠나 전라남도 무안 등을 떠돌다가 추산봉 아래인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 정...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 유배되었다가 난을 도모한 역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양경(良卿). 증조할아버지는 박황(朴潢)이고, 할아버지는 박세환(朴世桓)이다. 아버지는 박태진(朴泰進)이며, 어머니는 김덕승(金德承)의 딸이다. 박필몽(朴弼夢)은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사서와 정언을 거쳤다.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
-
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반룡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
-
조선 중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여윤(汝潤), 호는 호암(壺巖).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변원종(卞元宗), 할아버지는 직장 변응소(卞應韶)이다. 아버지는 증절충장군(贈折衝將軍) 변구(卞球)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김유형(金宥亨)의 딸이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박구(朴玖)의 딸이다. 동생은 변성진(卞...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여옥(汝玉), 호는 인천(仁川). 호암(壺巖) 변성온(卞成溫)[1530~1614]의 아우로 1549년(명종 4)에 출생했다. 형을 따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이 높아 참봉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고, 형과 함께 아산면 반암리 호암(壺巖)마을 밑에서 은거(隱居)하...
-
1636년 청나라의 조선 침략으로 발생한 전쟁. 1627년(인조 5)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을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
-
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모든 봉수에는 봉수대가 5개 있었는데 이는 거수를 5구분하였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향(鄕)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권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조(登神莊條)에 “신라가 주군(州郡)을 건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가 현이 될 만하지 못한 곳에는 향 또는 부곡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인구나...
-
바다에 인접한 연해 읍성으로 모양부리현의 전래 지명을 차용하여 모양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 영광, 화순, 나주, 제주 등 전라도 7개 군현의 고을에서 노동력이 동원되어 축성된 읍성이다.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평지성이 조합된 평산성으로 왜적 방어와 행정의 효율성을 제고하여 지어졌는데, 성곽의 둘레는 1,680m이며, 성벽의 높이는 4m, 면적은...
-
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
-
조선 후기 간행된 고창 출신의 유학자 오익창(吳益昌)의 시문집. 오익창[1557~1635]은 자가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57년(명종 12) 지금의 고창군 대산면 장동(墻洞)에서 태어나 23세에 사마시에 뽑혔다. 성리학에 밝고 육예(六藝)에 통했으며, 특히 산수(算數)에 깊고 재략이 있었다고 전한다. 효종 때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이...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돌무덤. 산수리 지석묘는 산수리 방축마을에 있어 방축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인돌은 대개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산수리 지석묘와 같이 고갯마루에 단독으로 있는 경우의 고인돌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대개 제단 고인돌, 혹은 기념물 등의 성격을 지닌다. 방축마을 도로 건너 대산면 상금리로 넘어가는 소로가...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일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삼인리 고인돌은 모두 세 개 지역에 나뉘어 군집하고 있다. A군 고인돌 3기, B군 고인돌 10기, C군 고인돌 8기로 모두 21기의 고인돌이 확인된다. 고인돌의 형식은 기반식이나 뚜껑식이지만 대부분 윗돌 아래가 묻혀 받침돌의 수나 형태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A군은 아산면 삼인리 중촌마을 서쪽 구릉에, B군...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연(渷), 호는 충효당(忠孝堂). 아버지는 공조판서에 증직된 서호(徐浩)이다. 서경춘(徐景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남도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여 군량관으로 군량 3만여 석을 모았다. 정유년에 양친과 아내 김씨가 같은 날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6년을 시묘하였다. 충효(忠孝)를 겸하여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전라남도...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하갑리, 상갑리와 경계를 이루는 성틀봉에 있는 백제 시대 석성. 서산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서산고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고창 고적조에 “서산고성은 현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회시산의 남쪽 자락이다. 산허리에...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치원(致遠), 호는 모의재(慕義齋).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참판 서호(徐顥)의 현손이다. 할아버지는 진사 서응성(徐應星)이고, 아버지는 서홍섭(徐弘涉)이다. 서일남(徐馹男)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김장생(金長生)이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전주에 내려오자, 소모유사(召募有司) 유철견과 함...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역사상 금속기 제작 이전에 돌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썼던 시대. 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눈다. 구석기 시대는 뗀석기를 주로 사용하였고 신석기 시대는 간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간석기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토기도 처음 만들어졌다.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탄생한 약 500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까지의 연대이며, 주...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전개된 역사 이전의 시대. 선사 시대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은 시기의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된다. 이는 덴마크의 톰센(C. J. Thomsen)이 제안한 3시대 체계[Three age system]에 따라 인류가 생산한 유물을 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의 3대 시기로 구분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한편, 문자가 존재하...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 범종. 선운사 범종은 불전 사물의 하나다. 종의 중간 부분에 있는 종기(鐘記)로 보아, 1818년(순조 18)에 개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3년 6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쌍두 용뉴[종신을 매다는 고리]까지 총 높이는 124㎝이고, 구경 93㎝, 견경(肩經) 56㎝이다. 종 입구 가장자리의...
