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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에 간행된, 충청북도 음성군의 운곡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운곡서원 중건 기록문. 1990년 12월 14일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운곡서원은,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로 있던 정구(鄭逑)[1543~1620]가 이미 있던 서원을 새로 확장한 것으로, 1661년(현종 2)에 정구를 배향하고 서원 이름을 운곡서원(雲谷書院)이라 하였다. 정구는 조선 중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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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수절한 열녀. 박호식(朴鎬植)의 딸이며 본관은 밀양이고 죽산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남편 강진영(姜鎭榮)이 일찍 병을 얻으니 약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여 1년을 연명하게 했으나 끝내 죽었다. 이때 나이 스무 살인 박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어린 아들이 있어 죽지 못하고 대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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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사창1리에 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재실(齋室). 경모재는 담장을 콘크리트로 둘렀고, 솟을대문 좌우에는 2칸씩 행랑을 달았다. 입구에는 1979년 민영규(閔泳奎)가 쓴 ‘황려문(黃驪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 양식의 재실이 있다. 앞의 1칸은 툇간으로 ‘경모재’란 편액을 달았다. 재실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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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효자 고용진의 정려문.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의 네 개 면은 홍살로 막고 지붕 양면은 풍벽을 달았다. 초석은 팔각고주형(八角高柱形)으로 그 위에 둥근 나무 기둥을 세웠다. 효자문 안에는 ‘설성거사하산고용진효자려포정효자문병오삼월일보건사회부장관오원선서(雪城居士霞山高庸鎭孝子閭褒旌孝子門丙午三月日保健社會部長官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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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문암3리에 있는 곡산연문의 열녀 순흥안씨의 정려각. 순흥안씨는 연진행(延震行)의 부인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정절을 지켜 1796년(정조 20) 정려가 내려졌다. 1796년(정조 20) 정려가 내려졌을 때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명암동에 열녀각이 세워졌으나, 1984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다. 열녀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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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 구덕자의 처 조씨는 출가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를 평생 봉양하니 음성향교(陰城鄕校)에서 표창하였다. 사림에서 효열비(孝烈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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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자. 권국화는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한 번은 아버지의 병에 백약이 무효하여 탄식하다가 뒷산에 올라가니 뜻밖에 말 한 필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말이 꼬리를 치면서 어서 타라는 것 같아서 성큼 올라탔더니, 단숨에 장호원(長湖阮)의 약방 앞에 멈추었다. 말에서 내려 약방에 들어가 병 증세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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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권국화의 정려문. 권국화에 대한 기록으로는 『순조실록(純祖實錄)』에 1831년(순조 31) “유생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증직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무신년(1728) 당시 집에 역도가 난입하자 가로막으며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어머니에게는 해를 끼치게 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니 물러났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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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신 권길의 정려문. 권길(權吉)[1550~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응선(應善)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1590년(선조 23) 경상도 군위현감, 1592년 상주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이일(李鎰)과 함께 상주성에서 왜적을 상대하여 싸웠다. 왜적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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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시(性施), 호(號)는 농은(農隱), 증조부는 권종석(權鍾奭), 아버지는 권영목(權寧穆)이며, 어머니는 수원백씨(水原白氏)이다. 13세에 정덕영(鄭德永)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권종석의 유훈을 받아 남다르게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 모친 수원백씨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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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조선 초기 문신 권제를 봉안한 사묘. 권제 부조묘는 권제(權踶)[1387~1445]를 봉안한 사당이다. 문경(文景)은 권제의 시호이다. 권제의 자는 중의(仲義),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안동이며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1445년(세종 27) 정인지,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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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진주(晋州). 권종원(權鐘源)의 처이다. 권종원의 처 진주정씨는 시부모님을 봉양함에 효성을 다하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조선 후기 고종 때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열녀 정문(旌門)을 세웠다. 현판에는 ‘열녀학생권종원처유인진주정씨지문(烈女學生權鐘源妻孺人晋州鄭氏之門)’이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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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 신후재는 조선 숙종 때의 사람으로, 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좌부승지, 안변부사, 우승지, 좌승지, 진하겸사은부사, 승정원도승지,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 3월 갑술옥사 때 여주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 4월에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오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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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김환유(金煥維)의 아들이다. 김기화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글방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놀랍고 마음이 이상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 호랑이가 나타나 이상한 물건을 놓고 사라졌다. 호랑이가 놓고 간 물건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위독하여 가지고 온 물건을 달여 입에 흘려 넣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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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김상열의 차남으로 백부(伯父)인 김상우(金商禹)에게 입양되었다. 김달제는 백부인 양부모와 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동시에, 형이 일찍 죽고 고독하게 사는 형수 또한 어머니같이 극진히 대하였다. 그러던 중 형수가 우연히 병이나자 천지신명께 기도하니 형이 꿈속에 나타나 고생함을 위로하고 약을 알려주었다. 알려준 약제로 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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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孝婦). 본관은 평강(平康). 전규면(全奎冕)의 딸이며, 김동인(金東仁)의 처이다. 김동인의 처 평강전씨는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정숙하고 심성이 인자하여 부모님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다. 또 언행이 바르고, 비록 부잣집에서 성장하였으나 사치함을 모르고 검소하였다. 17세에 김동인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늘 살림이 가난하여 양식 걱정을 면치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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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김명제(金明濟)의 효행비. 김명제 효행비(金明濟 孝行碑)는 1963년에 세워졌으나 김명제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총 높이 165㎝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12㎝, 앞면 40㎝, 측면 16㎝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38㎝, 앞면 70㎝, 측면 46㎝이며, 방부(方趺)는 높이 15㎝,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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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유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노(聖魯), 호는 국사(菊史).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김문수(金文秀)이다. 김사구(金思逑)은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에게서 사사(師事)하였으며, 나이 70세에 노모가 살아 계셔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산이 높고 험준한데도 팔순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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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석룡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과 생극면 일부가 음죽현(陰竹縣)에 속하였을 때 상율면 본율동에 살던 양인(良人)이다. 김석룡은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김석룡의 부인 장씨 또한 시아버지의 병을 13년간이나 지극하게 간호하였다. 음죽현의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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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김석룡 처 장씨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던 양인(良人) 김석룡의 처로, 젖을 짜서 병든 시아버지를 시중하는 등 13년간이나 효행을 행하였다. 김석룡 또한 아버지 병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유림(儒林)들이 장씨의 효행을 진정하여 장계(狀啓)를 올리니 1720년(숙종 46) 5월에 복호(復戶)를 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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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우봉(牛峯). 이호건(李鎬建)의 딸이고, 김석제(金錫濟)의 처이다. 16세에 김석제에게 시집가서 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결혼한 지 8개월 만인 17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후에 부모님들이 청춘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고자 하였다. 시부모님의 만류에 뜻을 이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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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선은 평소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음성현(陰城縣)의 유림들이 그의 효행을 진정하여 관아에서 이 일을 기록하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통덕랑(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되었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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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성주(星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휘(李揮)의 딸이고, 김선경(金善慶)의 처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있던 남편 김선경은 싸움터로 나가고 자녀들만 데리고 집에 있었다. 