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명으로 청주시 상당구 내덕 2동 8통이고, 법정명은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안덧벌이다. 내덕동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북주내면(北州內面) 지역으로, 덧벌 안쪽이 되므로 안덧벌 또는 내덕평(內德坪)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현리를 병합하여 내덕리라 하고 서주면(西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청주읍(淸州邑)에 편입되었다. 예전에는 우암산(牛岩山)...
-
현재 안덧벌에 있는 교육기관으로는 내덕초등학교와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이 있다. 대다수의 초등학생들은 내덕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청주 시내 여러 곳으로 다니고 있다. 예전에는 안덧벌에 초등학교가 없어서 주로 주성초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주성초등학교로 통학을 하기 위해서는 바깥덧벌(우암동의 옛 명칭)을 통해서 가는 길이 지름길이었다. 중학교는 주성중학교로 많이 진...
-
안덧벌은 산간 마을이라 물이 귀했다. 우물은 양지말에 한 개, 음지말에 한 개가 있었다. 주민들이 물을 보호하기 위해 양철로 지붕을 해서 얹어 우물각을 세웠다. 이 우물에 동네 아낙들이 음력 정월과 시월에 개인적으로 고사를 지냈다. 제일을 정할 때 정월 고사 때는 보름 안에 택일하였다고 한다. 샘고사를 성대하게 지낼 때는 만신할머니를 모셔다 제를 올리기도 했다. 이 때...
-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애기 잘두 잔다 먹구 자구 먹구 놀구 을부떠시 달부떠시 우리 애기 잘두잔다 뒷집 개야 짖지 마라 앞집 개야 짖지 마라 우리애기- 무럭무럭 잘 커라이 … 여기 있으니 이 술 한잔을 해 보세요 이 소주는 술이 아니라 먹고 노자는 경배주라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얼씨구나 좋네- 지화자 좋아 아니- 놀구선 못 살겄네 아니나 허구서는 못 살겄네...
-
안덧벌은 고지대에 있으면서도 산지가 적고 평지가 많았다. 우암산(牛岩山)[338m] 자락을 따라서 밭농사와 과수농사를 지었으며, 마을 앞 들판과 사천(斜川) 냇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평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주로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나 자기 농토를 가진 사람이 적어, 생계유지가 곤란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은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육거리시장...
-
연초제조창이 들어서기 전에는 주로 농사를 지으며 남자는 나무를 팔고, 여자는 두부와 콩나물 등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면서 그 곳에서 일하거나, 노동자들에게 방을 세놓아 수입을 올렸다. 이후 청주대학교가 들어서고 특히 예술대학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주로 학생들을 상대로 방을 세놓거나, 하숙을 치고, 또 장사를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청주대학...
-
내덕동은 시의 북부에 있으며, 동쪽은 율량동, 서쪽은 운천동, 남쪽은 우암동, 북쪽은 사천동과 접한다. 안덧벌마을 뒤쪽에는 우암산(牛岩山)[338m]이 있고, 마을 아래로 내려오면서 골짜기를 따라 들판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는 하천이 흐르는데, 현재 복개되었고, 급격한 도시화로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단독 주택과 상가가 들어서면서 들판은 없어졌다....
-
◦ 태몽 안덧벌에서 조사된 태몽은 아들의 경우 잘 익은 사과·밤을 치마 가득 담아 오는 꿈, 우암산(牛岩山)[338m] 밑에 서리서리 감긴 황구렁이를 본 꿈, 둑방 밑에 잉어가 펄덕이는 꿈 등이다. 딸의 경우는 복숭아나무가 달려드는 꿈, 외밤톨 주은 꿈, 요강에 뱀이 하나 들어오는 꿈 등이다. 제보자들은 한결같이 잘 익고, 색깔이 좋고, 모양이 좋은 것은 아들 꿈이고,...
-
행정명으로 청주시 상당구 탑·대성동 18통이고, 법정명은 대성동 향교말이다. 본래 청주군 동주내면(東州內面)의 지역으로서 청주향교가 이곳에 있어 향교골 또는 교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담리, 명암리 일부와 북주내면(北州內面)의 교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교동이라 해서 서주면(西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20년 청주읍에 편입되어 대성정이라 하였는데, 1947년 일...
-
(1) 향교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 고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향학(鄕學), 학관(學官), 재관(齋官) 또는 교관(敎官)으로도 불리었다.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통 시대의 교육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
-
향교말(상저골, 향교골, 생지골)은 산간 마을이기 때문에 산신을 위하는 의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현재도 당산(唐山)이라 불리는 산이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여러 주민들이 호랑이를 본 경험담을 구연해 주었다. 향교말 산신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이 찾아와 개인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향교말 산신제는 현재 당산(唐山)이라 불리던 산의 중턱에서 지냈다. 제...
