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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등명사에 얽힌 폐찰(廢刹) 설화로 동해 용궁과 관련된 이야기. 등명사는 신라 때 수다사로, 이 사찰이 없어지게 된 이유가 임금의 안질이 심하였는데 사찰의 쌀뜨물로 인해 용궁이 더럽혀져 그렇게 되었다 하여 사찰을 없앴다는 이야기이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거주하는 이상복 제보자로부터 1992년 6월 8일 채록한 이야기로 『임영지(臨瀛志)』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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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배향하고 있는 12향현의 언행과 업적을 수록한 책자. 향현사가 창건된 지 288년 되는 해인 1931년 가을에 편찬한 12향현 언행록이다. 책자에는 도면으로 화부산도와 사우도가 들어 있다. 강릉향현사는 1645년 강릉부사 강백년 등이 창건하고 조운 최치운, 수헌 최응현, 삼가 박수량, 사휴 박공달, 원정 최수성, 도경 최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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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사천면 상노동리에 있는 경덕사와 관련된 역사와 시문을 모은 책. 경덕사는 교리 곽거완(郭居完)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 곽양섭 등이 1972년 사당을 신축하고 강릉 사림에 건의하여 위패를 음력 2월 23일에 봉안하고 매년 다례를 올리고 있다. 경덕사 전경 사진과 경덕사비, 봉안식전 흑백사진을 넣었다. 경덕사에 위패를 모시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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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중심으로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들의 한시를 엮은 시집. ‘예성(蘂城)’이란 강릉을 지칭하는 말로, 『예성시고』는 강원도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346명 시인들의 7언 한시를 모으고, 조선 후기부터 1910년대까지 한시 작가들의 작품을 공모한 것이다. 『예성시고』는 구활자 한문본이며, 국판 42쪽으로 전체 분량은 많지 않으나 지역의 시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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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지역에서 1728년(영조 4)에 편찬된 사찬 읍지. 지역의 실정과 현황을 파악하여 행정자료로 활용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 현재 3권이 전해지고 있으나 1권이 누락되었다. 지역의 자연 지리적 특징과 인문 사회적 상황을 망라하고 있다. 현재 전승되는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읍지로서 이 지역의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으며, 아울러 후대에 편찬되는 읍지의 모본으로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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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왕산면에 있는 칠연정과 이성대, 노추사 건립에 관련된 시를 모은 책. 칠연정은 강릉시 왕산면 고단리 덕우산 아래 용소 언덕에 있는데,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이 은둔하였던 곳이다. 정자명은 칠연계에서 유래했으며, 1947년에 계원 49명이 건립하였다. 광복 후에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념하는 취지에서 세웠다. 계원은 고단음사(高丹吟社)의 시우(詩友)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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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 호수 주변에는 많은 누정들이 산재해 있으며 정자에는 경포 호수의 자연 풍광을 읊은 시문들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포팔경(鏡浦八景)이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읊조리는 모습, 결사체 회합의 장소로 누정을 활용한 점 등은 전통적인 강릉 지방의 누정 문화이다. -물 좋고 산 좋으니 정자 있기 좋구나!- 흔히 하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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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는 곽경(郭鏡)으로 송나라 관서 홍농(弘農) 지방의 명문가 후예였다. 1133년(고려 인종 11)에 고려에 건너와 정착하였다. 11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평장사, 문하시중 등의 관직을 거쳤고, 이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작위와 함께 포산군(苞山君)에 책봉되었다. 강릉 입향시조는 곽경의 13세손인 곽거완(郭居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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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김주원이 787년에 당시 북빈경(北濱京)이었던 강릉으로 옮겨 명주 지역 9군(郡) 25현(縣)을 관장하는 명주군왕에 책봉된 이래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세습하면서 형성되었다. 김주원은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6세손이다. 785년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신하들은 무열왕계의 직계인 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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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 박혁거세(朴爀居世)의 후손인 박순(朴純)이 1200년대에 강릉에 정착한 이후 누대에 걸쳐 세거한 박씨. 박씨는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40여 개의 본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중 박혁거세의 4세손 파사왕의 후손인 박순이 1200년대 강릉으로 이주한 이후 그 후손들이 대대를 이어 강릉 지역에 살면서 대성(大姓)을 이루었으며,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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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은 송나라 인종 때 도학과 문장에 뛰어나서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한림학사를 지냈다. 고려 문종 때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 와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을 천명하였으며 선성 및 72현의 상(像)을 국자감에 봉안케 하였다. 충렬왕 때 문양(文襄)의 시호를 받았다.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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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족, 혈연, 지연, 학연, 촌락, 동문수학, 나이(동갑) 등을 매개로 결성되는 결사체.