충주 전투에서 이긴 왜적이 음성 지방까지 들어오자, 부인은 생극면 차곡리에 있는 수리산(愁離山)으로 피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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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여균(汝均), 호(號)는 정암(精菴).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김순은 아버지 상을 당하자 마을 뒷산에 모시고 추운 겨울에도 매일 시묘를 하여 손가락이 얼어서 일곱 개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칠지효(七指孝)라 불렀다. 그가 아버지 묘에서 시묘하는데 밤에는 큰 범이 와서 같이 지냈으며, 낮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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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김순의 정려문. 김순(金石+舜)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서 태어났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을 뒷산에 모시고 추운 겨울에도 시묘를 하였다. 시묘를 하는 중에 손가락에 동상을 입어 7개가 떨어져 나가 마을 사람들이 ‘칠지효(七指孝)’라 불렀다. 밤에는 호랑이가 와서 같이 지냈고, 낮에는 산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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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설암(雪巖). 김득수(金得洙)의 아들이다. 김예숙은 어느 날 김승선(金承宣)의 집에서 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놀랍고 온몸에 땀이 나서 주위 사람들의 만류함을 무릅쓰고 급히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온 집안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곧 손가락을 잘라 주혈(柱血)하자, 어머니는 회생하여 2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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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김용대(金容大)의 처 의성김씨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김상빈(金相彬)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결혼하여 음성군 생극면에서 살았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23세 때 남편이 병환으로 사망한 뒤에도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5대 독자인 당시 두 살의 아들을 키워냈다. 노환의 시어머니에게 도리를 다하여 간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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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정약임(丁若臨)이다. 정씨의 정확한 거주지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에 대한 정절과 시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16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지혈(指血)하여 3일을 연명케 하였으나 끝내 죽었다. 이에 남편을 따라 같이 죽으려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 때문에 그리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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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진(聲振), 호(號)는 우헌(愚軒). 김낙영(金樂英)의 아들이다. 김정훈의 어머니인 계모 박씨(朴氏)는 성격이 엄하였으며 힘을 기울여 그를 공직(供職)하게 하였다. 그 결과 김정훈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추운 겨울 어머니가 병이 나자 그는 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얻기 어려운 약초를 구하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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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김종립의 정려각. 김종립(金宗立)은 진천 사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군사를 일으키자 진천현의 초관으로 적과 싸우다 험천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진천현감 이충운(李翀雲)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를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는 재주가 달랐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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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전의(全義). 이군순(李郡淳)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자 70세가 넘은 시어머니와 8개월 된 어린 자녀를 정성으로 보살폈다. 낮에는 김을 매고 밤에는 길쌈을 하면서 일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길러서 가문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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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주봉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김창식의 효자문. 김창식은 어린 나이에 모친이 병이 나자 명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으며, 5년 후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10살 때 모친이 죽자 매일 닭이 우는 시간에 5리나 떨어져 있는 묘소로 가 참배하였다. 무릎과 손으로 짚었던 자리는 떼가 죽었을 정도라고 한다. 성묘길 옆의 벗나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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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참봉(參奉) 김예숙(金禮淑)의 차남이다. 김태섭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 3일간을 더 살게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시묘(侍墓)를 할 때 밤마다 범이 와서 호위하고 다른 짐승이 오면 소리내어 꾸짖어, 비록 어두운 밤중이라도 범의 안광(眼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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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淸州). 고형진(高亨鎭)의 딸이고, 남석기(南錫驥)의 처이다. 고씨는 나이 17세에 시집을 갔으나 수개월 만에 남편이 병이 나고 시어머니도 병이 들었다. 손가락을 끊어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차례로 피를 먹여 소생하게 하였다. 얼마 후 남편이 사망하자 장도를 품고 평생을 수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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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남연년의 정려각. 1728년 무신난(戊申亂, 이인좌의 난) 때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인 남연년(南延年)[1653~1728]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남연년의 본관은 의령, 자는 수백(壽伯)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727년(영조 3)에 청주영장이 되어 토포사를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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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후기 단양장씨 일문의 효행과 정절을 기리는 정려각.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 삼생이마을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단양장씨 일문의 정려각으로 장석영(張錫永)의 효행과 장택한(張宅漢)의 처 장수황씨(長水黃氏) 및 장동엽(張東曄)의 처 청주이씨(淸州李氏)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장수황씨는 1856년(철종 7) 만동묘(萬東廟)에서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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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1리에 있는 초계정씨의 사우. 도원사는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사우(祠宇)로, 초계정씨는 정배걸(鄭倍傑)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배걸은 초계성산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선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정배걸은 101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예부상서,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門下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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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초계정씨의 중시조를 봉안한 사우. 도장사에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죽계(竹溪) 정창(鄭昌), 우헌(愚軒) 정덕기(鄭德麒), 정국주(鄭國柱),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로(鄭國櫓), 정국빈(鄭國彬) 등 여덟 사람을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中丁)에 제사하고 있다. 도장사는 조선 숙종조에 창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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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도장사에서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의례. 박팽년(朴彭年)·정창(鄭昌)·정덕기(鄭德麒)·정국주(鄭國柱)·정국추(鄭國樞)·정국량(鄭國樑)·정국로(鄭國櫓)·정국빈(鄭國彬) 등을 모셔놓고 매년 봄(음력 3월 중정일)과 가을(음력 9월 중정일)에 음성의 유림과 초계정씨 종중에서 제향하고 있다. 도장사는 초계정씨의 중시조를 봉안한 사당으로 조선 숙종조에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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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번지에 있는 3성(공자, 주자와 안향) 및 9현을 봉안한 사우. 공자, 주자, 안향을 비롯하여 국재(菊齋) 권부(權溥), 역동(易東) 우탁(禹倬), 동암(東庵) 이진(李瑱),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덕재(德齋) 신천(辛蕆), 노당(露堂) 추적(秋適), 근재(謹齋) 안축(安軸), 경재(敬齋) 안보(安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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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도통사에서 제향하는 의례. 공자(孔子)·주자(朱子)·안향(安珦)·권부·우탁·이진·백이정·이조년·신천·추적·안축·안보 등을 모셔놓고 매년 봄(음력 2월 말정일)과 가을(음력 8월 말정일)에 음성의 유림들이 제향하고 있다. 도통사는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건립되었던 사당이었는데 1980년대 군사시설 관계로 철거되었다가 1995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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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권근을 봉안한 사묘.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1352~1409]은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이다. 고려 말엽의 정승 권박의 증손이며 검교정승 권희의 아들이다. 1409년(태종 9)에 58세로 별세하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은 책으로 『입학도설(入學圖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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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군삼(君三), 호(號)는 송암(松巖). 첨정 민휘정(閔鰴鄭)의 아들이다. 민동량은 5세 때 글을 깨우쳐 주위에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으며 5~6세 때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병을 간호하였다. 10세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하늘에 기도하였고, 15세 때인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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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민동량의 정려각. 민동량은 본관은 여흥, 자는 군삼, 호는 송암이다. 1806년(순조 6)에 정려와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7, 8세 때부터 부모가 병이 나면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으며 좋은 약이라면 가리지 않고 구하여 썼다. 부모가 아프자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피를 내어 먹이려고 왼손 네 손가락을 잘랐으며, 대변을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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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실(元實), 호는 한송(寒松). 