-
대성동은 시의 중앙에 위치한다. 대성동은 우암산(牛岩山)[338m]의 지맥인 당산(唐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대부분이 산지이다. 향교 앞에서 용담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기 때문에 ‘당고개’라 하고 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도 당고개라 한다. 도지사관사 뒤 언덕 위에는 청주의 문묘로서 대성전 명륜당 등의 향교가 있고, 향교 맞은 편 고개를 ‘잿말고개’라...
-
타루박샘이라고, 줄이 열두 발 짜리유, 요 밑에 덮어놨어. 바우가 요렇게 패인 데가 있어. 그래 두레박을 담궈 맞게, 옛날에는 양짝에다 나무쪼가리 대고, 우리 영감이 그렇게 잘 만들었어. 여기 처음 왔을 때 집이 3채 있었는데, 내가 영감을 기다리면 늑대가, 개같이 생겼어. 세파트처럼 생겼는데. 그러고 물이 안 나오니까 밤새도록 짜는데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께 아침에 눈이 쌓였는데...
-
행정명은 청주시 흥덕구 강서2동 10통이고, 법정명은 문암동 그림바위이다. 문암동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서강내일상면(西江內一上面) 지역으로 그림바위가 있으므로 화암(畵岩) 또는 문암(文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주내면(西州內面)의 문암리(文岩里)를 병합하여 문암리(文岩里)라 해서 강서면에 편입된 후, 1983년 2월에 대통령령에 의하여 청주시...
-
마을의 위치가 북서쪽에 치우쳐 있어 교육 환경이 좋은 편이 아니다. 마을 주민들은 초등학교는 내곡동에 있는 내곡초등학교와 인근 시내에서 그 중 가까운 주성초등학교를 다녔고, 그 전에는 강서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때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모두 걸어서 등교했는데, 거리가 멀어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줄을 맞춰 등교하곤 했다. 중학교는 가장 가까운 주성중학교를 다닌다. 그러나 현재도 아이들...
-
딸을 장성하게 키워놨는데, 딸 줄 사람이 있어야지. 사우 삼을 사람이 없어서. 그래 옛날에는 광고에 붙이는 걸 방이라 했어요. 그래 도(道)로 군(郡)으로 면(面)으로 얘기 잘하는 사람 사우 삼는다고 그러니까, 젊은 혈기 있는 사람들은 가서 혼인 할라고 다 한번 가는 거야. 그래 거기 찾아갔는데, 충청도 사람도 가고, 전라도 사람도 가고, 경상도 사람도 가고, 인제 가믄 그 근처에...
-
서방산 유람-할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본에 이방잔가- 사-명주 이 아니냐 죽장을 짚고 단표자로- 봉래산을 구경갈 제 경포 동정호는 명-월-을- 구경하고 단발령은 얼른 넘어 봉래산 고은 경치 지-척-에 던져두고 못본지가 몇해인-가 다행히 오날이야 이곳을 당도-하니- 이일이 새로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야 상-전벽해를 웃지...
-
마을의 주산업은 논농사이다. 주변 농지는 20만 평이 되는데 주로 인근 까치내에서 농사를 짓는다. 마을 거주 83호 중 20호 정도가 현재 농사를 짓고, 나머지 주민은 시내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거나, 노령화 되어 자식들에게 의탁하고 있는 실정이다. 벼농사 중 메벼 농사를 주로 하고 수확한 벼는 농협과 정부에 수매하고 나머지는 개인별로 수입을 내고 있다. 밭농사는 자급할 양만 경작...
-
그림바위마을의 생활상은 농촌 마을과 유사하다.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사시사철에 따라 생활모습이 바뀐다. 조선시대부터 농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협동과 단결이 잘 된다. 농사의 방법이 수작에서 기계로 바뀐 이후에도 혼자서 경작할 수 없기 때문에 주민 간에 협력이 필요해 단결이 잘 되고 있다. 예전처럼 동네 전체가 품앗이로 경작하진 않...
-
◦ 개·소 장가들이기 이날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를 꺾어서 개나 소의 목에 묶어 주는 것을 장가들인다고 한다.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로 가축의 목에 묶어주면 귀신을 없애고 가축이 새끼를 잘 낳는다고 믿었다. ◦ 과일나무 결혼시키기 우물가의 돌이나 샘 옆의 돌맹이를 감나무 가지에 올려놓으면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린다고 하여 돌을 올려놓았다. 이것을 “감나무 시집보내기”라고 하였다...
-
문암동은 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송절동, 서쪽은 원평동, 남쪽은 화계동, 북쪽은 정상동과 인접해 있다. 마을의 대부분이 평지이나 서쪽 일부지역이 구릉지를 형성하여 이곳에 그림바위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는 안산마을이 있다. 마을 뒤에는 충북선이 주행하고 동쪽은 무심천(無心川) 제방도로가 있다. 마을 뒤편으로 약 이십만 평 정도 들이 펼쳐져 있다. 들판 중 일...