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계라고 하면 ‘아줌마들’이 식당에서 벌이는 회식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계모임, 계가 깨졌다, 패가망신… 이런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목돈을 모으는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식이 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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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가신(家臣)·문객(門客).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원성왕]과 왕위계승을 위한 다툼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주원이 패배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김주원의 부하였던 곽길은 최대내(崔大奈)·함신(咸信)·박영(朴榮) 등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거사(擧事)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김주원이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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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청학동 소금강 지역에 있는 고대 산성. 금강산성은 해발 714m의 소금강산을 정점으로 하여 노인봉(老人峰) 쪽으로 피동 부근의 남쪽에 위치한 산성이다. 성이 위치한 이 지역은 1970년 11월 18일 명승 제1호로,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청학동 소금강’ 지역으로 금강산성은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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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금란반월회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던 정자. 금란정은 1889년경에 금란반월회원들에 의해 이건된 것으로 춘하추동 네 번 시행되는 금란반월회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다. 원래 매학정(梅鶴亭)이었던 이 정자의 명칭은 계명(契名)에 따라 금란정이라 고쳐졌다. 금란정은 금란반월회 참여 인사들의 우의 돈독을 나타내는 의미로 금란지교(金蘭之交)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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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충노. 상전인 최택(崔澤)이 세 살 때부터 정성껏 길러 성인으로 성장하게 하였고, 여러 대의 제사를 자기가 보살펴 지냈다. 가묘(家廟)가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없게 되자 따로 사당을 짓고 기와를 올려 정교하게 꾸미고 신주를 봉안하였으며, 향 피우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상전을 잘 모신 충성스러운 행동으로 어사(御使) 오명준(吳命俊)이 장계(狀啓)를 올려 정려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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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정려를 받은 김경휘(金景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김경휘[1553~1613]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났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위급하자 김경휘는 울부짖으며 하늘에 고한 뒤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리자 아버지가 7일을 더 살았다. 돌아가신 뒤에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 때 부사 조작(曺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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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임(子任), 호는 이설당(梨雪堂). 김세훈(金世勳)의 아들이고, 애일당(愛日堂) 김광철(金光轍)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덕이 높고 도량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이기(李芑)나 윤원형(尹元衡)이 세력을 떨치며 권력을 농단할 때에도 자신의 뜻을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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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세훈(金世勳)이다. 안성이씨 이석진(李碩進)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양(金讓)은 직장(直長), 둘째 김인(金訒)은 찰방(察訪), 셋째 김근(金謹) 주부(主簿), 넷째 김겸(金謙)은 별좌(別坐)였고, 사위는 심운(沈雲)과 참판을 지낸 허엽(許曄)이다. 1487년(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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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숙(正淑) 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16년 증광시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었을 때 폐모(廢毋)를 주장하던 이조좌랑 황덕부(黃德符) 등을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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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귀족이자 대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9대손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김정여(金貞茹)이다. 딸은 문성왕의 왕비이다.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소경(中原小京) 대윤(大尹),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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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김연생(金演生)[1859~1921]은 강릉김씨 김병도(金秉鍍)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성심껏 공경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맛있는 나물이나 고기가 생기면 자기의 입에 대는 일이 없이 아버지에게 드렸으며, 혹간 밖에서 별미의 음식을 보게 되면 그것을 나무 잎사귀에 싸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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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자흠(金子欽)의 신도비. 김자흠은 1444년(세종 26)에 과거에 올라 수직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김자흠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두호미(豆乎彌)에 있다. 화강암 비좌, 비신, 지붕돌[옥개석]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272.5㎝이고 비신의 폭은 82㎝이다. 1971년에는 후손들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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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왕족. 태종무열왕의 8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찬(伊湌) 김주원(金周元), 아버지는 소판(蘇判) 김종기(金宗基)이다. 김장여(金璋如)와 형제간이고, 아들은 김양(金陽)이다. 