민휘계(閔徽繼)의 5세손이다. 민정현(閔鼎顯)[1783~1812]은 3세에 글을 읽고 10세에 경서를 통달하였으며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七長寺)에서 노승과 같이 경서(經書)와 시부(詩賦)를 토론하는데 막힘이 없어 30여 명의 중들이 경탄하였다. 학식이 탁월하여 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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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된섬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민해준의 효행은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하고 있다. 민해준이 어머니와 같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소낙비를 만났는데, 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바위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곧 굴러 내릴 위험에 있었다. 이 때 민해준은 어머니를 밖으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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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조선시대 민해준의 효자각. 민해준이 어머니와 함께 밭에서 김을 매다가 소낙비를 만났다. 이때 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무너지려 하자 어머니를 밖으로 밀어내곤 자신은 바위에 깔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 같은 민해준의 효행을 기려 훗날 유림과 동리에서 효자각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효자민해준지려(孝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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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미윤(美胤), 호(號)는 호암(湖巖). 민홍로(閔弘魯)의 아들이다. 민휘계는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밤에는 경전(經典)을 읽으면서 생활하니 몸에 걸칠 옷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에서 자고 같이 글을 읽으면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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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민휘계와 민정현의 정려문. 민휘계·민정현 효자각은 민씨 가문의 두 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이다. 민휘계는 가난하였으나 글을 좋아하고 주경야독을 했다. 학행(學行)이 좋고 부모에 효심이 지극했다. 1808년(순조 8)에 감영(監營)에서 상계(上啓)하자 왕이 특명을 내려 민휘계의 행적을 간행토록 하였다. 이 책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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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박도연(朴道淵)의 처(妻)이다. 교생(校生) 박도연의 처 이씨(李氏)는 시부모 공양에 극진하여 효부로서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해 봄에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박도연의 집까지 옮겨 붙었다. 때마침 농사철이라 마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불이 난 것을 본 이씨는 사당(祠堂)에 들어가 우선 신주(神主)를 가져오고, 이어서 방에 들어가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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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강지(綱之), 호는 유서(柳墅). 박경세(朴慶世)의 아들로 박응한(朴應漢)에게 입양되었다. 박래복은 양부모를 극진히 섬겨 충주 유림에 의해 효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효가문에 이름이 올라 아버지 박응한, 조부 박준흠, 증조부 박정규, 고조부 박진구, 현조부 박호원, 아들 박지혁까지 음성 인물에 등재되었다. 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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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흥(長興). 고려시대 대사헌(大司憲) 임헌의 딸이며, 박순(朴淳)의 처이다. 1402년(태종 2) 함흥차사로 함주(咸州)로 내려간 남편 박순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임씨의 묘지를 하사(下賜)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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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음성박씨 선조 박순의 사당. 박순 충신문은 박순 사당이라고도 하며, 2002년 5월 18일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선조인 박순은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에게 갔던 박순은 조선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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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의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성원(聲元), 호(號)는 만오(晩悟). 효자 박정규(朴廷珪)의 손자이고, 박준흠(朴俊欽)의 아들이다. 박응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염병에 걸리자 하늘에 빌며 정성을 다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잉어를 얻어 봉양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 또 어머니의 비병(痹病)을 침으로 고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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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문화유씨 유철모(柳喆謨)의 딸로, 충민공 박순의 12세 손인 박장흠(朴長欽)과 혼인하였다. 아들이 없어 박양흠(朴亮欽)의 둘째 아들 박성한(朴聲漢)이 입계하였다. 박성한이 문행이 있어 벼슬이 헌납에 이르렀다. 문화유씨는 열행(烈行)이 있어 1794년(정조 18) 정려가 내려졌다.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세워졌던 정려문은 소실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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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이락(二樂). 충민공 박순(朴淳)의 11세손이고, 효자 박호원(朴浩遠)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박진구(朴震龜)의 아들이다. 박정규는 후제 김간(金幹)에게 배우고, 1721년(경종 1)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지내다가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이르렀다. 어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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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인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천경(天卿), 호(號)는 면헌(勉軒). 충민공(忠民公) 박순(朴淳)의 8대손이다. 박호원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이다. 문예(文藝)에 뛰어나고 필법이 정교했다. 1618년(광해군 16)에 창경궁이 중건(重建)되자 문 위에 거는 편액(扁額)을 썼다. 광해군은 이 글씨를 보고 가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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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박정규와 박호원의 정려문. 박호원과 박정규는 충민공 박순(朴淳)의 후예이며, 박정규는 박호원의 손자이다. 박호원의 효자문은 1725년(영조 1)에 하사되었으며, 박정규의 효자문은 1743년(영조 19)에 하사되었다. 1689년(숙종 15)에는 충민공의 부조묘인 박순 사당, 박순 충신문, 박순의 처 장흥임씨의 열녀문을 이곳에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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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지(聖之), 호는 고산(孤山). 아버지는 반정익(潘廷翼)이다. 1626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아버지가 아프자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먹였다. 재주와 인품이 훌륭하고 문장이 뛰어나 향리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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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가 수학하던 곳. 백련서재는 조선 숙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서암 신후재(申厚載)[1636~1699]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던 장소이다. 신후재는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석방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서재(書齋) 앞 연못에 백련 꽃이 있는데, 이는 신후재가 청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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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정규영·정인상 부자와 현풍곽씨의 효열비를 보관한 비각. 1969년 성균관 유림에서 추천하여 1970년과 1978년에 세워졌다. 비각은 전면 1칸 반,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 네 개 면을 홍살로 막았다. 둘레에는 적색 벽돌담을 쌓고 앞면에 철제 대문이 세워져 있다. 비각의 앞 처마에는 한자로 ‘상모각(常慕閣)’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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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있는 안동김씨 문중의 입향조 김진강(金震綱)의 사당. 사당은 문중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보통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건축된다. 상평리 숭모재는 1922년 안동김씨 문중에서 음성으로의 입향조인 김진강의 제사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노은면을 지나 성황고개를 넘어서면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월정리가 되고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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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향사 및 교육을 위해 충청북도 음성군에 설치되었던 민간 기관. 조선왕조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사림들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확립하여 재지 사족층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으며,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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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안동(安東). 김상하(金相夏)의 딸이고, 서효순(徐孝淳) 처이다. 남편 서효순이 일찍 죽자 부인 안동김씨는 장례를 잘 치른 후 시부모를 위로하고 저녁에 침실로 들어가 목매달아 죽었다. 모두가 경탄하였으며 열녀로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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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1리에 있는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재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대소면으로 가는 국도 52호선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최성미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1㎞쯤 들어가면 소탄 새마을회관이 보이는데 그 옆에 숭모재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현대식 시멘트 청기와를 올렸다. 목조건물에 벽돌로 벽을 쌓았으며 주위에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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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안동(安東). 성인하(成仁夏)의 처이다. 남편 성인하가 죽자 정절(貞節)을 지켰다.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높이 210㎝의 비석을 세우고, 전면에 ‘성인하부인권씨정열비(成仁夏夫人權氏貞烈碑)’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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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있는 조선시대 성인하 처 안동권씨가 정절을 지킨 것을 기리는 비. 성인하 처 안동권씨 정렬비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청주로 가는 국도 36호선 변 원남면 하당리에서 왼쪽 하당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면 하당초등학교가 나오고 이 학교의 교정 끝부분에 있다. 