-
옛날에 그름바위라고 했어요. 옛날에 보믄 그전에는 물이 좋고, 별주부 자라 그걸 잡으려고 말야 그름바위, 오면은 바위가 있잖소, 갈래졌지 그전에는 한 여러믄이 앉아서는 농사짓는 밥을 식사를 하고는 했거든. 그런데 제방으로 돌을 가져다 쌓는 바람에 죄다 없어졌어. 그전에 전설이라는 게 옛날에 거기서 바위가 있어서 그름바위여. (선비가 많아서는 무슨 이야기에요) 그건 내가 이야기 할게...
-
그림바위마을은 아직도 동네에서 초상을 치르고 있다. 2004년 현재 그 수가 줄어드는 추세이고 일손이 모자라 상포사에 맡기기도 하지만 시내에서 보기 드물게 합심하여 초상을 치르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는 거의 모든 초상이 이 동네에서 이루어졌지만 현재는 병원영안실이나 장례식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70%가 넘는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동계와 연반계 회원들이 합심하여 부고...
-
행정명은 청주시 상당구 용암2동 37통이고, 법정명은 방서동 대머리이다. 방서동 대머리마을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남일하면(南一下面)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방서리로 청원군 남일면에 편입되었다. 방서리란 지명은 방정(方井)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어진 것이다. 1983년 2월 대통령령에 의하여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마을을 개촌한 사람은 한...
-
방서동 대머리마을은 인근 초등학생들이 유적 탐방 등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 대머리마을이 청주를 대표하는 한씨 집성촌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유적들을 살펴보면서 청주의 역사를 더불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는 한씨 후손들이 찾아오는 경우이다. 2000년 카자흐스탄에서 한씨 후예가 6대조의 유언을 실행하고자 찾아온 경우가 있었다....
-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 나라의 서당을 폐지시켜 국민의 교육장을 없애버린데 반하여 청주 한씨 대머리마을에서는 문중에서 방서한길에 강당을 지어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이때 강당을 운영하기 위해 “서당계”를 조직하였다. 여름에 강당 생일잔치를 하면 방죽(연못)을 품어서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이고 각자 집에서 보리밥과 찬을 가져와서 같이 먹었다고 한다. 강당으로 쓰였던 그 건물...
-
1) 무농정(務農亭)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 210-4(대머리공원 내)에 소재한 무농정은 청주 한씨 종중에서 세운 누정이다. 1688년(숙종 14) 후손 한익저(韓益著)가 세운 유적비에 의하면 본래의 누정은 청주 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이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현재의 낮은 구릉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기 위해 세웠...
-
방서동 대머리마을 동제였던 산신제는 10월 보름, 현재는 없어진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서 올렸다. 용암동이 개발되면서 사라졌다. 현재 무농정 및 공원자리이다. 산제당은 원형의 돌탑과 소나무 신목이 서있었다. 제수 마련은 시루떡을 놓고 그 위에 쌀 담은 사발을 올려놓았다. 사발에는 초를 꽂아 제를 올릴 때 촛불을 켰다. 술 대신 정한수를 올려 밤 열 시경 제를 올렸다....
-
1983년 청주시에 편입될 무렵 마을 앞으로 청주 미원간 국도가 개설되어 교통은 편하다. 마을이 시의 남쪽에 위치해 번화하지 않았는데 1990년대 용암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산업의 형태도 2·3차 산업으로 바뀌었고 교통편도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
대머리마을은 앞에 들이 넓어서 원평동 아이들과 쥐불놀이 싸움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겨울 특히 정월이면 의례히 들에 나와 짚을 모아서 그 속에 돌맹이, 사금파리, 닭똥 등을 집어넣고 둘둘 말아서 묶어 횃대를 만들어 쥐불놀이를 했다. 이 횃대에 불을 붙여 상대편 아이들을 위협하면서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처음에는 들 앞에서 하다가 저녁 무렵이면 들 중간에 모여서 싸웠다. 아...
-
마을 대부분이 평지이며 북부지역에 낮은 구릉지가 있다. 마을 서쪽은 무심천(無心川)이 흐르고 남쪽은 월운천이 흘러 마을 남서단에서 무심천(無心川)에 합류한다. 자연부락으로 너먼대머리(擡村), 대머리(竹村), 방정, 아래대머리, 웃대머리 등이 있고, 마을 주변으로 펼쳐진 들은 방정, 자갈더미들, 운수들, 무농정, 용개들 등이 있다. 대머리마을 앞으로 용개들이 펼쳐져 있었고...
-
시조할아버지는 서기 850년에서 900년에서 활동하셨어요, 영동 황간 남곡리에서 출생을 하셔서 여기서 정착하셨어요. …지금서부터 3500년 전까지 올라가야 돼요, 은나라 10대 임금인 무정의 동생이 다스릴 理자가 있어요. 0이의 아들이 기자(箕子)라고 있어요,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정을 안해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군 천 년 후에 바로 기자조선이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
행정명은 흥덕구 강서 1동 24통이고, 법정명은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飛下洞) 동양촌(東陽村)이다. 비하동은 시의 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복대동, 서쪽은 지동동, 남쪽은 강서동, 북쪽은 향정동과 접해 있다. 본래 청주군(淸州郡) 서강내일하면(西江內一下面) 지역으로 피아골, 피하골 또는 비하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동(道洞) 동양리(東陽里)와 주...