-
조선 후기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선운사 사적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3권의 책. 선운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여러 문헌 가운데 하나인 ‘선운사 사적기’는 선운사의 중건과 창건, 사찰 내의 물품 현황 등을 기록한 고문서로, 『선운사적(禪雲寺蹟)』·『참당사사적기(懺堂寺事蹟記)』·『선운사고적(禪雲寺古蹟)』 등 3책을 말한다. 3책 모두 편찬 및 발간 경위...
-
전통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 시설. 성곽이란 성(城)과 곽(郭)의 합성어이다. 성은 내성을 말하고 곽은 성의 주위를 에워싼 나성의 형태로 우리나라는 내성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성곽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전적 의미로 성곽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이 공동 목적을 갖고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
선사 시대의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자 거석 기념물로서 전 세계에 분포하는 석조 유물이다. 그런 고인돌이 현재 고창 지역에는 총 1,500여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의 조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 고창 지역인 것이다. 고인돌이 거석 기념물 또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부터 고창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통신 시설. 소응포 봉수는 무장동헌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8㎞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상하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여 해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국가가 위급 사항에 처했을 때 이를 다른 지역에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소응포 봉수는 해리면 금평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올라가는 낮은 산[높이 122m]에 있다. 지금의 해리면 동호리 솔개[소...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문경(聞慶). 할아버지는 송신경(宋臣敬)이며, 아버지는 병부전서를 역임한 송련(宋璉)이다. 어머니는 김하(金河)의 딸 고성김씨(固城金氏)이다. 외조부는 한성부윤을 지낸 조언(曺彦)이다. 흥덕의 사족(士族)인 평해황씨(平海黃氏), 수원백씨(水原白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등이 모두 송수중(宋守中)의 가문인 문경송씨(聞慶宋氏)와의 혼인으로 입향한...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유물과 유품. 조선 후기의 무신 강응환(姜膺煥)[1735~1795]의 후손 강성욱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로, 교지 6점, 초상화 2점, 서책 2점, 지도 2점 등 총 4종 12점이다.「청북변성도(淸北邊城圖)」와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 그리고 『칠원정적』, 『내영정적』, 「강응환 영정」, 교지 등이 그것이다. 강응환은 1770년...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선비. 안서순(安瑞順)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안순서(安順瑞)로도 불렸다. 성격이 맑고 깨끗하며 굽힘이 없었다. 민생을 위해서, 혹은 임금의 잘못된 정사나 권신의 독단적인 행태에 대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상소를 올려 고칠 것을 주장하였다. 1554년(명종 9) 상소하면서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모양을...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성송면 암치리 암치마을은 성송면에서 전라남도 지방으로 넘어가는 고개 입구에 속한다. 마을 일원에는 3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멸실되고 암치리 암치마을 옆 진등에 5기, 마을 남쪽에 2기가 있으며, 발굴 조사된 대형의 고인돌 1기가 남아 있다. 1999년 고창농지개량조합에서 농촌 용수 개발 사업...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도 무장현 고적조에 "약수향은 염정(鹽井)을 약수라고 일컫는다[藥水鄕鹽井稱藥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대동지지(大東地志)』, 『여지도서(輿地圖書)』, 『고창현읍지(高敞縣邑誌)』 등에 관련 기록이 있다. 약수향은 무장현에 소속되어 있던 향으로 지금의 심원면 월산리 일대이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현의 북...