비석은 방형(方形)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대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시멘트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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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선경의 처 성주이씨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으로 가는 국도 33호선 변인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2리에서 오른쪽 양재 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300m쯤 가면 왼편으로 열녀각이 보인다. 성주이씨는 인문관 이휘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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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부모가 중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소생시키고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성필창의 효행이 알려져 복호(復戶)되어 조세·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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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 때의 효자. 본관은 진천(鎭川).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7세손이며, 평리(評理) 송소(宋玿)의 아들이다. 송광도는 벼슬이 정용랑장(精勇郞將)이었으며, 부모에 극진한 효성이 명황(明皇)에게까지 알려졌다. 송광도의 처(妻) 허씨(許氏) 또한 효부(孝婦)로 이름이 났다. 83세의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병이 나자 변(便)을 맛보며 증상을 살피면서 간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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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두성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 송광도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조선은 유교를 국교시하였기에 충(忠)과 효(孝)와 열(烈)을 만인의 덕목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를 행하는 데 귀감이 되는 이를 뽑아 기리기 위해 동리마다 충신이나 효자·효부, 열녀를 기리는 비나 비각을 많이 건립하였다. 특히 충청북도 음성군 지역은 다른 문화재보다 유교기념물이 많은 것이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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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살았던 효부. 본관은 밀양(密陽). 박씨는 계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세에 출가하였으나 26세에 남편을 잃었다. 가난한 집의 과부가 되어 많은 시집 식구를 봉양하느라 크게 고생하였다. 친정에서는 개가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유복 아이를 길러서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뜻에 따라 어려움을 참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송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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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에 있는 조선시대 송영학의 처 밀양박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효열비는 유교를 덕목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많이 세워졌는데 충신·열사와 더불어 효자·효부를 기리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당사자와 관련된 장소에 세웠다. 박씨 부인은 원래 계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세에 송영학에게 출가하였으나 26세 때에 남편을 잃고 빈한한 집의 과부로 많은 시집 식구들을 봉양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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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 본관은 하음(河陰). 죽계(竹溪) 봉시중(奉時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봉일한(奉一漢)이다. 30살 때 남편을 잃고 83세의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섬겼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便)을 맛보며 증상을 살피고 단을 쌓고 하늘에 7일간 기도하니, 시어머니의 꿈에 효부의 정성으로 10년은 더 산다고 하였다. 과연 시어머니가 93세까지 살다가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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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약현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이경립의 처 순흥안씨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각. 충청북도 음성읍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쪽으로 약 1㎞쯤 떨어진 충청북도 음성읍 평곡리 약물재마을 북쪽에 수정산이 있는데, 이 수정산 입구에 열녀각이 있다. 순흥안씨는 성균진사 이경립의 처이다. 이경립이 천연두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껏 수발을 다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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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청주고씨(淸州高氏)의 사우. 사우는 문중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보통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건축된다. 숭덕사는 1986년 청주고씨 문중에서 제사를 위해 마련한 사우이다.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국도 36호선를 따라 충청북도 청주시 방면으로 가다가 한금령휴게소를 지나 2㎞쯤 내려가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이른다. 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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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이자 열녀. 이광빈(李光彬)의 딸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으나 재실(齋室)을 정성으로 지키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폈으며, 조카로 하여금 가문을 잇게 하여 효부·열녀로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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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이장(而張). 아버지는 신상민(申尙閔)이고, 아들은 신명상(申命相)이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위하여 낚시하고 약초를 캐어 지성으로 병간호를 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아버지 병환 때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하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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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유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조선은 유교를 국교시하였기에 효(孝)와 충(忠)과 열(烈)을 중히 여겨 정려를 특히 많이 세웠다. 신유의 효자각도 근방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신유가 살던 마을에 세운 것이다. 신유의 효자각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충북선 소이역의 앞쪽이며 한라중공업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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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있는 함종어씨(咸從魚氏)의 재실. 사당, 사묘, 사우, 재실 등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명칭으로 문중의 선조들에게 제를 지내기 위한 장소이다. 쌍충재는 어재연(魚在淵)·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두 형제의 묘소 앞에 세웠다. 쌍충재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1리 최성미의 성본리 토성 안에 위치한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에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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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에 있는 안숙공 권준(權蹲)[1405~1459]의 사우. 부조묘는 사당·사우와 같이 문중의 선대 조상 가운데 중요하게 기억하거나 기릴 만한 분을 대수에 상관없이 영원히 제향하라는 의미에서 건립하는 것이다. 권근 삼대묘가 있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초입에 위치하며, 안양공 권반의 부조묘 오른쪽에 있다. 권준 사당은 본래 현재의 위치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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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안양공 권반(權攀)[1405~1459]의 사우. 부조묘는 사당·사우와 같이 문중의 선대 조상 가운데 중요하게 기억하거나 기릴 만한 분을 대수에 상관없이 영원히 제향하라는 의미에서 건립한다. 부조묘라기보다는 사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권근 삼대묘가 있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초입에 위치하며, 안숙공 권준의 부조묘 왼쪽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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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선비 안중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비. 조선시대는 유교 국가로 충과 효를 강조하며 귀감이 되는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기리기 위한 흔적을 많이 남겼는데, 이것이 충신각, 열녀각, 효자비 등으로 남아 있다. 안중성은 조선 영조 때의 선비이며 효자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시향(時鄕), 호는 화산처사(花山處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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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이해상(李海相)이다. 24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입에 피를 흘려 넣기 위하여 손가락을 자르려 하였으나 칼이 없어 돌로 찍고 이로 물어뜯어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키고 3개월을 더 살게 하였다. 어린 아들을 잘 길러서 집안을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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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열녀란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한 부녀자로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충효열 관념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형태로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체계화되면서 열녀는 사회적인 중요성을 강화해갔다.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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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 있는 순창조씨(淳昌趙氏) 문중의 사당. 사당은 문중 조상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순창조씨 문중에서 81위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1989년에 세웠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516번 도로를 따라 소이면 쪽으로 가다 보면 음성천과 석인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석인교 100m 못 미쳐 좌측 충도리 마을로 들어가면 충도1리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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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효자 오창묵의 비. 오창묵(吳昶黙)은 병화가 있었으나 어머니를 잘 모셔 관에서 포상을 하였다. 이 사실을 돌에 새겨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1935년 국도 3호선 변에 효자비를 세웠다. 효자비는 유래를 새긴 오석 위에 거북 대좌를 앉히고 비석을 세웠다. 효자비 앞면에 ‘오공창묵효자비(吳公昶黙孝子碑)’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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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이기홍을 봉안한 사당. 옥산사는 주자(朱子), 송시열과 함께 직재(直齋) 이기홍(李其洪)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사당이다. 옥산사는 본래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을 1908년에 복원한 사당이다. 문산서원이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자 40여 년 뒤인 1908년에 사액서원의 철폐를 애석하게 생각한 유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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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갑리에 있는 옥산사에서 제향하는 의례. 