-
(1) 박춘무삼대창의사적비(朴春茂三代倡義事蹟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박춘무(朴春茂)[1544~1611], 이괄의 난·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동명(朴東命)[1576~1636] 및 손자 박홍규(朴弘遠) 3대의 공적을 기려 1992년 세운 비석이다. 동양촌마을 앞 원모단(遠慕壇)에서 북동쪽으로 100m 지점에 위치한다. 비제(碑題)는 ‘민양공화천당박...
-
동양촌의 서낭제는 동제가 아니라 개인 신앙이다. 서낭은 한갓골고개와 용골고개에 있었는데, 그 중 한갓골 서낭을 더 많이 위했다. 한갓골 서낭은 소나무 앞에 돌로 원형 탑을 쌓아 올린 형태로 개인이 고사를 지냈었다고 하며 현재 소멸되었다. 용골고개 서낭은 최근에 소멸되었는데, 10여 년 전만 해도 서낭에 왼새끼에 종이를 꼬아 꽂은 금줄이 쳐 있었다고 한다. 그러...
-
정월 윷놀이는 정월대보름 전에 주로 행하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실내 실외 어디서든 누구나 가능한 놀이이다. 윷은 주로 밤나무로 만들었고, 가시나무나 소나무로도 만들었다. 밤나무윷은 크기가 다른 윷에 비해 작아 한 손에 들어가 예전에 많이 사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동네에 초상이 났을 때 호상(好喪)인 경우 상가(喪家) 마당에서도 윷놀이를 했다. 어릴 때...
-
동양촌의 교통은 일제시대에 개설되어 확장된 청주-조치원간 도로, 청주역으로 통하는 도로, 청주시 외곽도로 등과 접해 있어 편한 편이다. 동양촌은 전통적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도로의 개통과 택지개발로 인한 도시화로 유입 인구가 증가하여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늘고 있다....
-
동양촌은 벼농사를 위주로 생계를 유지하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부업으로 동네 주민 전체가 인조진주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유리를 달구어 만든 인조진주를 마을의 중간 상인을 통해 조치원 장에 내다 팔아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전형적인 농촌 생활상을 보이던 동양촌은 청주의 도시화와 함께 급격히 변하였다. 그 주요인은 도로의 개설과 대단위 아파트단지의 유입이다...
-
동양촌은 부모산(父母山)[232m]의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청주-조치원간 도로가 나 있으며, 마을을 서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전에는 일대가 모두 농경지였으나, 최근에 하복대지구가 개발되어 급속히 도시화되어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상가가 들어서고 있다. 동양촌 북쪽 도로가에 아래사양재마을이 있고, 아래사양재 북서쪽 골짜기에는 윗사양재마을이...
-
문헌에 기재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부모산은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등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朴春茂)[1544~1611]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자 그 안에 갇힌 의병들은 보름이 지나자 굶어...
-
현재는 모두 조산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출산이 이뤄지지만 예전에는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면 산파는 방의 자리를 걷고, 미리 추려놓은 짚을 깔고 그 위에 재문지를 깔았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은 산모와 아이 쪽으로 모두 한 뼘씩 남기고 잘랐다. 자른 탯줄과 분비물은 왕겨 속에 넣고 마당에서 삼불을 놓아 태웠는데 이 삼불은 사흘 정도 탔다. 삼불이 다 타 재가 되...
-
행정명은 용담·명암·산성동 12통이고, 법정명은 산성동 산성마을이다. 산성동 산성 마을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산내이하면(山內二下面)의 지역으로서 상당산성 안이 되므로 산성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죽리와 양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리라 해서 낭성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산성마을은...
-
산성 마을은 산성이 있어 연일 끊이지 않고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아온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관광을 주로 많이 하고, 청주시내 소재 중·고등학교에서 산성으로 소풍을 온다. 우암산(牛岩山)[338m] 등산로는 여러 곳으로 나 있어 한 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등산하는 시민들이 많다. 상당산성 방문객 현황은 1월~2월초 평일 300~500여 명이다. 2월~7월 중...
-
예전에 교동초등학교와 낭성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갈산분교가 생기면서 갈산분교를 다녔다. 지금은 폐교되고 낭성과 시내로 다니고 있다....
-
(1) 상당산성(上黨山城)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둘레가 4.2㎞, 높이 3~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김유신(金庾信)의 셋째 아들 원정공(元貞公)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김우진 장군...