관등은 파진찬(波珍湌)에 이르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양전(金陽傳)에 의하면 김주원·김종기·김정여가 대대로 장상(將相)이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그도 시중(侍中)을 비롯한 관직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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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재상.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7대 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湌) 김주원(金周元)이고, 아우는 김헌창(金憲昌)이다. 아들은 김정여(金貞茹)·김장여(金璋如)이며, 손자로는 김양(金陽)과 김흔(金昕)이 있다. 관등은 소판(蘇判)의 관등으로서 집사부(執事部)의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김주원은 신라 하대에 무열왕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785년 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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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 왕족이며 강릉김씨의시조.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다. 원성왕은 786년(원성왕 2)에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책봉하고, 명주·익령(翼嶺)[지금의 양양]·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지금의 평해]·울진(蔚珍) 등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로 인하여 김주원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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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김상헌(金相憲)의 증손이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해주목사 안정나씨(安定羅氏)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 조선 후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을 주장한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삼연 김창흡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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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입향한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하는 홍씨(洪氏). 남양홍씨의 시조는 홍은열(洪殷悅)이고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일대에 입강한 시조는 홍대기(洪大棋),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일대의 입강시조는 홍충양(洪忠陽)이다. 홍충양은 강릉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공 홍인국(洪仁國), 홍인업(洪仁業), 홍인선(洪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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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지금의 강릉(江陵) 지역을 일컫던 지명. 강릉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313년(미천왕 14)에 하서량[河西良·阿慧羅]라고 하였다. 이후 신라에 포함되어 512년(지증왕 13)에는 하슬라주(何瑟羅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가 군주(軍主)로 파견되어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복속하였다. 639년(선덕여왕 8)에는 하슬라주로 북소경(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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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사의 옛터. 등명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풍수지리에서 입각하여 볼 때 사찰이 강릉대도호부 중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삼경(三更)에 산에 올라 붉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하여 붙여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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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金衡鎭)이 경포대 북쪽 증봉(甑峰)[시루봉] 아래에 지었던 정자. 김형진의 개인 정자였던 매학정은 19세기 초반 경에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계인들에 의해 매입되었다. 후에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7[저동 15-1], 지금의 금란정(金蘭亭) 자리로 옮겨졌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범조(丁範祖)가 쓴 「매학정기(梅鶴亭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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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강릉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던 독자적인 세력. 김주원(金周元)이 명주군왕(溟州郡王)의 봉작(封爵)과 식읍(食邑)을 기반으로 하였던 일종의 제후국(諸侯國)이다. 김주원은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하여 명주(溟州)[지금의 江陵]로 퇴거(退去)하였다. 원성왕은 786년(원성왕 2)에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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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있는 신라 하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성. 신라 하대에 원성왕과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실패한 김주원(金周元)이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퇴거한 이후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에 있다. 명주성(溟州城)은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의 북쪽 구릉(122m)을 정점으로 그 남사면의 2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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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남동에 있는 산봉우리. 모산봉은 강원도 강릉시 강남동을 품고 있는 이 마을 최고봉으로, 높이는 105m이다. 모산봉은 강릉의 안산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밥봉’이라고도 하고,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뜻의 ‘노적봉’으로도 불린다. 또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하여 ‘문필봉’으로도 불린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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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의 귀족. 아버지는 사인(思仁)이고, 아들은 김주원(金周元)이다. 