주자(朱子)·송시열(宋時烈)·이기홍(李箕洪) 등을 모시고 매년 봄(음력 3월 15일)과 가을(음력 9월 15일)에 음성의 유림과 전주이씨 봉산군파 종회에서 주관하여 제향하고 있다. 옥산사는 본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이었는데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08년에 음성의 유림과 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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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평곡리 용담연못에 있는 바위에 새겨 넣은 글자. 용담연못 각자는 용담연못에서 산 쪽에 있는 바위에 표면을 다듬어 전서체(篆書體)로 써넣은 글자이다. 누가 새겨 넣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위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위에 전서체 글자가 횡으로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각 글자의 크기는 각각 가로 84㎝, 세로 8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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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아버지는 중추부사(中樞府使) 우은정(禹殷鼎)이다. 홀어머니 경주이씨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과부가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고,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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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운곡서원에서 제향하는 의례. 주희(朱熹)[1130~1200]와 정구(鄭逑)[1543~1620]를 배향하고 매년 봄(음력 2월 중정일)과 가을(음력 8월 중정일)에 음성 지역 유림들이 제향하고 있다. 1602년(선조 35)에 주희를 배향하고자 백운서원을 창설하였고, 1661년(현종 2)에 정구를 배향하면서 운곡서원이라 하였으며 그 뒤 1676년(숙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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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운곡서원 입구에 세워진 조선시대 하마비. 하마비는 그 앞을 지날 때에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내용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주로 관아(官衙),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 등의 입구나 능묘(陵墓) 앞에 세워져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음성군에는 운곡서원(雲谷書院) 외 음성향교(陰城鄕校), 지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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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우리나라에 유교가 언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유교 경전의 교육과 사서(史書) 편찬 등이 이루어졌음을 볼 때 이때 이미 유교가 문화적 요소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시대에도 국가 이념과 체제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이념은 상당히 중요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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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에 있는 진주강씨 문중의 재실. 육선재는 비교적 근래에 제향을 위해 지은 진주강씨(晋州姜氏) 문중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앞 1칸은 툇간이다. 재실에는 ‘육선재(陸仙齋)’라고 판각한 편액을 걸었다. 중앙에 정문을 달고 ‘정효문(旌孝門)’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외곽은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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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윤기손·윤기진 형제는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원하자 형제가 꿩을 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구할 수 없어 탄식하며 쏘다니던 중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차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는 이 꿩을 주어다가 어머니에게 고아 드렸는데, 이것을 먹고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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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문(旌門). 윤기손·윤기진 형제 효자문은 윤기손(尹起巽)·윤기진(尹起震)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효자문으로, 형제의 효자문과 윤득성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김씨 열녀문이 같이 있다. 칠원윤문 효열각(漆原尹門 孝烈閣) 또는 칠원윤씨 효열각(漆原尹氏 孝烈閣)이고도 한다. 윤기손·윤기진 형제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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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자 윤기진과 형 윤기손(尹起巽)은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구할 길이 없자 탄식하며 울고 있는데,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물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가 그 꿩을 고아 드리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어머니가 위독하자 형은 세 손가락을, 윤기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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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김언희(金彦熙)의 딸로, 19세에 남편 윤득성(尹得聖)이 병을 얻자 정성껏 간호하였다.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신명께 남편 대신 죽기를 빌었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상을 마친 후 독약을 먹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복자로 딸을 낳은 후 음식에 입을 대지 않다가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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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년 주희를 제향하기 위해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건립된 서원. 운곡서원(雲谷書院)은 1602년 충주목사 정구(鄭逑)[1543~1620]가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憙)[1130~1200]를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삼성면 용성리의 서원말 북쪽 산의 능선이 끝나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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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동안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온 유교는 인(仁)으로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며 정치학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조선왕조로 들어와 국가 지배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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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주응동이 주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건립한 사당. 태교사의 설립자인 주응동(朱應東)의 본관은 신안(新安)이고 자는 광여(光汝)이다. 음성 출신으로, 주희(朱憙)[1130~1200]의 2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에 주응동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여지(金汝知)[1370~1425]가 명에서 가져온 주희의 영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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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박씨 문중의 충효열각. 음성박문 충효열각은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유명한 박순(朴淳)[?~1402]의 충절과 박순의 처 장흥임씨(長興任氏)[?~1402]의 열행, 박호원(朴浩遠)[1559~1627]과 박정규(朴廷珪)[1677~1724]의 효행 등 조선시대 음성박씨(陰城朴氏) 4인의 충효열을 한자리에서 기리기 위하여 조선 후기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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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 기관. 조선시대 음성 지역의 지방교육을 담당했던 음성향교는 1560년(명종 14) 지금의 음성읍 석인리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4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성전 정위에는 공자(孔子)를 모시고, 양편에는 4성(四聖), 곧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를 배향하고, 동벽과 서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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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대성전에서 제향하는 의례. 음성향교 주관으로 매년 봄(음력 2월 초정일)과 가을(음력 8월 초정일)에 음성군 유림회원과 음성군 관내 기관장, 각급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여 음성향교 대성전에 모신 중국 선현 19위와 한국 선현 18위에 지내는 유교제례이다. 대성전 정위에 공자를 모시고 그 양편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공자의 10제자인 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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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조선시대 하마비(下馬碑). 음성향교 하마비는 그 앞을 지날 때에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말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주로 관아(官衙),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 등의 입구나 능묘(陵墓) 앞에 세워져 경의(敬意)를 표할 수 있게 한 비석이다. 음성군에는 음성향교(陰城鄕校),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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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에 바위에 새겨넣은 글자. 음애(陰崖)는 바위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전해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耔)의 호이다. 음애(陰崖)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음애동 각자는 이자가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위치한 음애동(陰崖洞)에 거주하면서 새겨놓았다고 전한다. 글자는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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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났던 이형(李涥)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영(李榮), 아버지는 이광하(李光夏)이며, 아들은 이경선(李慶善)이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하여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하였다. 고종 때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효행을 다하니 도에서 상계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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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순흥. 남편은 이경립(李敬立)이고, 아들 이상현을 두었다. 유복자였던 이상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학문에 정진하여 공조참의가 되어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다. 순흥안씨는 22세 때 남편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어린 아들에게 “나는 이 시간에 네 아비를 따라 가겠노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라에서 열녀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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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우봉. 자는 백화(伯華).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났던 이형(李涥)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영(李榮)이고, 아들은 이경(李坰), 손자는 이경선(李慶善)이다. 부모가 병석에 눕자 부모의 변을 맛보아 가며 증세를 살폈고, 매일같이 하늘에 빌며 부모의 병이 낫기를 빌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갑자기 구할 도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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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광하의 효자각. 