-
산성마을은 60여 년 전까지 서문 왼쪽 산자락에 돌로 쌓은 산제당을 지어 음력 12월말에서 정월 초에 택일하여 산제를 올렸다. 산제당은 때집으로 때 한 장, 돌 한 장씩 포개 지은 움막이었다. 현재 산제당은 원래 위치에서 산 아래쪽으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예전에 동제를 올릴 때는 동네 집집마다 소염이 쌀을 걷거나 동네 기금으로 마련했다. 제물로는 통돼지와 떡을 동네 소염...
-
산성 마을 주민의 생활은 원주민과 이주민이 대별된다. 원주민은 대부분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이주민들은 대개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현재 44가구 중 농사짓는 가구는 10여 가구쯤 된다. 산성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한옥마을은 원래 농토였는데 1980년대부터 터를 닦아 1992년부터 상가가 형성되어 대추술과 민속음식을 팔고 있다. 대추술은 1980년대 이...
-
예전 산성 마을의 생계수단은 농사와 나무장사였다. 본업으로 논농사를 짓고 부업으로 나무장사를 해서 생계에 보탬을 했다. 나무를 해서 판 시장은 청주 내덕동 제조창 앞과 청주약국 앞, 무심천(無心川) 제방이다. 무심천(無心川)의 소전거리와, 남주동(南洲洞)의 피전골목, 피전거리, 나무전, 돗자리 전에 가서 나무를 팔았다. 그때 당시 시세가 나무 한 짐에 20원~30원 했다. 이 가격...
-
◦ 달맞이 산성 마을은 달맞이를 북장대에서 했다.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보름날 저녁에 달보고 절을 하며 한 해 소원을 빌었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달맞이 행사를 했지만 현재는 청주 시민이 상당산성에 와서 달맞이 행사를 벌인다. ◦ 쥐불놀이 산성 마을은 산촌이기 때문에 나무가 많았다. 특히 다른 산에는 나무가 없어 인절미를 굴려도 먼지하나 안 붙는다는 말이 날...
-
산성동은 시의 최북동부에 있으며 동쪽은 청원군 낭성면 삼선리, 서쪽은 명암동, 남쪽은 용정동, 북쪽은 청원군 북일면 국동리에 접해 있다. 산촌마을인 산성마을은 상당산(上黨山)[419m] 정상에 있는 마을로 산정에 상당산성이 있고, 성내에는 산성마을과 일제시대 축성된 마을 앞 성내방죽이 있다. 성내 남쪽 골짜기에는 것대마을이 있다. 마을 중앙에는 청주 미원 간의 도로가 있...
-
예전에 산성 마을 뒷산 골짜기인 막골, 곰골, 참나무골, 북장대(겅거울), 옹기미에 호랑이가 나와서 해질녘에는 산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어린애를 업고 가는 것을 콩밭을 매고 있던 아낙이 보고 소리 지르자 아이를 놓고 갔다. 호랑이가 동네 옆 냇가에 내려와 물을 마시다 사람이 지나가면 피해줬다. 옹기미에 굴이 있었는데 이 굴에서 호랑이가 산다는 소리가 있...
-
산성 마을은 각성받이 마을이기는 하나 워낙 산간벽촌이라 궂은일에는 합심하여 일을 치렀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너나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을 도왔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절에는 상주가 동네 집집마다 등을 하나씩 사주는 미풍양속이 있었으나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라졌다. 장례는 3일장, 5일장을 하나, 대개는 3일장이다. “중생일”이 끼면 5일장을 한다. 중...
-
행정명으로는 흥덕구 강서 1동 14통이고, 법정명으로는 수의동 강촌이다. 수의동은 청주군(淸州郡) 서강내일하면(西江內一下面)의 지역으로 절의를 지킨 사람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수의동(守儀洞)[수절, 숫절]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상리(綱常里), 부동(釜洞), 정상리(井上里)를 병합하여 수의리(守儀里)로 강서면(江西面)에 편입된 후, 1983년 2월...
-
강상마을은 관광객보다는 유적 탐방, 답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강상마을을 찾아오는 이들 중 학생들은 주로 비석을 탁본하거나, 2004년에 개관한 천곡유물전시관을 찾아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외 유적을 돌면서 역사탐방을 목적으로 한다. 이외 일반인들은 문화답사를 목적으로 하여 이 마을을 찾는다....
-
강상마을 주민들은 강서초등학교가 생기면서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가까이에 현암초등학교와 강서초등학교가 있으며, 이 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강서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중학교는 1970년대까지 청원군 강내면 미호중학교에 다녔으나, 1983년 청주시에 편입된 후로 청주 전 지역의 학교를 대상으로 배정받는다. 대부분 마을에서 가까운 충북대학교 부설중학교와 서원중학...
-
(1)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東萊 府使 宋象賢 忠烈祠)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5에 위치한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선조 28년(1595) 동래에 있던 묘소를 지금 위치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
-
강상마을은 70여 년 전까지 마을에서 1㎞ 떨어진 묵방산 봉우리에서 산신을 위했다. 묵방산 봉우리 밑 평평한 터에 음력 3월 초중 택일하여 유교식 절차에 맞춰 제를 올렸다. 택일은 대개 3월 초정일(初丁日)로 하였다. 제를 올리던 묵방산 봉우리를 강상마을 사람들은 지질봉(제일봉)이라고도 부른다. 택일과 함께 산제를 주관하는 제관과 축관을 생기복덕에 맞춰 선출하였다. 이들...