부인은 연화부인(蓮花夫人) 박씨(朴氏)이다. 774년(경덕왕 3) 정월에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745년 정월 아버지 사인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직후인 5월에 천재지이(天災地異)를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무월랑은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지방의 세력가인 박씨와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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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고조는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박연(朴演), 증조는 고려 때 예문관제학참지정사(藝文館提學參知政事)를 지낸 박지계(朴之桂)이다. 조부는 박자검(朴自儉)으로 조선 세종 때에 단천군수를 지냈다.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낸 박중신(朴中信)이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강릉김씨 김예(金輗)의 딸과 광주이씨 이초지(李初之)의 딸이다. 박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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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호는 수암(修庵). 고려 때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박연(朴演)이 고조이고, 고려 때에 예문관제학참지정사(藝文館提學參知政事)를 지낸 박지계(朴之桂)가 증조이다. 할아버지는 박자검(朴自儉)으로 조선 세종 때에 단천군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박중신(朴中信)이다. 어머니는 강릉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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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시행(朴始行)의 묘비. 박시행의 자는 가원(可遠), 호는 송계당(松桂堂)이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에 올라 평창훈도(平昌訓導)를 지냈으며, 146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그리고 고성(高城)·영월(寧越)·안변(安邊) 및 금교찰방(金郊察訪)을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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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재상인 김주원(金周元)의 가신(家臣).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과 왕위계승을 위한 다툼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주원이 패배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박영은 최대나(崔大奈)·함신(咸信)·곽길(郭吉) 등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거사(擧事)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김주원이 허락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김주원이 명주(溟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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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梵日)은 사굴산문(闍堀山門)의 본산인 굴산사(屈山寺)를 창건한 신라시대 선승(禪僧), 굴산사지(屈山寺址)는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던 굴산사(崛山寺)의 옛 절터.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는 굴산사지가 있다. 창건연대와 연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범일이 입당구법(入唐求法)한 후 귀국하여 851년(문성왕 13)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청을 받아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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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동북쪽 변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군사행정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삼국시대인 658년(무열왕 5)에 하슬라(何瑟羅)[지금의 강릉] 지역이 말갈(靺鞨)과 맞닿아 있어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곳에 설치되었던 북소경(北小京)을 폐지하여 주(州)를 설치하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으며, 실직(悉直)[지금의 삼척]으로 북진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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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 등 네 국선(國仙). 인재를 선발하고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서 진흥왕대에 제정된 화랑도(花郞徒)는 15~18세 사이의 청소년으로 조직되어 보통 3년 정도 수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 진흥왕 37년에는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으며, 산천을 찾아 노닐고 즐겨 멀리 이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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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곳. 1. 문헌 수록 사찰 강릉시 소재 사찰로서 문헌에 수록된 사찰로는 굴산사(掘山寺), 보현사(普賢寺), 문수사(文殊寺), 신복사(神福寺), 등명사(燈明寺)[현 등명낙가사], 안국사(安國寺)[안곡사], 산계암(山溪菴), 염양사(艶陽寺), 청학사(靑鶴寺), 용연사(龍淵寺), 칠성암(七星菴)[현 법왕사(法王寺)],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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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지역에 거주하는 성씨. 성(姓)은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제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을 널리 쓰게 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다. 성에는 관(貫)이 있는데, 적(籍)·본(本)·본관(本貫)·관향(貫鄕)이라고도 한다. 강릉에 거주 해 온 성씨와 관련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성씨조(姓氏條)」를 통해 그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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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자(字)는 망여(望汝), 호는 월주(月洲). 부(父)는 소동명(蘇東鳴), 조부(祖父)는 소억선(蘇億善), 증조부(曾祖父)는 소건(蘇建), 장인은 권식(權植)이다.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전적을 거쳐 1663년 정언·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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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영월. 호는 북천(北川).