-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군의 역사. 고창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6, 잡지 제5 무량군편에서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신라 경덕왕 때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고창군은 신라 때에 고창현으로 무령군이 관할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창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
-
고려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고창(高敞). 증조할아버지는 고창 오씨 시조로 한림태학사를 지낸 오학린(吳學麟)이고, 할아버지는 한림학사를 지낸 오질(吳質), 아버지는 탁라구당사(乇羅句當使)를 지낸 오인정이다. 형은 오세공(吳世功)이며, 죽림칠현인 오세재(吳世才)가 아우이다. 오세문(吳世文)은 1127년(인종 5)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에서 태어났다....
-
고려 전기 고창 출신의 문인.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덕전(德全), 호는 복양(澓陽). 할아버지는 한림학사 오학린(吳學麟)이다. 오세재(吳世才)[1133~1199]는 젊어서 힘써 공부하였는데 육경(六經)을 손으로 베껴 읽어서 능통하였다. 또 날마다 『주역(周易)』을 외웠으며 시문(詩文)에 탁월하였으므로 당나라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풍(風)이 있어 당세에 널리 알려졌다....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 부원군 오광휘(吳光輝)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라좌수우후를 지낸 오숙(吳淑)이고, 할아버지는 진사 오세영(吳世英)이다. 아버지는 진사 오인(吳寅)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학(李鶴)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함풍이씨(咸豊李氏)로 이유겸(李惟謙)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
고려 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고창(高敞). 할아버지는 고창 오씨 시조로 한림태학사를 지낸 오학린(吳學麟)이고, 아버지는 한림학사 오질(吳質)이다. 슬하에 오세공(吳世功), 오세문(吳世文), 오세재(吳世才) 삼형제를 두었다. 오세문은 승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하여 세자를 가르치는 동각시학(東閣侍學)을 지냈고, 오세공과 오세재(吳世才)도 당대에 이름난 학자였다. 특히...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오호리에 있는 백제 시대 토성. 흥덕면은 본래 백제 상칠현이었는데, 상칠현의 치소지가 흥덕면 오호리 오태동에 있는 오태리 고성으로 보인다. 상칠현은 신라 경덕왕이 상질이라 하여 고부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후에 장덕현으로 고쳤으나 충선왕이 1308년(충선왕 1) 즉위하자 창덕으로 고쳤고, 다시 창왕 때에는 창왕과 이름이 같아 흥덕으로 고쳤다. 오태리 고성에 대...
-
고려 전기 고창오씨의 시조. 본관은 고창(高敞). 아들 오질(吳質)은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5세손 오세공(吳世功), 오세재(吳世才), 오세문(吳世文)은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오학린(吳學麟)은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단정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학사를 지냈다. 외적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韜庵). 증조할아버지는 오세훈(吳世勳)이고, 할아버지는 오원(吳謜)이다. 아버지는 공주판관을 지낸 오언기(吳彦麒)이다. 오희길(吳希吉)은 1566년(명종 21)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였고, 서책과 문방구를 좋아하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내력이 있었다. 1571년(선조 4) 기효관(奇孝寬)의...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숙명(淑明).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부평부사를 역임한 오세훈(吳世勳)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에 증직된 오언린(吳彦麟)이다. 오희량(吳希亮)은 어려서부터 종조(從祖)할아버지 오겸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부모에 대한 효도가 깊고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였다. 형 오희철과 한 이불에...
-
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고 일컫...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있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가마 터. 요지(窯址)는 토기·질그릇·오지그릇·도자기·기와·벽돌·숯 등을 구워내는 시설로서 가마 터·가마자리 등으로도 불린다. 옛날에는 토기를 가마 속에 넣지 않고 그대로 맨 땅 위에 쌓은 후, 그 위에 많은 장작이나 섶을 덮고 불을 질러 구워내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이어 일찍부터 도자기가 발달하였다....
-
고려 시대 고창군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 일대에 있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군. 용계리 고인돌군과 더불어 운곡리 고인돌군 17기가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크게 세개의 지구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중 A지구 7기, B지구 8기, C지구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러나 B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고인돌은 수몰 지구에서 벋어나 있기 때문에, 덮개돌이 초대형이거나 고인돌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을 제외...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학자.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실(汝實), 호는 성은(城隱). 할아버지는 유익하(柳翊夏)이고, 아버지는 유해종(柳海宗)이다. 유광적(柳光迪)은 1715년(숙종 41) 고창읍 양곡리[현 고창읍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인 1719년(숙종 45) 아버지를 여의고, 열다섯 살 때인 1729년(영조 5) 어머니까지 잃었다. 고애자로 성장한 그는 어려서...