본관이 우봉(牛峰)인 이광하(李光夏)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해, 한겨울에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여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한 자가 넘는 잉어를 주고 갔다. 또 어느 해인가는,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꿩을 잡으려고 깊은 산중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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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이구령의 충신문. 본관이 성주(星州)인 이구령(李龜齡)은 임진왜란 때 홍천현감으로 조헌(趙憲)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사실이 나중에 조정에 알려져 1905년에 명정되었는데, 충신각은 1980년에 세워졌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 안쪽의 편액에는 ‘충신효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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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벽진. 자는 사업(四業). 충강공(忠剛公) 이상급(李尙伋)의 후손이고, 부인은 경주최씨이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입맛에 맞는 것은 무엇이든 정성껏 마련해 드렸고, 아버지가 위급할 때 쉬지 않고 수 십리를 달려가 약을 구해 와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계모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것을 부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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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30세에 남편을 잃은 후, 2남 1녀를 이웃에 맡기고 밤을 새워 길쌈을 하여 끼니를 연명하였다. 시어머니와 같이 살지는 않았으나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셨고, 평생 수절하며 집안을 다스려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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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의 후손으로, 18세에 남곡(南谷) 17세손인 이석주(李錫柱)와 혼인하였다.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남편 전처의 소생인 어린 아들 환승을 보살피며 가문을 지킬 것을 이미 약조한 뒤였다. 남편의 유의(遺意)에 따라 종족(宗族)을 찾아서 위문(慰問)하니 모두들 감복하였다. 또한, 집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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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벽진. 자는 중온(仲蘊). 증조부는 충강공(忠剛公) 이상급(李尙伋)이고, 아버지는 이지달(李志達)이다. 생후 몇 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중에 자라서 추복(追服) 3년을 하였다.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셨으며,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간호하고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하자 4일을 먹지 않고 석 달간 말하지 않았으며 3년간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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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이식후는 훈장 노릇을 하며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이 말하기를 ‘가르침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부모님의 봉양이 소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감복한 이식후는 더욱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변을 살펴 증세를 짐작한 후 탕약을 지었고, 부모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게 하여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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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이식후·이진도 부자의 효자각. 이식후는 서당 훈장으로 노부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변을 손으로 받아 병의 증세를 살폈으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이진도는 평소 아버지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으며 효성이 남달랐다.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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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자는 보도(普道), 호는 노포(老圃). 문헌공(文獻公)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이며 장석문(張錫文)의 아들이다. 장덕우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형제와 이웃 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실천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며 눈물을 흘리니 그 눈물이 마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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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字)는 성첨(聖瞻), 호(號)는 향초(香樵).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덕우(張悳雨)이다. 장동노는 항상 경로정신이 두터워 부친이 생존시에는 술과 고기를 항상 장만하여 드렸고, 이웃 어른과 노인을 정중히 모셔 부친의 뜻을 기쁘게 하여 드렸다.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서도 자신이 늙어서 몸과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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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살았던 열녀이자 효부. 김봉학(金鳳鶴)의 딸로, 16세에 장동민(張東旼)과 혼인하였으나 얼마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90세 가까운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조카를 데려다 가문을 이었다. 군(郡)에서 그 효열(孝烈)을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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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이정주(李鼎周)이고, 남편은 장석영(張錫永)의 손자인 장동엽(張東曄)이다. 청주에 거주하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26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세수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음식은 죽만 먹었다. 삼년상이 끝난 후 세수하고 의복을 재개하고 머리를 빗고,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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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 호는 포음(圃蔭). 조선개국일등공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다. 헌종(憲宗) 때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출생하였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할 때, 장지에 관한 송사(訟事)가 발생하자 장상기가 울며 관가에 호소하니 그 정성에 감복하여 장지 쓰는 것이 허가되었다. 장례를 지낼 때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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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자는 자류(子類), 호는 금리(琴里).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택한(張宅漢)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글을 잘 지어 문행(文行)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들게 하여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묘를 하는데 커다란 범 한 마리가 매일같이 찾아와 같이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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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말기 장석영의 효자문.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석영(張錫永)은 충신 장충범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면서 간호를 하고,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 안으로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이윽고 부모가 죽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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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이자 자선사업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성언(聖言), 호는 금범(錦帆). 선무공신(宣武功臣)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고, 동몽교관(童蒙敎官) 장석영(張錫永)의 아들이다. 장용묵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효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김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다하였다. 어머니 최씨가 천어(川漁)를 좋아하여 춥거나 덥거나 날씨에 상관없이 매일 고기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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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선무공신(宣武功臣)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장도홍(張道弘)이다. 장위한은 어버이를 섬김이 극진하였으며, 형제 6명의 우애가 특히 돈독하여 본받을만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나이가 차 분거(分居)하여 거처를 정함에 노구솥 하나와 송아지 한 마리, 그리고 간소한 농기구 등을 가지고 몸소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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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용(齊用).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장상기(張相基)의 손자이다. 장제천은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어머니를 위하여 항상 맛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께 제일 먼저 갖다 드렸다. 모친의 병환이 몹시 위중함에 하늘에 빌며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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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충범의 충신문.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충범(張忠範)[?~1597]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주부로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향리인 삼생리에 와서 피신하며 치료하였다. 1597년(선조 30) 동지를 규합, 창의하여 삼생리의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녹권을 하사받고, 1857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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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수. 남편은 장택한(張宅漢)이고, 아들은 장석영(張錫永)이다.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마을 뒤에 있던 샘터에서 매일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3개월 동안 치성을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1856년(철종 7)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 만동묘(萬東廟)에 효부로 표창되었다. 1858년(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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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광주(廣州). 내사령(內史令) 이자성(李自成)의 후손인 이장회(李章會)의 셋째 딸이다. 전재학(全載學) 처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전재학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광주이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19세에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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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제(公濟).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정국노의 5형제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을 5효촌이라 하였다. 정국노는 원래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 산에서 나물을 캐고 식량을 구하여 백여 리 길을 다니기를 거듭하였다. 