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와 의주진관(義州鎭管) 옥강만호(玉江萬戶)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올랐으나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그리고는 재산을 모아 갑부가 되었다. 1688년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호해정(湖海亭)에서 강론할 때 김창흡에게 별도로 집 한 채를 지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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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 자는 사길(士吉), 호는 동해낭옹(東海浪翁). 삼척심씨로 시조로부터 8세손이다. 아버지는 심준(沈濬)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 아우는 심언광(沈彦光)이다. 1479년(성종 10)에 태어나 대과를 통해 관직에 출사하였으며 1556년(명종 11)에 세상을 떠났다. 1510년(중종 5)에 생원(生員)과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고,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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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강릉 출신의 문신. 본관은 삼척. 자는 사형(士炯), 호는 어촌(漁村). 강릉 지역에 세거해 온 삼척심씨의 8세손이다. 사정(司正) 심충보(沈忠甫)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심문계(沈文桂)이다. 부친은 예조좌랑을 지낸 심준(沈濬), 모친은 강릉김씨(江陵金氏)로 사직 김보연(金普淵)의 딸이다. 형은 찬성을 지낸 심언경(沈彦慶)이다. 1487년(성종 18)에 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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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지역에 있었던 초기국가. 1915년에 ‘예국토성지(濊國土城址)’라고도 불리는 강릉토성지(江陵土城址)가 발굴조사되었는데, 총연장 2,800m, 누(壘)는 0.5~12m이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편과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예국토성지’는 조선시대에 폐기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예국의 소군장(小君長)인 후(侯)가 거처하는 성읍(城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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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지역에 있었던 예국시대의 고대 성곽. 예국고성(濊國古城)은 강릉이 동예의 중심이었던 고대에 축조되었던 성곽으로 추정하며 명칭은 고대 부족국가의 명칭 ‘예(濊)’ 또는 ‘동예(東濊)’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강릉(江陵)은 본시 예(濊)의 고도(古都)로 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하였으며 고구려의 하서량(何西良)이었다가 후에 신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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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과 함헌(咸軒)을 제향하는 서원. 1777년(정조 1)에 어촌 심언광의 후손인 심상현(沈尙顯)이 어촌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주자의 영정을 계기로 하남영당을 중건하고 서원을 창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인(士人) 김형진(金衡鎭)은 그 영정(影幀)이 진상(眞像)이 아니라고 하면서 명륜당에서 재회(齋會)를 열어 반대한 후 권학준(權漢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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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왕고개의 북동쪽 구릉상에 있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왕현성에 대한 사료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근간에 간행된 자료들이 민간에 전해오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는 강릉의 남쪽 약 1리, 학산리 북서 구릉상에 있는 토루(土壘)로서 둘레 약 300간이며, 일반에서 장안성지라 칭하며, 강릉이 예국의 도읍이었을 때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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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신라의 장군. 지증왕 이래 법흥왕·진흥왕 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며, 신라 왕실의 중신이다. 일명 태종(苔宗). 내물왕의 4대손이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지금의 삼척]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이사부는 실직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지증왕 13)에는 하슬라주(何瑟羅州)[지금의 강릉]의 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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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에 있는 토성. 장안성은 강동초등학교의 북쪽 구릉(70m)에 발달된 소곡지를 둘러쌓은 것으로 전면에는 군선강 하류의 충적지가 발달되어 있다. 명주성(溟州城)과 같이 석축부 위에 얇은 토층이 덮여 있다. 성벽의 높이는 3m, 상·하부의 폭은 각각 2m, 5m이며 성주는 약 600m이다. 남벽 중앙부의 절단된 부분에는 문의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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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사당. 사당에 봉안된 영정은 1969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종가 인근에 있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봉향 중인 진영을 서울대학교 서세옥(徐細鈺) 교수가 모사한 것이다. 개성 숭양서원에서 모사한 영정은 퇴색되어 환봉(還封)하였다. 1934년 후손 정기용(鄭起鎔)이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진영(眞影)을 모사(模寫)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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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하거(荷渠)·승성자(乘成子)·석중도인(石衆道人). 조선 중기 여러 관직을 겸한 행정가이며 중앙과 지방행정에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관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상주에 도남서원을 세우는 등 예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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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의 해발 840.6m의 제왕산 정상에 있는 고대 석축 산성. 