-
고려 전기 무송유씨 시조.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구수(龜壽). 고려 태사(太師) 유금필(庾黔弼)의 5세손이다. 유녹숭(庾祿崇)은 문종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1099년(숙종 4)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가 1102년(숙종 7) 좌산기상시로 자리를 옮겼다. 그 해 가을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使)를 거쳐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를 역임한 뒤 무송부원군(茂...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사명(士明).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유춘발(柳春發)이며, 동생은 정랑(正郞)을 지낸 유동립이다. 유동휘(柳東輝)는 선조 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아버지의 성원으로 당대의 대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를 섭렵하였다. 이후 시례(詩禮)에 능하여 천거된 뒤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23년(광해군 1...
-
고려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이자 양리(良吏). 본관은 무송(茂松). 증조할아버지는 의종(毅宗) 때 재상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유필(庾弼)이며, 할아버지는 명종(明宗) 때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유응규(庾應圭)이다. 아버지는 강종(康宗) 때 병마부사를 지낸 유세겸(庾世謙)이다. 유석(庾碩)은 1216년(고종 3) 과거에 장원 급제 후, 내시(內侍)에 임명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신. 유순도(庾順道)는 조선 전기 태조부터 세종 대에 활동한 문신이다. 생몰년 미상이며, 유학에 종사하는 자이나 오로지 음양(陰陽)·술수(術數)와 의술(醫術)로 진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이 세자의 배필을 점치도록 명하는 등 음양, 풍수 분야에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역법의 교정에도 참여하였다. 본관은 무송(茂松). 고려의 태사(太師) 유금필(庾黔弼)의...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취직(就直). 할아버지는 고흥유씨 석탄파(石灘派)의 시조 유운(柳澐)이다. 아버지는 유경홍(柳慶弘)이다. 유여회(柳汝檜)는 가학(家學)으로 경사에 통달하였다. 48세 되던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뒤 군량을 모아 병영에 수송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였...
-
고려 시대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빈옥(賓玉), 초명은 유원규(庾元規). 아버지는 의종(毅宗) 묘정에 배향된 공숙공(恭肅公) 유필(庾弼)로, 유응규(庾應圭)는 5남 중 맏아들이다. 유필은 문장과 덕행이 출중했으며 성품이 진실하고 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다. 의종 때에 벼슬이 판이부사(判吏部事)까지 올랐다. 왕의 수차례에 걸친 설득에도 불구하고 왕의 사랑하는 신...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상경(商卿), 호는 삼소당(三笑堂). 관란(觀瀾) 유춘발(柳春發)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유동현(柳東賢)이고, 할아버지는 통훈대부 유철견(柳鐵堅)이다. 친아버지는 유교령(柳喬齡)이고, 양아버지는 생원 유만령(柳萬齡)이며, 양어머니는 해미곽씨(海美郭氏)로 곽성구(郭聖龜)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임한...
-
고려 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연(湛然). 할아버지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유필(庾弼)이며, 아버지는 공부시랑 유응규(庾應圭)이다. 아우는 금자광록대부 회부시랑을 지낸 유세겸(庾世謙)이다. 큰아들은 이규보와 친교가 두터운 유경현(庾敬玄)이며, 그 아래로 유정규와 유정현을 두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유응규와 유자량이 형제로 되어 있...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조산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한 계통으로 도시조(都始祖) 유전(劉筌)의 9세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유창(劉敞)[1352~1421]은 유전의 12세손으로 강릉 유씨 중시조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고창 지역의 강릉 유씨 집성촌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와 아산면 중...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수(汝壽).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유춘발(柳春發)이고, 아버지는 효행으로 통덕랑(通德郞)이 된 유동신(柳東信)이다. 유철견(柳鐵堅)은 1583년(선조 16) 고창 양곡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숙부 유동휘(柳東輝)와 함께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를 섭렵하였다. 1615...
-
고려 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할아버지는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를 지낸 유고성(庾告成)이고, 아버지는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지낸 유언경(庾彦卿)이다. 큰아들은 유응규(庾應圭)이고,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유자량(庾資諒)이 손자이다. 고려 고종 초 장원급제 하고 지방의 안찰사와 동남도도지휘부사(東南道都指揮副使)를 역임한 유석(庾碩)이 증손자이...