새벽마다 아버지께 문안을 올렸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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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공거(公擧).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셋째 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와 정국추(鄭國樞)가 있으며, 동생으로는 정국노(鄭國櫓)와 정국빈(鄭國彬)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마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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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국량의 효자각. 본관이 초계(草溪)인 정국량에게는 정국주, 정국추, 정국노, 정국빈 등의 형제가 있었다. 모두 효성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오효자라고 불렸으나 그중 정국량의 효성이 단연 돋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정국량의 부친이 오랜 질병 끝에 돌아가셨는데, 마침 장례도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왜병이 마을로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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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간(公幹).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막내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가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품이 맑고 높았다.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합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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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충신이자 효자. 예로부터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고 하였으니, 정국주는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충성을 바쳤으므로 그 효와 충이 아울러 장하다고 칭송을 받았다. 본관은 초계.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맏아들로, 동생으로는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 정국빈(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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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명여(命汝), 호는 일옥(一玉). 홍문공 정배걸(鄭倍傑)의 29세손이며 교리 정창(鄭昌)의 15세손이다. 아버지는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 어머니는 안동김씨이며, 부인은 양천허씨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정인상(鄭寅尙)이다. 정규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지내던 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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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규영의 효자비. 정규영의 호는 일옥(一玉)으로, 죽계(竹溪) 정창(鄭昌)의 후손이며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의 아들이다. 자는 명여(命汝)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일찍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모친의 사후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부친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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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상징물. 정문은 일명 홍문(紅門) 또는 작계(綽契)라고도 한다. 액(額)에다 충(忠)·효(孝)·열(烈) 등의 글자를 새겨 표창의 종류를 표시하고 그 이름과 직함을 새겼다. 정려의 사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효녀 지은(知恩)에 대한 포상 기록이 처음이다. 고려시대에 와서 역대 왕들이 효자와 열녀 등이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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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의 효부. 전의묵(全義黙)의 딸로, 시집오던 날부터 늙은 시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를 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후 남편 정명환(鄭明煥)을 여의였으나 슬픔을 견디고 시어머니를 보살피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돌아가신 후에도 예법대로 상례를 행하여 마을에서 그 효와 절개를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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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초계. 자는 응수(應壽), 호는 소죽(小竹). 정창(鄭昌)의 후손이며, 판관 정시혁(鄭時赫)의 9세손이다. 조부는 정홍유(鄭洪猷), 아버지는 정학일(鄭學一)이다. 어머니는 하동정씨로 통덕랑 정해승(鄭海昇)의 딸이다. 부인은 경주이씨로 이다연(李多延)의 딸이다. 아들은 정보영(鄭輔永)·정민영(鄭玟永)·정택영(鄭澤永)이다. 천거로 문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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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정억성의 효자비. 정억성은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는 하지 못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음성군 명륜회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 밖의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 총 높이가 205㎝이며 3단으로 구성되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42㎝, 앞면 52㎝, 측면 24㎝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5㎝, 앞면 98㎝,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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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도숙(度叔). 교리 정창(鄭昌)의 13세손이고,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정석휴(鄭錫休)이다. 1746년(영조 22)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에서 출생하였다. 오효자로 이름난 정국주(鄭國柱)의 후예답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 경학에 덕망이 높았으나 과거를 보아 출세하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움을 깨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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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정운영의 효자각. 본관이 초계인 정운영은 일찍부터 공부를 많이 하여 학문이 깊었으나 과거를 보아 출사를 하게 되면 부모님을 봉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오직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잉어가 특효약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겨울이라 잉어를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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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주노(周老), 호는 위은(渭隱). 아버지는 효자 정규영(鄭圭永)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부인은 효부로 이름난 현풍곽씨이다. 1906년(고종 43) 현풍곽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었던 정인상은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부모에게 드렸으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문안을 하였다. 8대에 걸친 조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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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곽대용(郭大鎔)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1906년(고종 43) 정인상(鄭寅尙)과 혼인하였다. 시부모를 섬김에 극진히 하였는데, 시아버지인 정규영(鄭圭永)이 일찍부터 약주를 좋아하니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도 하루에 세 번씩 약주를 대접하였다. 흉년이 들어 술을 빚을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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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조선시대 정인상의 효자비. 정인상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호는 위은(渭隱)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극진하였다. 정인상은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어른에게 드렸고 아침, 저녁에는 반드시 문안을 올리는 등의 효행을 하였다. 8대에 걸친 조상의 묘소를 치산하고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후진 양성을 위하여 일옥도장을 세우고 후세를 교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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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유림지도자. 위은(渭隱) 정인상(鄭寅尙)의 맏아들로 자는 성윤(聖倫), 호는 구봉(九奉)이다. 정조헌은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여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통달하고 20세까지 도장제(道莊齊)에서 한학(漢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후 가사에 종사하면서 마을 이장직을 23년간 맡아 주민복지에 헌신하였으며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30여 년 동안 연말마다 전국 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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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유학자 정조헌(鄭祖憲)을 기리는 비. 음성향교 전교(典校)였던 정조헌(鄭祖憲)의 본관은 초계이며, 자는 성륜(聖倫)이고, 호는 구봉(九峯)이다. 시조 광유후(光儒候)의 31세손이고 효자 위은 정인상(鄭寅尙)의 아들로, 어머니는 효부 현풍곽씨이다. 정조헌은 평생 윤리와 도덕을 몸소 실천하고 유도(儒道) 진흥에 심신을 바쳤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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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경여(敬汝), 호는 유헌(柳軒). 문정공(文貞公) 조무(趙廡)의 후손이며, 효자 조용하(趙用夏)의 아들이다. 아들은 조헌용(趙憲瑢), 조헌영(趙憲瑛), 조헌옥(趙憲玉) 3명을 두었다. 부친 조용하가 병에 걸리어 위중하게 되자 조기순이 밤중에 맑은 물을 길어다가 백일 동안 탕약 물로 사용하였더니 병에 효험이 있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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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창. 자는 윤집(允執). 문정공(文貞公) 조무(趙廡)의 후손이고, 부인은 평택임씨(平澤林氏)이다. 조용하는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부인 임씨는 남편이 위독하자 두 차례나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남편을 소생시켰다. 1888년(고종 25) 임금이 조용하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하고 조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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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조용하와 열녀 평택임씨의 효열각. 본관이 순창인 조용하와 처 평택임씨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의식이 불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의식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후 언젠가는 조용하가 병이 들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자 부인 임씨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이와 같은 효행과 효열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종 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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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자는 탁이(卓爾), 호는 삼외옹(三畏翁). 아버지는 조변(趙卞)이다. 1605년(선조 38)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가평(가래들)에서 출생하였다. 황실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향을 피우고 아버지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대변을 맛보아 가며 아버지를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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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유안의 효자문. 