제왕산성(帝王山城)은 고려말 우왕(禑王)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피난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우왕은 왕씨가 아닌 신돈(辛旽)의 아들 신우(辛隅)로 몰리어 쫓기는 신세였으며 강릉으로 옮긴 후 한 달도 못되어 공양왕(恭讓王)이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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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志)』에는 주문진 나루에 살았던 여성 옥도가 절개를 지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옥도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나이 20세에 일찍이 남편을 잃었다. 부모가 그를 불쌍히 여겨 다른 곳으로 재혼을 시키려 하였으나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거절하였다. 머리를 삭발하고 얼굴에는 먹칠을 하는 등 스스로 추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머리가 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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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창녕조씨의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계룡(曺繼龍)이다.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德曼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강릉에 입향한 시조는 부원군파(府院君派)의 후손인 직장공(直長公) 조철(曺哲)과 창산군파(昌山君派)의 후손인 조학서(曺鶴瑞)이다. 조학서(曺鶴瑞)는 임진왜란 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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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예국의 신화적 인물로 강릉의 육성황신(肉城隍神)으로 봉안된 설화 인물. 창해역사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장량열전(張良列傳)」,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창해역사 유허기』,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등에 나타나고 있다. 창해역사는 강릉이 낳은 인물로, 신비한 탄생설화와 장사설화의 형태로 전승된다. 창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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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김형진이 강릉시에 세운 누정. 18세기 후반 구산(丘山) 연어대(鳶魚臺) 위에 건립된 정자이다. 천연정을 건립한 김형진(金衡鎭)은 향리(鄕里)에서 높은 뜻을 세우고 은둔하면서 매학정(梅鶴亭)을 건립하였다. 김형진은 강릉 지방의 거성(巨姓)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며, 누대로 재산을 상속받아 재력을 갖춘 인물로서 백련거사(白蓮居士)라 불렸다. 김형진이 지은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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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가신(家臣).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원성왕]과 왕위계승을 위한 다툼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주원이 패배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최대나(崔大奈)는 곽길(郭吉)·함신(咸信)·박영(朴榮) 등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거사(擧事)를 도모하였으나 김주원이 허락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김주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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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최수황(崔守璜)의 아들이다. 최사립(崔斯立)은 고려 충렬왕대에 문과에 합격하여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지냈으며, 글씨와 시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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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군부정랑(軍簿正郞)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좌승지에 올라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최수황은 독실한 불자(佛者)로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또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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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 송성담(宋性潭)의 문인으로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 한성부 북부령(北部令)과 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시대 관직은 알 수 없으나, 조선 개국과 함께 조선왕조에 참여하여 1394년(태조 4) 한성부 북부영을 역임하였다. 당시 한성부 중부령(中部令) 김염(金濂)과 함께 조선 건국 후 새 도읍지인 한양(漢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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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양필(良弼). 호는 성묵당(誠默堂). 시조 최흔봉(崔欣奉)의 12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군보(崔君甫), 아버지는 최릉(崔陵)이다. 강릉최씨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시조이다. 장남인 최안소(崔安沼)는 평장사(平章事) 강릉군, 차남인 최안빈(崔安瀕)은 전리판서(典理判書) 예성군(芮城君), 삼남(三男) 최안언(崔安彦)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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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자점(崔自霑)[1434~1508]의 묘비. 최자점의 자는 자흡(子洽), 호는 괴헌(槐軒), 부마(駙馬)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崔沇)의 아들로 1465년(세조 11)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 고성군수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교1동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산록에 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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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세계(世系)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자 대에 이르러 연안차씨와 인척관계를 이루면서 집안이 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증손자 대부터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다. 고려시대의 활동사항은 알 수 없으나 1392년(태조 1) 조선 왕조 창업과 더불어 실시된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까지 올랐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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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 강릉최씨 충무공파의 시조인 경흥 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의 16세손으로 최한주(崔漢柱)의 동생 제학공(提學公) 최개(崔愷)의 증손이다. 