-
윷놀이는 한 해 중 특히 정월에 많이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편을 가르거나 개인별로 윷을 논다. 집 안에서 하기보다는 마당에서 멍석을 펴 놓고 한다. 지금도 정월이 되면 마을 회관 마당에 멍석을 펴 놓고 상품을 사다 걸고 내기를 한다. 주로 강상들 논에 물을 대어 썰매장을 만들어 놀았다. 물을 많이 대 수심이 깊을 경우는 숨구멍이 있어 그곳을 지나가면 얼음이 깨져 물에 빠져 옷을...
-
자거라 자거라 귀여운 아기야 꽃속에 잠드는 꽃나비 같이 고요히 잠 들고 꿈나라 가거라 우리아기 잘자라 잠잘 자거라...
-
마을 앞으로 청주와 조치원 간의 국도-일명 청주가로수길-가 개통되어 있어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교통이 편한 편이다. 청주-조치원 간 대중교통 편인 버스가 20분 간격으로 다니고 있다. 마을의 주 산업은 논농사이다. 논농사 중 메벼 농사를 주로 짓고, 밭작물은 콩과 깨, 고추 등으로 자급용이다. 벼의 출하는 2004년까지 주로 농협과 정부수매를 했다. 이외 다른 방법은 방앗간에 벼를...
-
강상마을은 농촌 마을이기 때문에 봄에서 가을까지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경로당에 모여서 쉬며 지낸다. 농사는 벼농사를 주로 한다. 기계로 경작하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가지 않아 연로한 주민도 농사를 짓고 있으며, 밭농사는 자급할 정도만 짓는다. 강상마을은 여산송씨(礪山宋氏) 집성촌이다. 따라서 종중 일에 동네 주민 모두가 합심하여 참석한다. 1년에 6번 충렬묘...
-
이 날은 일찍 일어나 나무 아홉 짐 하고, 아홉 집에서 밥을 얻어먹어야 좋다고 해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놓고 밥을 얻어먹는 것을 아홉 번 했다고 한다. 해지기 전에 아홉 짐을 하려면 부지런히 해야 했다. 또한 이 날은 끼니 없이 밥을 먹는 날이고 동네 집집에서 밥을 다 얻어먹을 수 있는 날이다. 그리고 열 나흗날에는 ‘일 년 열두 달 액운이 밥에 다 떠나간다’고 해서 잡곡밥을...
-
청주시의 최서단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전 지역이 낮은 구릉지이며 마을 뒤로 낮은 야산이 자리 잡고 있다. 강상마을 뒤로 먹뱅이산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 앞 국도 건너에 강상들이 펼쳐 있다. 마을 주민들은 강상들과 마을 서편의 경부고속도로 쪽, 옥산 쪽으로 펼쳐져 있는 학천들에서 벼를 경작하며 생활한다....
-
우리 천곡(泉谷)할아버지의 출생지는 서울 황하방인데, 지금 그 위치는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겠어.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천곡 선생의 부친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사신 곳은 현재로는 전라도 정읍시 망재동 마을인데 거기가 천곡이야. 그래서 호가 천곡이구, 거기를 샘골이라 부르기도 해.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갈 때 목판에...
-
안방에 자리를 걷고 짚을 정갈하게 깔고 출산한다. 탯줄은 산파가 잘라 흰 무명실로 마무리한다. 잘린 탯줄 등은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왕겨 속에 집어넣고 태운다. 탄 재는 인근 개울가에 가서 띄워 보낸다. ◦ 금줄 딸을 낳으면 솔가지와 숯을 꽂아 대문 앞에 치고, 아들을 낳으면 숯과, 고추를 꽂아 금줄을 친다. 기간은 개인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대개 일주일 정도 쳤다. ◦ 삼밥 아이가...
-
행정명은 상당구 용암1동 4통이고, 법정명은 상당구 용정동 이정골이다. 용정동은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西州內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정리(有亭里), 구곡리(九谷里), 용성리(龍城里), 구하리(九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용성리와 유정리의 이름을 따서 용정리라 하고, 사주면(四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이정골은...
-
(1) 신항서원(莘巷書院) 이정골마을 뒷산 산자락에 서향(西向)으로 위치한 신항서원(莘巷書院)은 조선 선조 3년(1570) 창건되었다. 아산현감 경연(慶延)·문도공 동부승지 강수 박훈(朴薰)[1484~1540]·문간공 형조판서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문충공 대사헌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1487~1547] 등 이 지방 출신 선현 4인을 모시다가...