-
조선 전기 무장현감을 지낸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증조할아버지는 조선개국공신인 유창(劉敞)이며, 아버지는 강릉 유씨 좌랑공파 파조인 유계주(劉繼周)이다. 아들은 진원현령(珍原縣令)을 역임한 유세분(劉世扮)이다. 유한량(劉漢良)은 효행과 덕행으로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제수하여 1570년(선조 3) 11월부터 1571년 11월까지 무장현에서 근무하였다. 무장...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원중(源仲), 호는 허재(虛齋). 세종 때 왕자 사부를 지냈던 경암(敬庵) 유구산(柳龜山)의 후손이다. 친아버지는 유영달(柳永達)이고, 양아버지는 유영휘(柳永輝)이다. 유혜원(柳惠源)은 어려서는 형 유필원(柳必源)에게 글을 배웠고, 커서는 고부 선비 권극중(權克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8세 때인 1659년(효종 10)...
-
고려 말 조선 초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고조할아버지는 무송현 호장의 아들로 자수성가하여 충렬왕 때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 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이며, 할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으로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아버지는 『고려사(高麗史)』 효우전에 입전된 윤구생(尹龜生...
-
조선 전기 고창 출신의 문신. 윤자운(尹子雲)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사신(史臣)은, 그를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
고려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 증조할아버지는 무송현 호장 윤양비(尹良庇)이고, 할아버지는 충렬왕 때 정헌대부(正獻大夫)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청백리 윤해(尹諧)이다. 아버지 윤수평(尹守平)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 김씨이다. 아들은 고려 말 이미 『주자가례(朱子家...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
고려 말에서 조선 초 고창 출신의 문신. 윤회(尹淮)는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한관(文翰官)으로서 국가의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많은 글을 지었으며, 경연에서 여러 차례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첨의찬성사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율정(栗亭) 윤택(尹澤)이며, 할아버지는 『고려사(高麗史)』 효...
-
1624년 이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의병 항쟁.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의 대북 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과 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청덕비. 이교인은 문과에 급제하고 1859년(철종 10)에 승지로 불려갔다. 이교인이 선정을 베풀고 다른 지역으로 부임할 때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공음면사무소에 칠암리를 거쳐 대산면 쪽으로 가다 보면 군유오거리에 군유주유소가 나오는데, 이곳에 있다. 비석 윗부분이 비신과 한 몸으로 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현감이후교인청덕...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고부(古阜). 자는 대현(大顯). 문헌공(文獻公) 이경조(李敬祖)의 후손으로 판서를 지낸 이견의 5세손이다. 이대축(李大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병이 깊어지자 변을 맛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했다. 상(喪)을 당해서는 3년간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시묘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진사시에 합격했...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박(士博), 호는 성음(星陰). 장천군(長川君) 이보생(李普生)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어모장군 이형(李逈)이고, 할아버지는 진사 이시휘(李時輝)이다. 친아버지는 통덕랑 이인(李潾)이며, 양아버지는 통덕랑 이용(李溶)이다. 이문언(李文彦)은 성장하여 수촌(壽村) 백시덕(白時德)과 진사 백시명(白時明)의 문하에서 수학하...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건(效乾), 호는 오은(梧隱). 조선 태종의 다섯째 아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示+非)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이기수(李琪樹)이다. 이원남(李元男)은 1588년(선조 21)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동기에 대한 우애가 극진했다. 일찍이 스스로 『소학(小學)』을 깨쳤다....
-
조선 전기 흥덕현감을 역임한 장리(贓吏). 임은(林垠)의 가계나 관력(官歷)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장리[예전에, 뇌물을 받거나 나라나 민간의 재산을 횡령한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로 이름이 나온다. 임은은 흥덕현감으로 재직하던 중인 1480년(성종 11) 5월 11일 옛 무덤을 파서 많은 은기(銀器)와 유기(鍮器)를 수습하여 자기 집으로 가...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때에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
-
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무령군조에 "본시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으로, 경덕왕이 장사(長沙)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다[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현 건치 연역조에는 "본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가 장사라고 고쳐서...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
조선 시대 전라북도 아산면 하갑리에 있던 마을. 저촌(猪村)은 조선 시대 고창현에 속했던 마을로 저촌은 지금의 아산면 하갑리 독곡(篤谷)이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따르면, 서교천은 수곡동을 거쳐서 죽천과 만나는데, 수곡동은 지금의 고수면 일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창현 산천조에 "서교천은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근원은 구왕산에서 나와서 저촌(猪村)에 이르러 죽천...