조유안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셔 근동에서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면서, 아버지의 변을 손에 받아 맛을 보면서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소생시켰다. 그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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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하진민의 충효를 기리는 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많은 일본 군사가 충주에 침입하여 음성군 생극 지역까지 왔을 때 김선경(金善慶) 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가 딸을 데리고 생극 지역 수리산으로 피난을 왔다. 이때 하진민은 곤경에 빠진 이씨 부인을 구출하였다. 조정에서는 하진민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음직으로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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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지천서원(知川書院)의 시초는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김세필(金世弼)[1473~1533]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팔성산 아래에 지은 초옥으로, 김세필은 이곳에서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교육하였다고 한다. 초옥은 당시 충주목사 박상(朴祥)의 재정적 도움으로 건립되었는데, 박상은 자주 김세필을 찾아와 격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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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에서 제향하는 의례. 김자수(金自粹), 김세필(金世弼), 김저(金儲), 김의(金嶷), 김정현(金鼎鉉), 김홍욱(金弘郁), 김종현(金宗鉉), 박상(朴詳) 등을 매년 봄(음력 3월 초정일)과 가을(음력 9월 초정일)에 음성 지역 유림과 경주김씨 문중에서 제향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십청헌 김세필이 벼슬에서 물러나 음성군 생극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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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그 앞에서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주로 관아(官衙),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 등의 입구나 능묘(陵墓) 앞에 세워 경의(敬意)를 표하게 하였다. 음성군에는 지천서원(知川書院), 음성향교(陰城鄕校), 운곡서원(雲谷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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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세워졌던 진주정씨의 열녀 정문. 진주정씨는 삼성면 용성리 출신인 권종원의 처로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여 근동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일부종사할 목적으로 자결하였다. 이를 조정에서 알고 조선 말기인 고종 연간에 용성리에 열녀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현재는 현판만 후손의 집에 남아 있을 뿐 흔적을 찾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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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있는 풍천임씨(豊川任氏) 횡성공파(橫城公派) 청산공종회(靑山公宗會)의 사당. 사묘는 문중에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므로, 문중이 번성한 곳에서는 최근까지 크게 만들어지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사당에 제사의 기능뿐만 아니라 강학의 기능을 더하여 서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근대에 오면서 강학의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의 기능만 강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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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백(周伯). 사과 최두수(崔斗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동중추 최덕립(崔德立)이다. 아버지는 서부참봉 최기선(崔起先), 어머니는 진천임씨(鎭川林氏)로 임대성(林大誠)의 딸인데, 외할아버지는 판관 임수무(林秀茂)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서(權澨)의 딸인데 자식 하나를 두었으며, 부인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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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효자 최세면을 기리는 비. 최세면은 최기선의 아들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하였고, 부모 생존시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다며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먹지도 입지도 않았다. 효행비는 총 높이가 247㎝이고,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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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죽정(竹亭) 선생의 후손으로 부인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1813년(순조 13)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826년(순조 26)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마을 사람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1839년(헌종 5) 남원양씨와 혼인하였는데, 부인 또한 효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부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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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있는 조선 말기 순국 열사 박세화를 기리는 사당. 본관이 밀양인 박세화(朴世和)[1834~1910]는 1895년(고종 32)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분개하여 도사 윤응선(尹膺善)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었다. 그후 석방되어 음성읍 동음리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찾아오는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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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충룡사에서 제향하는 의례. 박세화(朴世和)·윤응선(尹膺善)·신현국(申鉉國)·정규해를 배향하고, 매년 봄(음력 3월 말정일)과 가을(음력 9월 말정일)에 음성 지역 유림들이 제향하고 있다. 충룡사는 의당(毅堂) 박세화를 봉안한 사당으로 1964년 음성 유림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윤웅선·신현국·정규해를 추가로 배향하고 있다. 제관은 음성군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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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을 실천한 신하. 충신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의 육정(六正) 가운데 하나이다. 음성 지역에도 충과 관련된 인물과 유적이 상당수 남아 있어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았던 충 사상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음성 지역의 충신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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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조인옥(趙仁沃)의 사우. 조인옥은 본관이 한양이며, 자가 군계(君啓)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돈의 아들이다. 1373년(공민왕 22)에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고, 1387년(우왕 13)에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다. 정도전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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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있는 조선 후기 양식의 정자. 음성군 소재지에서 청주 쪽으로 가는 국도 36호선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우측편에 위치한다. 마을에서 보면 오른쪽 앞쪽의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언덕 위에 동서향으로 서 있다. 충효정(忠孝亭)의 원래 이름은 피금정(披襟亭)으로, 약 3백 년 전에 세워진 정자이다. 피금정이란 더운 여름날 온몸에 땀이 흘러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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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는 태교사에서 제향하는 유교 의례.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에 주응동이 안성에 거주하는 김문웅으로부터 주자의 영정을 기증받아 주씨 문중에서 문곡영당이라는 사당을 세운 것이 시초였다.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복구되면서 사당의 명칭을 태교사라 고치고 매년 춘추향제를 지내왔다. 제관은 음성군수·부군수·운곡서원과 관련된 음성 유림 중에서 유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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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 있는 평산신씨 영당.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영당이다. 생극면 차평리의 수리뜰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공포는 다포식이고, 지붕에 돌기와를 올렸다. 정면에 ‘신씨영당(申氏影堂)’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건물 안에는 신씨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벽돌담장으로 영당 주위를 둘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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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이며 애국지사인 하석환을 기리는 비. 하석환(河碩煥)은 하재철(河載鐵)의 아들로, 자는 광국(光國)이며 호는 일재(一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부모를 잘 봉양하였으며 1905년(고종 42)에 부친이 죽자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모친이 죽었을 때는 6년간 시묘를 살았다. 이때 큰 호랑이가 와서 지켜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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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본관은 동래. 아버지는 정형조(鄭亨朝)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고 반나절을 기절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있음을 알고 일어나 효를 다하였다. 시부모가 죽은 뒤 장례를 마치고는 “내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살아서 무엇 하랴, 지아비를 따라가겠노라.”하고 탄식하며 죽으니 동리에서 효부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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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현풍곽씨의 효열 행적을 기리는 비. 1969년 성균관 유림에서 추천하여 정인상의 아들인 정조헌이 1978년 건립한 비각인 상모각(常慕閣) 안에 시아버지인 효자 정일옥의 효자비, 정규영 효자비, 남편인 정인상 효자비와 함께 놓여 있다. 비 앞면에는 ‘효부유인현풍곽씨기적비(孝婦孺人玄風郭氏紀蹟碑)’라고 쓰여 있다. 현풍곽씨의 효열 사실은 『한국효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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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자녀. 효 사상은 삼국시대에 이미 전개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에서 오경(五經)과 중국의 사서들을 교육하였고, 신라도 국학(國學)에서 『논어(論語)』와 『효경(孝經)』 등을 교육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여 유교적 충효 사상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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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의 안가마골에 있는 무송윤씨의 재실. 원남면 하노리에 무송윤씨(茂松尹氏)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3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송윤씨의 시조인 윤양비(尹良庇)의 14대손 윤청(尹暒)이 현종(顯宗) 때 경상북도 상주에서 살다가 원남면 하노리 능촌에 세거한 것이 처음이다. 희암재(希庵齋)는 1965년에 세운 것으로, 희암(希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