-
이정골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신격과 당의 위치에 따라 산신제와 장승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정골에서는 천제당에서 먼저 지낸 다음 산제당, 그리고 장승의 순서로 지낸다. 제사 날짜는 보통 정월 열나흗날이나 보름날을 택하는데, 동네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당기거나 뒤로 미룬다. 제당은 천제당과 산제당 그리고 마을 앞 장승(석불입상) 등 총 세 곳이다....
-
얼씨구나 좋다 어- 한 걸음 더 띱시다 띱시다 얼씨구 좋다 하나 더 띱시다 한번 더 띱시다 줄줄이 줄줄이 잘 잘 얼씨구나 좋다 좋아요...
-
주산업은 논농사이며, 밭농사는 고추와 깨, 콩 등을 재배한다. 그 외 몇 가구가 근래에 과수(포도) 농사를 짓고 있다. 용암동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마을 아래의 들판이 청주시 외곽도로로 편입되고, 김수녕양궁장 부지에 들판이 유입되어 마을 주민의 농토가 많이 줄어들어 경작량이 많이 줄었다. 교통편은 청주시 외곽도로가 개통되면서 조금 나아졌으나 대중교통편인 시내버스는 한 시간...
-
이정골은 농촌 마을이다. 봄에서 가을까지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마을 노인회관이나 집에서 쉬며 지낸다. 최근에 몇 집에서 과수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겨울에도 틈틈이 과수원에서 내년 수확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대동계를 비롯한 마을 조직을 중심으로 마을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마을에 상이 나면 주민들이 내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마을 총회와...
-
용정동은 시의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월오동, 서쪽은 용담동, 남쪽은 용암동, 북쪽은 명암동과 접한다. 마을은 산의 큰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마을 뒤로 매봉, 가니봉, 낙가산 등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하천이 흐르고, 양쪽 산기슭을 따라 과수원과 밭이 있고,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마을 어귀 구정고개 옆에 농업용...
-
옛날에 “꼭끼할매”가 치마에 돌을 가져가다가 그 자리에 콱 박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두 개를 가져갔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박혀 있어. (나머지 하나도) 아마 찾아보면 어디에 있을 거여. (제보자 : 이정진, 남, 1923년 생, 상당구 용정동 46) 금강산에서 일만이천 봉을 수집하는데 이것(선돌)을 가져가다가, 일만이천 봉을 다 쌓아서 완성했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에 놓...
-
행정명은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 8통이고, 법정명은 청주시 상당구 정상동 돌꼬지이다. 정상동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북강내일면(北江內一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봉정리(鳳亭里)와 서강내일상면(西江內一上面)의 정북리(井北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상리(井上里)라 명명하고 북일면(北一面)에 편입하였다. 정상리(井上里)는 이 지...
-
일제시대 후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세대는 청주대성학교와 북일초등학교를 다녔다. 북일초등학교는 인근 학생들이 모두 다녀서 한 때 학생수가 2,000여 명이나 되어 오후반이 개설될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주민이 줄어들어 학생수가 100여 명 정도라서 폐교된다는 말이 있다. 현재 돌꼬지마을 아이들은 새터초등학교를 다닌다....
-
돌꼬지[石花] 마을에는 용출수인 우물이 마을 입구에 있다. 이 우물로 인해 정상동, 정하동, 정북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할 정도로 인근에서는 유명한 우물이다. 실제로 농업용수가 개발되기 전까지 이 물은 농업용수로, 식수로도 쓰여 주민들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우물이었다. 이런 고마운 우물에 동네 주민들은 샘제(용왕제)를 지낸다. 돌꼬지 동제는 세 군데서 지냈다. 우...
-
이거리 저거리 닷거리 / 천두 만두 저만두 쫙 벌려 소양강 / 오리진치 살어육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애기 잘두 잔다 검둥개도 잘두 잔다 흰둥이도 잘두 잔다 자장자장 자장 자장 앞집 강아지 잘두 잔다 (아이를 눕히거나 무릎에 올려 앉고 ) 엄마 손은 약손이고 네 배는 똥배 썩 나려 가그라 떨크덩 떨크덩 찧는 방아 언제나 다 찧고 밤마실 가냐 시어머니 시집살이 할제는 좋기두(싫기...
-
돌꼬지마을 교통은 편한 편은 아니다. 대중교통편인 시내버스는 하루 몇 번 운행되지 않는데 이는 대부분 시내버스 종착점이 밑에 마을인 정하동이기 때문이다. 마을 앞까지 오는 시내버스 첫차는 여섯 시에 있고, 막차는 열한시에 있다 일제시대 때는 마을에 국철이 개통되었고, 청주역이 생기면서 1980년대 철도 복선공사로 인해 마을 앞 도로를 넓힐 수 없어 1차선 도로가 현재까지...
-
청주시에 편입된 동이지만 마을의 형태는 농촌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생활의 흐름도 농사일에 맞춰 진행된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 준비해서 가을걷이로 마무리한다. 특별히 특용작물을 재배하지도 않기 때문에 겨울에는 한가로이 쉬면서 지낸다. 동네에 인구밀집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없어 하루에 한 번 정도 들어오는 이동식...