-
1627년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정산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중(汝衆).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曺繼龍)과 평장사(平章事) 조자기(曺自奇)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감(少監) 조준(曺俊)이고, 할아버지는 소감 조인취(曺仁取)이며, 아버지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조원유(曺元宥)이다. 조서(曺庶)는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
1392년에서 개항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현재의 고창은 고창현과 무장현(茂長縣), 흥덕현(興德縣)이 통합되어 성립되었다. 고창현은 고려 시대에 상질감무가 겸무하였다.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비로소 고창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455년(세조 1)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속읍이 되면서 현감을 파견했고, 속오군(束伍軍)은 입암산성에...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화암(花巖).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으로, 우승지 조후(曺厚)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현령(縣令) 조호인(曺好仁)이다. 조익령(曺益齡)은 지략이 뛰어났으며, 충의를 자임하는 인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용모가 준수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일상생활에 있어 ‘충신독경’(忠信篤敬)이란 네 글자를 좌우명...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오곡(梧谷).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縣令) 조호인(曺好仁)이다. 참봉 조익령(曺益齡)의 동생이다. 조익수(曺益壽)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조익령과 같이 군량미와 군기를 준비하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 18명과 함께 의병장 채홍국(蔡弘國)과 고덕붕(高德鵬)을 따라 흥덕 남당(南塘)에서...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은원(恩源), 호는 만회(晩悔). 직제학(直提學) 조서(曺庶)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참봉 조인준(曺仁俊)이다. 조첨(曺添)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곧으며 굳은 의지와 절개가 있었고, 밖으로는 연약한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강직했다. 어버이를 섬기되 정성을 다했고, 사람의 성품과 자연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혼부(混夫), 호는 계암(溪庵). 직제학 조서(曺庶)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조인숙(曺仁淑)이다. 조흡(曺潝)은 성품이 단아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신유일(辛惟一), 오전(吳晪), 유철견(柳鐵堅)과 함께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북상하다...
-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향(鄕)은 신라 때부터 고려 때까지 있었던 특수 지방 행정구역의 하나이다. 향소부곡은 군현보다 작은 지역 단위였는데,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농사나 특산물을 생산하는 천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인이 거주하며 생산 활동을 하는 말단 행정구역이었다는 학설이 새롭게 나오고 있다. 향은 조선 전기까지 존재하다가 점차 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에 있는 조선 후기 동종(銅鐘). 참당암 동종은 법당의 의식 때 사용하며, 아담한 크기이다. 참당암 동종의 명기에 ‘건륭오삼년무오삼월내원중주조성(乾隆五三年戊午三月內院中鑄造成)’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88년(정조 12)에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내원(內院)’은 현 도솔암 내원암을 뜻하는 것으로, 참당암 동종이 내원암에서 주조되어 참당암...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평강(平康). 고려에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채충경(蔡忠敬)의 5세손이다. 증병조판서 채홍국(蔡弘國)의 셋째 아들이다. 훈련원정(訓練院正) 채경달(蔡慶達)이 형이다. 채영달(蔡英達)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절개가 있었으며, 심성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효성과 우애가...
-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 고려 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채치의(蔡致義)이다. 채홍국(蔡弘國)은 1534년(중종 29)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에 흥덕 남당촌으로 이주했다. 천성이 너그럽고...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철제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한 시기. 우리나라에서 철기 시대는 B.C. 3~2세기부터 A.D. 300년까지의 시기이다. 고대왕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성읍국가, 연맹왕국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가 점차로 소멸되고, 중국으로부터 철기가 도입되어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한다. 이 시기에는 철제 무기류는 물론, 철제 농구와 더불어 우경이 시작되어 농업...
-
고려 시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무송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역원제도라...