최천유의 두 아들인 최점(崔店)과 최암(崔庵)이 1423년(세종 5)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후 많은 자손들이 조선시대의 관리로 등용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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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칠봉산 산정에 위치한 고대 산성. 칠봉산성에 대해서는 역대 지리지나 향토지에는 기록들이 보이지 않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그 기록이 보이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릉의 서쪽 약 2리, 구산리 남쪽 약 1㎞의 칠봉산에 있는 석성으로 주회 약 850간(間)이고, 대부분 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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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재지 씨족집단의 성씨에 대한 총칭. 강릉은 토성들의 재지적 기반이 강했던 지역이다. 토성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향리출신으로서 여말선초에는 신흥사대부를 성장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 초기 강릉 지방 성씨에 대해 “토성이 여섯이니 김(金)·최(崔)·박(朴)·곽(郭)·함(咸)·왕(王)이요, 사성(賜姓)이 하나이니 옥(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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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지방행정구역. 삼국통일 직후에 완성된 9주(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방에 해당된다. 주치(州治)는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지방행정제도를 9주·5소경(小京)으로 새롭게 편성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주에는 총관(摠管 : 후에 都督으로 개칭), 군에는 군수(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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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金周元)의 가신(家臣)·문객(門客).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과 왕위계승을 위한 다툼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주원이 패배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함신은 최대나(崔大奈)·곽길(郭吉)·박영(朴榮) 등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 거사(擧事)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김주원이 허락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김주원이 명주(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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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 발생한 강릉 지역에서의 좌, 우익 간의 이념 갈등. -사상이 낳은 정치적 혼란- 해방 직후 강릉 지역 좌우익의 갈등-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으나 강릉 지역의 일본군은 계속 무장한 채로 주둔하고 있었다. 2주일이 지나도록 미군은 오지 않았고, 하루 바삐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의지가 강했던 시민들은 38선 이북 양양에 이미 주둔해 있던 소련군에게 일본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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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는 사당. 향현사는 강릉 지방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사람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을 삼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행하는 곳으로, 최치운(崔致雲) 등 6인을 배향하고 있다. 강릉 향현사 건립은 이 지역 오봉서원이나 송담서원의 경우와 같이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관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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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곤(鄭鵾)의 처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열녀각(烈女閣). 집에 큰불이 났을 때 시어머니는 미처 집에서 피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최씨는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시어머니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부인은 시어머니를 껴안은 채 함께 죽었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신은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려 손에 낀 가락지로 식별하였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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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복(南漢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 남한복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잃은 통한의 서러움에 복받치곤 하였다. 남한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부를 줄 알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천지간(天地間)의 죄인이라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남한복은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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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순(徐夏淳)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서하순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간병에 피를 빨고 대변 맛을 보면서 지성으로 효행을 실천하였다. 추운 겨울에도 어머니가 생채를 먹고 싶어 하면 눈 속을 헤치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어 봉양하였다. 임종을 당하여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서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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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기원(崔起元)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사석(師席)이었으며 강릉 향현사에 배향된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겼다. 최기원이 8살 때 부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소생케 하고, 이러한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1608년(선조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