-
이날은 정월 내 띄우던 연을 날려버리는 날이다. 연줄에 솜방망이를 달아 솜방망이에 불을 피워 띄우면 어느 정도 날아가다가 대추나무에 걸린다. 이를 보고 “대추나무 연 걸린 듯하다”라고 했다. 정월대보름에는 열 나흗날 농사 떡(고사떡)을 해놓는다. 돌꼬지마을 정월고사는 동제를 지낸 다음 날부터 지낼 수 있다. 산제가 열사흘이면, 열 나흗날 떡을 해서 고사를 올린다. 한 해...
-
정상동 돌꼬지마을은 들판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 들판은 농지정리가 잘 되어 경작하기 편하게 되어 있고, 마을 앞으로 무심천(無心川)이 흐르고, 북쪽으로청주 정북동 토성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 입구에 낮은 야산이 위치한다. 이 산에 돌꼬지의 유래가 된 하얀 돌이 있었다고 한다....
-
현재 마을에서 출산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출산을 할 연령대의 주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산 풍속이 바뀌어 조산원이나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제보자들은 모두 자신의 집에서 출산을 했다. 산모가 진통을 시작하면 방에 미리 추려 놓은 짚을 깔거나 회푸대 종이를 깔아 삼자리를 마련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파가 탯줄을 자르는데, 아이의 배꼽에서 넉넉하게 한 뼘 되...
-
행정명은 강서2동 2통이고, 법정명은 흥덕구 평동 들말[坪里]이다. 들말은 본래 청주군 서강내일상면(西江內一上面) 지역으로 마을이 들판에 있어서 들말이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강내일하면(西江內一下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를 병합하여 평리(坪里)라 해서 청원군 강내면(江內面)에 편입된 후, 1983년 2월에 대통령령에 의하여 청주시에 편입되었다....
-
평동 들말 주민 중 70세가 넘는 주민은 강서초등학교로 진학했다. 70여 년 전 일제시대에 원평에 간이학교가 생겨 그 곳으로 다녔다. 그 간이학교가 현재 내곡초등학교 위치로 이전하고, 후에 내곡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 들말마을에는 초등학생 10여 명이 내곡초등학교에 다닌다. 중학교는 근처에 소재한 대성중학교나 주성중학교로 다닌다....
-
들말에서는 정월 보름 아침, 장승이 서 있던 두 곳에서 마을의 태평을 위해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제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장승은 마을 안과 밖 두 곳에 서 있었다. 한 곳은 들 복판 통샘이 있었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마을 아래쪽 입구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 옆이다. 아카시아 나무 옆 장승터는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제의 순서는 들판에 있던 장승에...
-
이 못자리 모를 심어 / 삼백 초 짜리로 일취월장 초승달이 반달이냐 / 니가 무슨 반달이냐 우리네 서방님은 일본 내판 돈벌러 가셨는디 북망산천리 가신님은 어느 시절에 오시나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냉겨주게 세월인지 봄철인지 가지럴 말아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어 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냉겨주소 에헤 잊어버리자 하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간밤...
-
평동 들말마을은 대중교통편인 버스가 1일 10회 정도로 운행되며, 버스정류장은 마을 중간에 있다. 첫차는 6시 50분이며, 막차는 10시에 있다. 마을의 주 산업은 논농사이다. 전체 가구수 중 농사를 생계로 삼는 가구는 52가구 정도 된다. 평동 들말마을 앞의 작천들은 미호천(美湖川)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물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에서 내려와 충청남도 조치...
-
들말은 청주시에 편입되어 있으나 농촌이라고 볼 수 있다. 주민 중 40% 가량이 농사를 짓고 있고, 원주민이 노령화되어가는 추세다. 마을이 농촌 생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교통과 위치를 들 수 있다. 위치가 시의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마을 서쪽으로 중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가고 있으며, 시내 쪽으로는 산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주변 마을과 왕래가 원활하지...
-
평동은 시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내곡동과 옥산면의 가락리, 남쪽 신성동, 북쪽은 신대동과 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으로 아래평리, 위평리가 있고 그 주변으로 나무터, 마랭이안, 만경대, 망내(輞川), 매봉재, 모래뚝, 방축안, 상무주골, 원고개, 자반구레, 중학수골, 청룡산 등이 있다....
-
통미산을 벌미산이라고도 한다. 들 복판에 우뚝 서 있다고 해서 통미산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부모산에서 장마비에 떠내려 왔다고도 하고, 이성계(李成桂) 때 소사가 치마에 싸가지고 가다가 자빠져서 거기다가 쏟아 놓고 갔다고 한다. 들 복판에 우뚝 서서 부모산에서 장마 때 떠내려 왔다고도 하지. 그리고 아들하고 딸하고 내기를 하는데 딸이 치마에 싸서 가다가 엎어져 쏟아져...