-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청동기로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대.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시대는 벼농사의 시작과 더불어 청동기가 유입되고 전쟁이 시작되는 3,000년 전부터 2,000년 전의 시기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청동의 주조술이 전래되어 무기나 장신구 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나무의 벌채로 인하여 대규모로 자연의 변화가 개변이 시작되었으며,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고창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역(驛)은 교통 통신 기관으로 우역(郵驛)·역관(驛館)·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으며, 군사·외교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 집권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이라 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춘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비석군. 춘산리 비석군은 진주정계묵공덕비(晉州鄭桂默功德碑)를 비롯하여 비석 10기가 있다. 즉, 공덕비 2기, 불망비 3기, 선정비 1기, 추모비 2기, 기념비 1기 등으로 참봉, 현감, 독립 의사 등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대산면 지역에 있는 공적비를 수집하여 춘산리에 모았다. 영광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에서 지석리로 갈라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하마비. 칠암리 하마비는 갑촌마을 도암서원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이곳은 김질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효자각도 있는 곳으로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한 징표이다. 공음에서 영광으로 가는 국도 22호선 도로변, 즉 도암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삼거리에 있다. 비석의 크기는 120×58×35㎝이고, 일반적인 월석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
고려 시대 고창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소(所)는 고려 시대 있었던 말단 행정구역의 하나로 향(鄕)·부곡(部曲)·장(莊)·처(處)와 함께 부곡제(部曲制)를 구성한다. 주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곳이다.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
고려 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자포리 일대에 설치되었던 숙박 시설. 원(院)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원은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 제공되기도 하였다. 역과 함께 설치된 시설이어서 흔히...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창의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김영년(金永年), 한계상(韓繼常) 등 92명의 의사(義士)가 흥덕면 남당마을에서 혈맹창의(血盟倡義)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자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창의비이다.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왜적에 의해 진주성...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자평(子平)이고, 호는 취은(醉隱)·해광(海狂). 평해군 황숙경(黃淑卿)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정 황처중(黃處中)이고, 할아버지는 의병장 황이후(黃以厚)이며, 아버지는 황종혁(黃宗爀)이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 증손자이다. 황세기(黃世基)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외조부가 글자를 가르쳤는데. 7세 때 시를 지어...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옥(景玉), 호는 단옹(檀翁). 증조할아버지는 산촌(山邨) 황재만(黃載萬)이고, 할아버지는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며, 아버지는 수촌 황일한이다. 황수경(黃秀瓊)은 안촌(安村) 황이후(黃以厚), 구암(龜巖) 황재중(黃載重), 만은(晩隱) 황전(黃廛), 이재 황윤석 등 누대에 걸쳐 이어 오는 문벌 가정에서 출생하여,...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실재(實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산뢰노인(山雷老人)·월송외사(越松外史). 평해군 황숙경(黃淑卿)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취은(醉隱) 황세기(黃世基)이고, 할아버지는 산촌(山邨) 황재만(黃載萬)이며, 아버지는 만은(晩隱) 황전(黃廛)이다. 황윤석(黃胤錫)은 5세...
-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온수(溫叟), 호는 서은(鋤隱). 평해군 황숙경(黃淑卿)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취은(醉隱) 황세기(黃世基)이고, 할아버지는 산촌(山邨) 황재만(黃載萬)이며, 아버지는 만은(晩隱) 황전(黃廛)이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이 형이다. 황주석(黃胄錫)은 어려서는 가학(家學)으로 글을 배웠고, 자라서는 미호(渼湖) 김원...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있는 조선 전기 석축 읍성. 흥덕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읍성으로 추정되는데,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를 위한 차원에서 실태 파악을 한 결과 개축 대상으로 분류된다. 흥덕읍성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에 따르면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이며 규모는 295보”라 기록되어 있는데, 1477년(성종 8)에 완공하였...
-
조선 전기 고창 지역의 군사 조직. 조선 전기에는 고려 이래의 군사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도평의사사, 중추원, 중방, 삼군도총제부 등 잡다한 기관이 존재하여 군사지휘권의 소재가 모호하였다. 이때에는 각 도마다 전담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있어 군사 행정 및 전투 수행을 책임졌는데, 각 도 중심의 군사 체제보다 작지만 훨씬 효과적인 군사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였다. 이에 1393년(태...
-
고려 후기 고창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흥덕현 건치 연혁조에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상질(尙質)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다. 고려에서는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장덕현(章德縣)으로 고치어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임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왕의 이름을 피혐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本百濟 上漆縣 新羅景...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 건물. 동헌은 지방관들이 정무를 집행하던 관아 건물로, 중앙에 담과 정문을 내어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 객사와 향교 등을 두었다. 정문 안에는 다시 담을 쳐서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는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이 거주하는 내아(內衙)를 두었다. 동헌이라는 명칭은 외아가 내아의 동쪽에 위치하는 데서 유래한다. 흥덕버스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